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렬사비16]연안 청량산 리철부 묘소는?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1-02 10:46:51    조회: 165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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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철부와 장수암 부부(자료사진)

 

아침 일찍 서안을 떠난 전용뻐스는 옹근 하루 낮을 달려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 시절 길이 그러했다. 1988년 10월, 공청단중앙 주최로 서안에서 조직된 ‘항전시기의 청년운동 학술토론회’ 연안참관단 일행 가운데서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연안이 아니던가! 나는 봉황산 밑에 자리잡은 연안호텔 3층의 한칸에 행장을 풀어놓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불야성을 이룬 연안성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찰나 기적과도 같이 등불에 현란히 싸인 보탑이 신기루마냥 어둠속에 불쑥 나타났다. 좀 후에야 안 바이지만 연안시에서는 우리 참관단 일행을 환영하여 설명절이거나 중요한 기념행사 때에만 켠다는 보탑 장식 등불을 일제히 켜놓았던 것이다.

이튿날 오전 8시 반, 우리 연안참관단 일행은 마침내 보탑을 얼싸안게 되였다. 연안시 동남쪽 연하(延河)강반의 가령산에 솟아있는 보탑은 그 높이가 44메터나 되는데 당나라 때 산물이라고 한다. 1937년 1월 13일 우리 당중앙과 중앙군위 등 령도기관이 처음 연안에 들어선 후 보탑은 연안의 상징으로 억만 로고대중의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보탑-연안, 그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과 혁명지사들이 구름떼처럼 연안에 몰려들었던가. 그 속에는 조선인으로서 첫패로 연안에 들어선 김산과 홍군장령 무정 그리고 그 후의 본문의 주인공 리철부 등 수백에 달하는 조선인 혁명가들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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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연안 보탑산

 

전용뻐스는 보탑을 끼고 산을 에돌아 아래로 내리더니 청량산(清凉山)을 거쳐 왕가평(王家坪) 연안혁명기념관에 이르렀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기념관이였다. 1950년에 봉황산 밑에 세워졌다가 1973년에 이곳 왕가평에 옮겨진 기념관이였다. 기념관 정문과 정원을 지나 기념관에 들어서니 당년 연안의 생활 속에 뛰여든 심정이다.

기념관에서 홍군동정로선도(红军东征路线图,1936년 2월-5월)와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 문물과 사진들을 보아냈다. 조선인 혁명가 양림에 이어 리철부(李铁夫)가 조용히 미소 짓는 것 같았다. 1937년 5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 회의와 더불어 중공중앙 백색구역 사업회의가 연안성 내 대례당에서 열렸을 때 당시 중공 하북성위 위원 겸 천진시위 서기로 활동하던 리철부가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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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철부는 회의에서 한두차례 발언에서 백색구역에서의 ‘좌’경페문주의 오유를 신랄히 비판하였으며 류소기, 팽진 등과 함께 모택동동지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대회 기간에 중공중앙은 리철부를 중공 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하였다. 중앙의 령도동지들은 리철부가 장기간 백색구역에서 어려운 지하투쟁에 종사했고 또 페결핵으로 몸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그를 섬감녕 서북국에 먼저 남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찾아 담화까지 하였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장질부사에 걸리였다. 그러나 당시 의료수준이 따르지 못한 원인으로 장질부사를 감기로 오진하였기에 치료시간이 지체되여 리철부는 그 해 1937년 7월 10일에 연안 교아구(桥儿沟) 휴양소에서 불행히 서거하였다.

그런 기분이여서인지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 문물과 사진 전시 구간에서 이윽토록 발을 떼지 못하였다. 연안에서는 리철부의 추도회를 장중히 가지고 묘소를 청량산에 모시였으며 《신중화보》는 리철부의 략전을 싣고 추도회 소식을 보도까지 하였었다.

그 후도 당중앙은 조선인 리철부를 잊지 않았다. 1945년 4월, 당중앙은 연안 양가령(杨家岭)에서 당7차대회를 열었다. 대회 전야에 중공중앙 판공청에서는 리철부의 묘지에 대리석 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에는 “조선공산당 창시인의 한 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중공 하북성위 서기인 리철부동지 묘”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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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연안혁명기념관 외경

 

리철부의 묘지와 대리석 비석이 연안 청량산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날 오후 나는 연안참관단의 참관일정에서 조용히 빠지여 연하를 건너 청량산의 산밑 길가에 위치한 연안시민정국을 찾았다. 민정국에서는 그 시절 리철부의 묘지가 확실히 청량산에 있었지만 그 후 어떻게 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직접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 시절 청량산은 산기슭 부분에 건물들이 있을 뿐이지 산중턱부터는 전부가 울창한 나무숲이고 그 숲속에 덩실한 당지 묘지들이 수두룩하였다. 주인 없는 묘지들은 뭇풀들이 키돋움하며 자라나 보기에도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대수랴, 겨레 렬사묘소들을 찾아다니는 건 나의 겨레력사연구의 일환이였으니. 나는 개의치 않고 나무숲속의 묘지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하나하나 묘지를 주의하여 살피였다. 그런데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청량산의 묘지 사이사이를 다니고 다니였지만 리철부의 묘소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연안시민정국에서 리철부 묘소란 말에 뒤말을 흐리더니 과연 사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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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하루 길을 달린 해가 서산에 걸터앉으려고 서두른다. 유감천만이기만 하다. 1947년 3월 19일, 국민당 호종남(胡宗南)의 20여만 군대가 연안에 쳐들어갔을 때 국민당군대에 의해 훼멸되였는지? 그저 그대로 발길을 돌리자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때로부터 24년 세월이 흘렀다. 24년 세월 속에서도 리철부의 묘소를 찾지 못함이 늘 마음에 걸린다. 2012년 6월 25일부터 7월 8일까지 나는 양림, 무정 발자취 답사 차 섬북 땅을 다시 밟게 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연안에 이르러 청량산을 다시 전면 답사하려고 하니 청량산은 24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제날 수풀이 우거지고 묘지가 들어섰던 곳은 거의다 새 건축군으로 변해버리였다. 그 사이 새 건축군은 산아래로부터 산중턱 전부를 덮어버렸으니 리철부 묘소를 다시 찾아본다는 것은 허망한 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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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청량산 어구 모습

 

별수 없이 나는 동행한 쌍둥이 딸애와 함께 24년 전의 연안혁명기념관을 다시 찾았다. 와아! 거대한 변화 앞에서 경탄해마지 않았다. 연안혁명기념관은 1997년 1월 13일, 당중앙과 모택동동지가 연안에 진주한 60돐 기념일에 락성되였다고 하니 엄청 규모의 기념관은 기념관 앞 광장 면적만도 2.7만평방메터를 이루어 24년 전과 판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광장 중심부에 높이 5메터를 가진 모택동의 전신 청동상이 거연히 일어섰으매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먼곳을 응시하는 모택동은 일대 위인의 형상으로 우렷이 떠오른다.

연안혁명기념관 내에는 리철부 관련 전문 전시는 없어도 〈연안에서의 국제 벗들〉(国际友人在延安)부분에 귀국을 앞둔 조선군정학교 전체 학원들이 연안 라가평에서 함께 남긴 사진(1945년 9월)과 정률성의 여러 사진 전시는 조선혁명가들의 연안에서의 활동상황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 수백명 조선혁명가들 속에서 리철부는 몇몇 선두주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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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1937년 5월, 모택동은 중공중앙 백색구역 사업회의에서 왕명 ‘좌’경로선을 반대하여나선 리철부를 전면 긍정하면서 “화북당은 그때 중앙의 모험로선에 대하여 일찍 예리한 반대의견이 있었는데 그 수령은 리철부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만큼 리철부는 중국인민들 속에서 위망 높은 국제주의자로서 1901년에 함경남도 홍원(洪原)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한위건(韩伟键)이였다. 그는 조선 국내와 쏘련, 중국의 상해, 일본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다가 1928년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북평반제대동맹 당단서기로 있다가 천진에 가서 중공 하북성위 선전부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중공 하북성위 선전부장인 리철부는 1933년 11월부터 1934년 2월까지의 기간에 〈당내문제에 관한 몇가지 의견〉, 〈‘좌’경 기회주의의 반동성〉 등 10편의 글을 써서 살판치는 왕명의 ‘좌’경로선을 과감히 비판하였다. 그중 몇편이 성당위 간행물 《화선》에 실리였다. 이로 하여 그는 ‘철부로선’, ‘취소주의’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좌’경로선 실시자들의 타격을 받았으며 당조직과의 관계도 단절되였다. 물론 그의 안해 장수암도 타격을 면치 못하였다. 리철부는 천진에서 사업하는 기간 당의 지시에 좇아 장수암이라고 부르는 녀성혁명가와 부부로 가장하고 ‘동거’하다가 결혼에 이르렀다.

리철부는 ‘좌’경로선 실시자들의 타격을 받아 당과의 조직적 관계는 잃었지만 일편단심 혁명에 충성하는 굳은 절개는 변치 않았다. 어려운 그 나날 리철부는 안해와 함께 로동자, 학생, 직원, 지식인들 속에 들어가 군중을 묶어세우고 당원을 받아들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기간에 그들 부부는 중화민족무장자위회와 천진 각계 구국회를 조직 령도하였으며 《화북봉화》, 《천진녀성》, 《민중항일구국보》 등 혁명적 잡지를 꾸리였다. 한편 장수암의 둘째오빠인 북평 경찰 총감 장벽(张璧) 등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좌’경로선의 피해로 적에게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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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혁명기념관에 전시된 정률성 사진과 조선의용군 단체사진 /이상 사진 2012년 6월 30일 현지촬영

 

1935년 12월 18일, 천진학생들이 북평 ‘12.9’운동에 호응하여 성세호대한 항일구국대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이 대시위를 조직지도한 주요책임자가 리철부였다.

1936년 봄 류소기가 당중앙 대표로 천진에 와서 당의 북방국 서기로 사업하게 되였다. 따라서 리철부는 중공 하북성위 위원 겸 천진시위 서기란 중책을 짊어졌다. 그러다가 1937년 5월,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연안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와 백색구역 사업회의에 참가하였다가 페결핵 아닌 장질부사로 그 해 7월 10일 연안 교아구에서 불행히 서거하였다. 리철부는 바로 이러한 분인데 연안 청량산에 모셔진 묘소와 대리석 비석을 찾지 못하니 나의 잘못이런 듯 마음 편하지가 못하였다.

지금 연안 청량산의 리철부 묘소와 대리석 비석이 어떻게 되였는지 알지 못한다. 완전히 흔적조차 없어졌는지 아니면 어디로 이장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민들의 맘속에 뿌리내린 리철부의 형상은 예나 제나 앞으로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2017년 5월 6일 위해 석도에서

 

출처; http://kr.chinajilin.com.cn/cxz/content/2017-05/22/content_18724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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