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림(孔林)을 찾아

작성자: 더덜기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10-31 10:12:22    조회: 67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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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공림)

눈꽃이 날리는 어느 날 나는 공림(孔林, Konglin)을 찾았다. 일명 성림(聖林, Shenglin)으로 불리우는 이 공림은 산동(山東, Shandong) 곡부(曲阜, Qufu)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479년에 공자(孔子, Kongzi)가 세상을 뜨자 그 제자들은 공자를 산동 북쪽의 사수(泗水, Sishui)가에 안장했는데 그때부터 공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 뒤 공림은 약 2500여년동안 진한(秦漢, Qin Han)을 거쳐 당송(唐宋, Tang Song)을 지나 명청(明淸, Ming Qing)에 이르기까지 13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공림은 담 둘레 7.25km, 부지 2평방킬로미터로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이 풍부한 오랜 역사를 가진 묘지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눈덮힌 대지 창망한데 가장 가까운 곳 양쪽에 측백이 죽 늘어선 공림의 신도(神道)가 저 멀리로 뻗어 있어 진한의 무사, 당송의 장군들이 이 땅을 지켜선듯 하다.

엄동의 계절에 이 공림에 들어서서 한(漢, Han)묘군, 원(元, Yuan)묘군, 명(明, Ming)묘군을 마주하고 세상을 떠난 고인들을 그리며 웨치고 사색하고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세계를 감동시켰던 그 분과 어떻게 생명의 대화를 시작할것인가? 그 때의 그 느낌은 자신만이 알수 있는 것이다.
2500여년을 거치며 10만여명이 이 곳에 묻혔는데 그들이 생전에 위대했든 아니면 평범했든, 그들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나날을 거쳤든 명청 제사의 행사를 거쳤든, 생명의 종말은 똑 같이 안온하였다. 70여 세대에 걸친 자손들이 공자를 중심으로 20여세기동안에 같은 방식으로 한 곳에 모여 부지 2평방킬로미터의 땅에서 생과 사의 윤회를 보여주고 조화와 완정을 보여준다. 이는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것이다.

산길을 따라 동으로 가면 멀지 않은 곳에 많은 묘비 중 특별히 눈에 띄는 키 높은 비석 하나가 보이는데 "봉직대부(奉直大夫) 호부광동청리 (戶部廣東淸吏) 사원외랑(司員外郞) 동당선생지묘(東塘先生之墓)"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묘가 바로 청조의 이름난 연극인 공상임(孔尙任, Kongshangren)의 묘이다. 공상임이 일생의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도화선(桃花扇-복숭아꽃 부채)>은 세인들에게 남겨준 천고에 빛나는 작품이다. 공자의 후대 중 공상임은 뛰어난 인물로 공자를 떠나서 중국 문학사와 중국 연극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공림을 떠나 공상임이 그 어디에 묻히든 공림에 묻힌것과는 비하지 못할것이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그의 묘앞을 오가서 청조의 이름난 연극인은 영원히 고독과 적막을 모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건륭(乾隆, Qianlong)황제의 딸도 공림에 묻혀 내외에 이름이 자자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건륭황제의 딸은 얼굴에 검은 짐이 있는 이유로 팔자가 세서 명문가에 시집가야만 좋은 운명으로 될수 있다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건륭황제는 공자의 72대 후손인 공헌배(孔憲培, Kongxuanpei)를 사위로 정하였다. 하지만 "만족과 한족 통혼 불가능"의 청조계율에 의하여 건륭황제는 자신의 딸을 청조 대신 우민중(于敏中, Yuminzhong)의 의녀로 만든 뒤에 공자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높이 솟은 "우씨방(于氏坊)"은 도광(道光, Daoguang)황제가 고모를 위해 만든것이다.

나는 건륭황제 딸의 묘앞에 이르렀다. 이 묘의 주인이 정말로 건륭황제의 딸인지 아직 정설이 없고 그 진위도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위를 떠나서 이 묘는 공림에서 대표적인 묘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는 때로 이토록 재미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조합이라 해도 후에는 아주 중요하게 변해 후세인들이 수백년동안 그것을 음미하니 말이다. 당연하게 이런 조합은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건륭황제는 아주 총명하다. 그가 공자의 후손을 선택한것은 사실상 자신의 딸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기회를 준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그의 이 딸은 다른 공주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사라진지 오랠것이다.
내가 공묘앞에 이르렀을때는 아무도 없었다. 공자의 묘는 측백나무들속에 위치했는데 기나긴 통로가 밖으로 통해 있었다. 통로의 양쪽에는 표범 등 석상들이 있어 이 성인의 묘지를 묵묵히 지킨다. 흰 눈으로 덮힌 그 통로를 나는 감히 밟지 못했다. 내가 한 걸음만 걸어도 그 순결함과 그 평안함이 깨질것 같아서…자공(子貢, Zigong)이 묘를 지킬때 심은 나무도 벌써 죽고 그다지 높지 않은 나무가지가 앙상한 손으로 이 땅을 받치고 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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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자의 묘)

공자의 묘는 공림에서 특별히 높이 솟고 크다. 묘앞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원(元)조에 세운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明)조에 세운것이다. 동쪽에는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 Kongli)의 묘, 남쪽에는 공자의 손자 (孔及, Kongji)의 묘이다.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않은 듯한" 이런 묘의 구도는 가족의 따뜻함과 원만함을 잘 보여준다.

공자의 묘앞에 서면 2500년이 흐른뒤에도 사람들은 "자재선상왈 (子在川上曰)"의 그 신중함을 느끼고 주변 나라들을 돌며 "인자애인 (仁者愛人)"을 설명하는 것을 듣는듯 한다.

그래서 1988년 노벨수상자들은 빠리의 에펠탑, 바르세이유궁전과 빠리 성모원, 개선문 등 수많은 명승고적에서 로단과 발자크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동방의 공자를 생각하였다. 그들은 빠리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인류가 21세기에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2500년전으로 돌아가 공자에게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 선언은 높은 IQ를 가진 사람들이 인류에 준 충고이다. 우리들이 어떤 지혜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2500년전 공자가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다는것은 알고 있다.

겨울에 공림을 찾아 차갑고 조용한 공간에 들어서서 티없이 하얀 세계를 마주하는 그 때의 그 느낌은 아주 특별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느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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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림의 웅장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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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림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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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림의 비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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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림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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