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쉽게 만드는 악기, 빨대 팬 플루트

작성자: 더덜기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10-31 13:01:51    조회: 38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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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다르지 않습니까.” 
“계약서 잘 읽어보라니까요. ‘1주일 이내’라는 말 안 보이냐고요.” 
“정확히 7일 걸렸으니 1주일 이내 맞잖습니까.” 
“아 진짜 이 양반, 일 안 해 본 티를 내네. 이 기회에 잘 새겨둬요. 사회 나가서 무시당하지 말고. 사회에서 1주일이란 말이지, 월에서 금까지라고 금! 주말에 일한 거 안 쳐준다고.” 

‘그건 어느 나라 달력 기준이냐!’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온 말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개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상대의 면상에 계약서라도 집어 던져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온 몸이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쥐가 창궐하고 있으니 네 신묘한 피리소리로 제발 좀 없애달라고, 그러면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것처럼 굴던 게 누구였던가. 막상 결혼…, 아니 문제점이 해결되자마자 돈이 없니 어쨌니, 계약을 어겼니 저쨌니, 그러니까 너는 알아서 빈손으로 가세요 난 배 째렵니다 하고 앉았다. 역시 처음부터 맡을 일이 아니었다고 후회하며 그냥 한숨만 내리 쉬었다.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결론은 돈 주기 싫다는 소리시네요?” 
“어허 이 사람 보게. 왜 우릴 자꾸 야박한 사람으로 몰고 가? 우린 그저 계약서대로 처리가 안 됐으니까 어디까지나 서류에 입각한 공무원 정신을 발휘….” 
“알겠습니다. 안 받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까지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에 속이 다 뒤틀릴 지경이었지만 방법이 없다. 안 보이게 주먹 한 번 꼭 쥐어 주고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시청을 나선 건 좋았는데…, 이제 어디 가지? 주머니에 돈은 없고 잔고는 옛 저녁에 ‘0’을 찍었다. 밥벌이용 피리까지 전당포에 잡히고 받았어야 할 인건비는 저 하늘로 날아간 지 오래. 이 낯선 도시에서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눈물을 삼켜도 배는 부르지 않다. 

무너진 성벽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문드문 핀 들꽃이 바람에 휘날리고 그 사이를 아이들이 뛰어 논다. 조금씩 내려앉는 석양 속에서 누가 쓰다 버린 기다란 빨대가 둔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심코 손 사이에 끼우고 입을 댔다. 그래도 배운 건 밥벌이용 기술밖에 없어서, 이 와중에도 소리를 내려 애쓰는구나. 문득 이상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애들 몇이 고개를 갸웃대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빨대를. 부러 흥겨운 가락을 내보았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개중에 용감해 보이는 놈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빨대로 뭐 하세요?” 
“피리 불고 있어.” 
“피리? 아저씨 혹시 음악가예요?” 
“그런데?” 
“저도 그거 알아요. 배고픈 직업이죠?” 

순간 성벽에서 쓰러질 뻔 했다. 팔짱까지 끼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 놈은 어린애들 특유의 ‘난 세상을 다 아는 훌륭하고 조숙한 어린이랍니다’라는 표정으로 사람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참으로 불안하다. 

“뭐냐….” 
“아저씨가 불쌍해서요.” 
“동정할 거면 돈으로 줘.” 
“전 애잖아요. 애한테 갈취하는 건 범죄예요.” 

나 참, 애들 데리고 뭘 하고 있담. 스스로가 세 배쯤 더 불쌍해지는 기분을 지우기 위해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빨리 잘 곳을 찾지 않으면 내일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기력도 안 남겠지. 바삐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뭐가 졸졸 쫓아온다. 아까 그 놈이다. 

“피리 만들고 부는 법 가르쳐 줘요.” 
“내가 왜?” 
“가르쳐 주시면 저희 집에서 하룻밤 재워드릴게요. 빈 방 있어요.” 

이 녀석, 협상을 안다. 

“나 잘 곳 없는 그런 사람 아니야.” 
“돈 달라면서요. 돈 없는 예술인은 보호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요.” 
“뭐 하시는 분인데 그런 장한 소릴 하시냐?” 
“시청에서 일해요. 아저씨 같은 사람 지원하는 부서.” 
“혹시 아주 심한 지성 피부에 이마가 살짝 광활하시니? 눈 사이에 사마귀 하나 있고?” 
“네. 잘 아시네요. 본 적 있어요?” 
“네 아빠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면 우린 만나선 안 되는 사이 같구나.” 
“아, 아빠가 또 돈 안 준다고 뻗댔구나. 이해하세요. 집에서도 그러거든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지. 나랏돈 가지고 제 돈인 양 뻗대면 정말 못 쓰는데…. 그런데도 재워준다고?” 
“음, 엄마랑 삼촌이랑 전 아빠 괴롭히기 연합회 회원이거든요. 우리가 아저씨를 거둔 거 보면 아빠가 미쳐 날뛸 걸요. 그럼 엄마랑 삼촌이랑 전 웃으며 하이파이브~!” 
“갈 마음을 차~암 부추겨주는 발언이구나.” 
“아 괜찮아요. 엄마 말에 따르자면 ‘삼시 세끼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양반’이거든요. 오늘 중 들어오기만 해도 다행인데요 뭐.” 

표정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보통 조숙한 꼬마가 아니다. 그 거만한 인간이 가족에게 이렇게 미움 받고 있다는 것에 마음의 위안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항복의 뜻으로 다시 성벽에 걸터앉자 꼬마는 만세를 부르며 옆에 앉았다. 

“집 가깝냐?” 
“네.” 
“집에 굵은 빨대는 좀 있고?” 
“아마도요.” 
“그럼 가서 가져 와. 내 몫, 네 몫 해서 16개. 가위랑 테이프, 끝을 막을 솜이나 스티로폼 있으면 그것도 갖고 오고.” 
“오케이. 10분 만에 올 테니까 그 사이 도망가면 안 돼요~.” 

정말 10분 만에 바람을 가르며 돌아온 녀석을 보며 속으로 좀 웃었다. 어지간히 갖고 싶었나보네. 빨대를 자르고 있노라니 옆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본다. 조숙하지만 착하고 솔직한 소년이다. 절대 재워준다고 해서 이러는 거 아니다! 네가 외가 쪽을 닮아서 이 아저씨는 정말 기쁘단다. 

“자, 이제 8개가 다 다른 길이지? 내가 하는 것처럼 이렇게 끝을 막고 붙이면 돼. 다 만들었으면 입 대고 소리 내봐. 세게 불고~!” 
“우와, 소리가 다 다르게 나네? 왜 이런 거예요?” 
“음, 소리는 진행 방향에 평행하게 이동하면서 가는 파동이야. 파동은 덜덜 떨리는데 이걸 진동이라고 하거든? 일정 시간 동안 얼마나 진동하느냐를 진동수라고 해. 진동수는 헤르츠(㎐)로 표시하는데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영역은 20~20,000㎐야. 이 음역대를 가청음이라고 하지. 파동이 빨리 진동하면 진동수가 높아지겠지? 그럼 소리도 같이 높아져.” 
“그럼 소리마다 다 다른 게 진동수가 달라서겠네요? 짧은 관에서 높은 소리가 나는 이유는 거기서 진동수가 높아져서고요?” 
“정말 외가 쪽을 닮아서 다행…, 아니 넘어가고. 소리의 파동을 음파라고 하는데, 길이가 짧은 관을 통과하는 음파는 긴 관을 빠져나가는 음파보다 빨리 진동해. 우리 귀에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들리도록 관 길이를 맞춰 주면 어떤 관으로든 악기를 만들 수 있지.” 

신나게 불어대는 소년 뒤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성벽에서 내려와 손을 내미니 고개를 살랑살랑 젓더니 제 힘으로 뛰어 내린다. 앞장서는 녀석을 따라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 정신 건강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면 그 집에서 자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묵묵하게 걷고 있자니 녀석이 문득 빨대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에 어쩐지 코가 시큰해진다. 

“다른 악기도 같은 원리인가요?” 
“진동수를 조절해서 들리는 소리를 바꾼다는 원리는 마찬가지지. 어떻게 바꾸느냐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예를 들어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줄을 튕기는 힘으로 공기를 진동시키고, 줄의 굵기나 길이로 진동수를 바꿔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거든. 피아노도 마찬가지로 안에 들어있는 줄을 쳐서 음파를 만들어내.” 
“드럼이나 북은 그 두드리는 판이 떨려서 그런 거구요?” 
“너 이해력 진짜 빠르구나. 판 또는 가죽이 떨리면서 공기를 진동시키는 거 맞아. 걔들이 붙은 통의 크기가 달라서 소리 크기나 높이가 달라지곤 하지.” 
“아, 제가 엄마 닮아서 그래요. (역시!) 그건 그렇고, 팬 플루트 말고 리코더 같은 악기는 어떻게 소리가 달라져요? 그거 관 하나밖에 없잖아요.” 
“구멍을 막고 떼고 하면서 공기가 빠져 나가는 길을 조절해 주는 거야.” 
“오오, 집에 가서 한 번 확인해봐야지.” 

검은 공기 속을 빽빽거리며 울리는 녀석의 서투른 피리 소리에 난생 처음 피리를 손에 들었던 어린 내가 겹쳐 보였다. 그 소리에 개니 고양이니 온갖 동물이 모이기 시작했을 무렵도. 그 땐 내 음악에 동물까지 감동한다며 순수하게 기뻐했었는데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버렸을까. 괜히 더 서글퍼져 아래만 보고 걷고 있자니 앞의 녀석이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자, 다 왔어요. 여기가 우리 집!” 
“어, 그래. 잘 가.” 
“아저씨도 같이 들어가야죠.” 
“아니 난 그냥 밖에서 잘란다. 아버지 안 계신데 들어가기도 미안하고. 마음이나마 고맙게 받으마.” 
“아 이 아저씨 보래. 우리가 한 약속 잊었어요? 아저씨는 제게 피리 만드는 법 가르쳐 주시고, 전 잠자리를 제공하고. 약속은 지켜야죠. 안 그래요?” 

사람을 기본 도리도 안 지키는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말아요. 가볍게 투덜거린 녀석은 내 옷자락을 잡은 채 문을 힘차게 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야무진 손끝에 고개를 숙이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나도 내 편의대로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간이었구나. 미안하다. 따스한 빛 속에 발을 들이기 직전, 문득 다시 올려다 본 검은 하늘에 소년이 불던 서투른 음색이 별빛처럼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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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과학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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