저고리의 변천사
저고리는 원시시대의 관두의에서 발달하여 오늘날의 짧은 저고리가 되었다. | |
상대사회의 저고리는 고분벽화를 통해서 볼때에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허리에 띠를 둘러 여밈을 하였다. 깃은 모두 곧은 깃이고 섶은 좌임과 우임을 볼 수가 있다. 소매는 좁고 깃, 도련, 소매 끝에 다른색의 선을 둘렀다. |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 고려시대의 저고리는 좁은 소매에 노랑저고리를 주로 입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시대 저고리의 변천을 보면 저고리의 길이가 길던 것이 년대가 내려올수록 짧아졌고 소매는 배래선이 직선으로 되어 있었다. 수구에 넓은 끝동이 있던 것이 수구쪽을 향해 좁아지면서 곡선으로 변하고 있다. 깃은 넓고 목판깃이던 직령깃이 좁아지면서 둥글어졌다. 곁마기는 겨드랑이 아래에만 있던것이 차차 소매쪽으로 나가고 띠를 매던 것이 고름으로 변하여 가늘고 짧던것이 넓이가 넓어지고 길어졌다. 저고리의 변천에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동이 없었다. 상대사회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주름이 많고 긴 치마를 볼수 있는데, 의례용으로 입었음을 알수 있다. 그후의 치마에 대해서는 문헌 및 자료의 부족으로 알수가 없으나 조선시대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초기에는 저고리길이가 길어서 치마의 길이가 짧았으며 후기로 올수록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치마의 길이는 길어짐을 알수 있다. | |
치마의 변천사
치마는 하의로서 량다리를 분리하지 않고 입는 옷으로 허리·끈·치마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치마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훈몽자회』의 '쵸마'이고, 조선초기 세종때 '저고리'란 용어와 처음 사용되었다. | |
고려이전의 문헌자료에서는 '치마'와 상통되는 용어로는 '상(裳)'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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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치마에 대해서는 문헌에 상(裳)과 군(裙)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365∼1372년경의 공민왕릉벽화에 홀을 든 례복(조복이나 제복으로 볼 수 있다)에 남자가 치마를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인사목판에서도 긴 치마를 착용한 례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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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치마로는 인조대(1623∼1649)의 남이흥 장군부인 하동정씨의 치마 2점과 영조대(1732) 현부인 전주최씨의 치마가 있다. | |
조선초기와 중기에는 겉치마로 솜치마, 솜누비치마, 겹치마 등을 입었으나, 후기에 와서 솜치마, 누비치마 등은 없어지고 겹치마만 입었음을 볼수 있다. | |
치마길이가 짧은 것은 113㎝에서 가장 긴 것은 135㎝까지로 초·중기의 것보다 많이 길어진 것을 볼수 있는데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진 것에 대해 반대로 치마길이가 길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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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korean.com.cn/index.php?document_srl=6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