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렬사비12]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3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1-01 12:02:32    조회: 16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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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화림의 회고가 이러하다면 연안에서 활동하던 정률성이 태항산으로 온 시간도 1942년 8월일가? 이에 대한 해답은 정률성의 안해인 정설송(丁雪松)의 장편회고문에서 너무도 잘 나타난다. 정설송은 1981년 12월에 북경에서 쓰고 1982년 4월에 수정한 《영원한 기억(永存的记忆)》이란 장편회고문에서 연안을 떠나 태항산으로 간 시간을 1942년 8월로 밝혔다.

이 같이 보면 정설송의 회고와 리화림의 회고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진다. 두 회고 모두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갔고 출발도 홀몸이 아닌 무정과 정률성 두 사람으로 밝혀진다. 태항산으로 갈 때 그들은 수수한 중국인 농민복장을 하고 떠났는데 정률성은 우에는 검은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렀다. 그때 정률성이 남긴 사진이 이런 모습임을 알리고 있다. 이쯤하면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되여 갈 때가 확실히 1942년 8월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지 않을가. 이는 또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당중앙에 청시하면서 무정을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할 것을 요구한 시간인 1942년 7월과도 맞아떨어진다. 팽덕회의 청구에 따라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즉각 비준지시를 내렸으니 1942년 8월에 연안을 떠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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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현 석문촌 련화산 아래 좌권장군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이에 앞서 조선의용대는 원 활동지들인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과 마전진 운두저촌(云头底村)을 떠나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섭현 섭성진 중원촌(일명 곡원촌-曲原村)으로 활동지대를 옮겼다. 1942년 여름에 이르러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건립된 조선의용대의 북상이 기본상 끝났다. 이 해 7월 중순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중원촌 주둔지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가지고 본 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개편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태항산근거지에 본부를 두고 화북 각지에 지대를 두었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정식 부임한 곳은 태항산근거지 내 하북성 섭현 중원촌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2009년 8월 20일, 무정과 무정 소속 조선의용군의 발자취를 좇아 하북—산서 접경지대의 하북성 섭현 중원촌을 처음 찾았다. 중원촌은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한 마을로서 섭현 현성에서 청장하(清漳河)를 따라 서쪽으로 5키로메터 떨어진 청장하 기슭의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원촌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은 청장하가 흐르는 평야에서 산아래 언덕으로 치달으며 나타났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촌사무실로 보이는 단층집 대문가에 달린 섭성진 중원촌(涉城镇中原村) 지부위원회와 촌민위원회 간판이다. 마침내 당년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태항산항일근거지 심장지대에 들어서고 중원촌의 사람들은 멀리 동북땅에서 온 이 조선족 나그네를 열성적으로 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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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물어 지난 세기 40년대 초반 우리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원정사(元定寺)를 찾으니 원정사는 옛 모습 그대로, 마을의 제일 높은 지대로 보이는 언덕 우 색바랜 낡은 단층집으로 시야에 안겨들었다. 사합원(四合院) 형태를 이룬 원정사 단층집 바깥은 담장모양으로 담장벽을 이루고 대문에 들어서면 네 면이 모두 각이한 건축구조를 가진 여러채의 회색 벽돌집으로 둘러있다.

마을의 안로인 몇분이 원정사 내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필자가 동북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무척 반기면서 이 원정사가 당신들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중심부라고 했다. 중원촌의 안로인들과 대문가 세멘트로 된 표지석에는 한단시 문물보호단위 완정사(邯郸市文物保护单位完定寺)로 되고 대문 바로 우에는 원정사(元定寺)로 나타나니 웬 일인가고 물었다. 그들은 너나없이 이 옛 절은 조선의용군이 활동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원정사’로 통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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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현 련화산 아래 진광화, 섭정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필자는 당년 우리 겨레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한 태항산의 중원촌에 서고 있었다. 당금이라도 무정이며 정률성이며 환히 웃는 모습으로 대문가에 들어서는 것 같고 〈아리랑〉노래를 부르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것만 같다. 1942년 8월, 무정장군을 따라 연안을 떠난 정률성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처음 들어선 곳이 이곳 중원촌 원정사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시절 중원촌 원정사는 많이는 학교 교실로 리용되고 부족되는 류숙지는 흔히 주변의 민가에 잡았다. 필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원정사 주변에서 당년 조선동지들이 머무른 민가 여러채를 찾았다. 민가 주인들은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류숙한 적이 있는 한단락 력사를 집의 자랑으로,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원정사 내에서 휴식하던 마을의 안로인들은 더구나 그러하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중 한 안로인은 무정사령원을 알고 있다면서 엄지를 내들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였다.

섭현의 중원촌은 팔로군 129사 사령부가 자리잡은 적암촌(赤岸村)과 청장하(清漳河)를 사이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 대한 당중앙과 팔로군총부, 129사 사령부의 뜨거운 사랑과 깊은 배려였다. 조선의용군 신임 사령원 무정이 중원촌에 이르자 그 달 8월, 팔로군총부와 129사 사령부, 근거지당조직에서는 근거지군민들에게 통지를 내여 피어린 항일전쟁에서 영용히 희생된 진광화, 석정 등 조선동지들의 영웅업적을 널리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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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적암촌과 중원촌에서 멀지 않은 태항산의 섭현 련화산(莲花山) 기슭에 좌권(左权)장군과 진광화(陈光华), 석정(윤세주 尹世冑)의 유체를 모신 진기로예(晋冀鲁豫) 항일순국렬사릉원을 건설하였다. 렬사릉원은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石门村) 가까이에 자리잡았다. 렬사릉원의 묘비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창립시 선전부장이였던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해 10월 10일, 5월 반‘소탕’전에서 영용히 희생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부회장이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인 진광화,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석정 등 순난렬사의 추도대회를 장중히 가졌다. 팔로군총부, 중공중앙 북방국, 팔로군 129사,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와 각 군정, 민중 단체 대표 5,000여명이 추모대회에 참가하였다.

추도대회는 팔로군총부 등대원 부참모장의 사회하에 류백승, 등소평, 라서경, 변구정부 주석 양수봉 등 동지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한 무정과 정률성 등 조선의용군 전체 동지들도 추도회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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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화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주덕 총사령께서 이날 추도대회에 제자를 보내왔다. 라서경이 추도사를 드렸다. 그는 추도사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남김없이 보여준 조선동지들의 피는 이미 우리의 피와 함께 흘렀다”라고 하였다. 주덕, 엽검영 등 동지들은 여러번 글을 써서 항일의 싸움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을 추모하였다. 주덕은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니 그 생명 영원하리〉라는 추모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의 희생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연안 《해방일보》 1942년 9월 20일)

우리의 조선혁명동지 11명이 희생되였다. 그들은 중국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생전에 우리 화북군민과 동심협력하고 함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정신을 보여주었다…

자유를 위해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몸 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하여 계승 완수될 것이다.

이는 주덕 총사령이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섬감녕변구지회가 연안청년구락부에서 가진 재화(在华)조선순난렬사 진광화, 석정 등 11명 동지 추도식에 모처럼 참가하여 한 연설의 한부분이다. 엽검영도 〈희생된 조선의용군동지들을 추모하여〉란 추모글에서 조선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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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 10일에 창건된 이래 여러 싸움터로 이동하여 싸우면서 4년을 하루와 같이 항일민중을 조직하고 대 적군 선전사업을 벌렸다. 특히 호북의 통산과 곤산, 호남의 석산, 광서의 곤륜산 및 화북에서 벌어진 여러 전역과 반소탕전에서 이 군대의 동지들은 모두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며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정신으로 싸우고 사업함으로써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하고 억압과 노역을 당하고 있는 (일본군과 괴뢰군의) 병사, 농민, 조선거류민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팔로군, 신사군의 행동에 유력하게 배합하였다.

진광화-석정 렬사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진기로예항일순국렬사릉원은 풍수가 좋은 태항산의 웅장한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 구내에 자리잡았다. 2009년 8월 20일 오전에 섭현 현성 부근인 적암촌과 중원촌 현지답사를 마친 후 오후시간을 타서 택시로 석문촌으로 갔다. 진기로예순국렬사릉원은 석문촌에서 조금 떨어진 련화산 아래 높은 지대로 펼쳐진 펑퍼짐한 언덕우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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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원 묘소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택시는 조금 후 련화산 아래에 이르렀다. 처음 보이는 것이 이곳 언덕 아래 단층집을 이룬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이고 그 아래에 꽤나 되는 공지를 만들어 정차하기가 좋았다. 공지 오른쪽은 수림 속에 꼭대기에 오각별을 올린 좌권장군 기념탑과 좌권장군 원 묘소가 보였다. 좌권장군 묘소는 여러 계단을 이루며 나타나 필자에게는 하나의 땅크 모양으로 형상화되였다.

좌권장군 묘소 왼쪽 가장 높은 언덕우에 진광화와 석정 원 묘소가 떠올랐다. 좌권장군의 묘소보다는 많이 작은 편이지만 모두가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한 터에 묘소 설계는 하나의 풍경선을 이루었다. 왼쪽이 진광화렬사 묘소이고 오른쪽이 석정 묘소로 나란히 펼쳐진 속에 뒤쪽은 ‘중한우의림’으로 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단으로 옮겨지기 전 진광화-석정 첫 초장지였다.

진광화-석정 묘소에서 여러 계단을 이룬 돌계단을 따라 한참 내려가면 택시가 머무른 공지이고 그 공지에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이 꾸려져 크나큰 위안을 받았다. 기념관에는 조선의용군 활동 사진들과 더불어 추모대회에 참석한 등소평, 류백승 등 팔로군총부 주요지도자들의 사진이 유난히 인상적이였다. 이 사진은 등소평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좌권장군과 조선의용군 렬사 추모대회에 참석한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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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화산 아래 진광화, 섭정 묘소 구간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2017년 3월 18일 재정리

 

출처: http://kr.chinajilin.com.cn/cxz/content/2017-04/26/content_18624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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