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동만 토비숙청 하편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2-29 13:13:10    조회: 15회    댓글: 0

조선의용군이 연변에 도착함에 따라 연변지역의 조선족 경비부대는 병력과 조직력을 크게 보강하게 되였다. 일제가 버리고간 무기를 주어들고 복장도 변변치 못한 경비부대에는 총도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전사들이 많았고 그렇다할 전략전술도 없었다. 하지만 항일전쟁시기 중국관내에서 일정한 전투경험을 쌓고 공산당의 정치주장과 팔로군의 전략전술을 배운 연안과 태항산 의용군 전사들이 연변 경비부대의 련장, 지도원을 맡으면서 부대의 전투력이 강해졌다.

단순히 자기의 땅을 지키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들었던 조선족 청장년들은 태항산과 연안의 조선의용군 간부들로부터 공산당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팔로군의 전략전술을 알게 되였고 또 이들을 통해 보다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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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부대에 적극 참가하는 조선청년들(자료사진)

1946년초에 들어서서 토비숙청은 튼튼한 동만근거지를 창설하는 급선무로 나섰다. 화룡 송하평의 곽영춘 토비무리와 왕청 평강의 전보흥 토비무리를 제거한후 연변의 경비부대와 조선의용군은 두길로 나누어 왕청과 안도방향으로 진격했다.

삼도만 토비들을 소탕한후 1946년 2월에 조선의용군 15퇀, 16퇀은 왕청현 보안퇀과 합쳐 왕청대흥구의 토비들을 공격했다. 대흥구에는 원 일본특무였던 요옥령(姚玉龄)이 거느린 700여명 토비가 있었다. 아군이 맹렬한 포격으로 대흥구를 공격하자 토비들은 다투어 도주하였고 수백명이 포로되였다. 묘령(庙岭)에서 적아쌍방은 대치단계에 들어갔다. 토비두목 마희산(马喜山)과 리무경(李茂庆)이 지원군 600여명을 보내 반격했지만 우리부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토비들은 천교령(天桥岭)쪽으로 밀려나 포위되였다. 고립무원의 경지에 놓인 리무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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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령,천교령 토비숙청경과를 이야기하는 사학자 리송덕

이때 북만 목단강군구에서도 부대를 조직해 록도(鹿道), 춘양(春阳), 천교령, 묘령 방향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북만의 부대와 연변부대가 남북으로 마희산을 협공하는 태세가 이루어졌다. 1946년 2월에 북만의 목단강군구 원 산동 팔로군 전송지대(田松支队)와 녕안경비퇀(宁安警备团) 2000여명 장병들이 마희산의 토비소굴인 록도를 점령했다.

흑룡강성과 길림성이 린접한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록도는 동만과 북만을 이어주는 철도선이 지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자못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있다.

흑룡강의 사학자 서명훈 선생이 소개한데 의하면 토비 마희산을 숙청하는 전투에 많은 조선족 부대가 참가했다. 수녕군구 1퇀 2영이 전부 조선족청년으로 구성된 부대였고 목단강군구 경위퇀 2영도 조선족부대였다. 사도하자(四道河子)를 공격할때 수녕군구 1퇀 2영 1련 련장 박봉관(朴风官)을 비롯해 17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위퇀 2영은 연변의 조선족부대와 함께 로묘에서 10여시간의 격전을 거쳐 적을 전부 소멸했다.

아군은 로묘(老庙) 북산의 적 또치까를 제압한후 공격해 들어가 적과 치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두시간 남짓한 격전을 거쳐 토비 한개 대대를 소멸하고 퇀장이하 200여명을 포로했다.

남북으로 협공하던 북만과 동만부대는 천교령에서 회합했으며 토비 400여명을 격살하고 국민당 강북정진군(江北挺进军) 사령인 정운봉(郑云峰)을 비롯해 640명을 포로하고 600여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토비두목 마희산은 대세가 기울어지자 라자구로 도주했다. 이로써 동만과 북만간의 교통로가 열려 근거지건설에 유력한 담보를 제공하게 되였다.

묘령, 천교령일대에서 대패한 마희산은 200여명 부하를 끌고 왕청 라자구에 가서 그곳의 토비두목 안진유(安振有)와 합쳤고 훈춘의 토비까지 끌어들여 무려 천 5백여명에 달했다. 놈들은 부근 산을 차지하고 고지사이에 포병진지까지 구축해 놓았다.

연변의 토비숙청부대는 천교령에서 재편성을 거쳐 경비 1려 산하에 1퇀, 2퇀, 3퇀, 훈춘보안퇀, 포병퇀을 두었다. 조선의용군 16퇀으로 편성된 경비 1려 1퇀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돈화, 장춘방향으로 진군한외에 기타 부대는 라자구를 공격했다.

겨울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이여서 날씨는 자못 싸늘하였고 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 않고있었다. 토비숙청에 참가했던 로전사들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때 전사들은 군복도 변변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속옷도 없었다. 모두가 울로초로 만든 짚신을 신었기때문에 동상입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할때가 되면 눈을 녹여 익힌 보리밥을 그냥 옷자락으로 받아서 먹군 했다고한다.

라자구에 도착한 이 영웅적 부대는 강신태 사령원의 명령에 따라 경비부대 6련 련장 리섭이 6련과 7련의 주광문패를 거느리고 적의 포병진지를 제거할 임무를 맡았다. 리섭 련장은 유리한 고지에 중기관총을 걸어놓고 6련 1패와 주광문패를 거느리고 숲속에 은페된 적 포병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척탄통수도 련발사격을 가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적이 정신을 못 차릴때 선두에 선 주광문패가 돌진해 적 평사포를 로획했고 기타 부대도 우회하여 적을 추격하였다. 전투에서 아군은 말 여덟필이 끄는 야포 한문, 평사포 한문을 비롯해 여러가지 포와 중기관총을 로획하고 적 30여명을 격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날수없게 되자 적은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쪽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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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구의 조선족 농가

라자구 토비를 숙청한 다음 연변의 주력부대도 철수하고 왕청현 보안퇀과 연길보안퇀, 훈춘보안퇀이 왕청 경계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교활한 토비들은 아군이 경비를 늦춘 사이 재차 공격해 들어와 포로한 전사들과 80여명 조선족 군중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다. 분노한 경비부대는 4월과 5월에 드넓은 밀림을 헤치며 로흑산(老黑山)까지 추격해 토비두목 안진유를 격살함으로써 왕청토비숙청의 철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 와서 동만의 토비들은 대부분 제거되였다.

왕청에서의 토비숙청은 아주 간고하게 진행되였지만 동만 군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승리를 이룩할수있었다. 특히 녀성들의 기여가 컸다. 배초구 조선족 녀성 김순옥(金顺玉)은 마을 녀성들을 동원해 불을 때고 음식을 장만해 전사들을 위로했고 또 부상병들을 따뜻히 돌봐주었다. 묘령에서 싸울때 10여일 동안 장병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있었는데 이를 안 룡수촌 녀성들은 김기옥(金基玉)의 령솔하에 함지에 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밤도와 전선에 찾아가 전사들을 대접했다. 그들은 전사들이 쉽게 밥을 먹을수있도록 배추잎으로 밥주걱을 싸서 전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전투가 승리하자 그들은 또 떡함지를 메고 길가에서 만나는 전사들에게 떡을 쥐어주었다. 이 마을 김금옥(金今玉) 녀성은 우연하게 탄약 한상자를 발견했는데 이를 감추어두고 토비들의 위협공갈을 다 물리치고 끝내 조선의용군에게 넘겨주었다고한다. 라자구 토비를 숙청할때 춘양촌의 녀성책임자인 김해송은 마을 녀성들을 데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일쌀을 모아 방아에 찧어 맛있는 떡볶기를 만들어 이튿날 수백명 토비숙청 장병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인민의 열성적인 지원에 큰 감동은 받은 장병들은 더욱 힘을 내서 토비들을 숙청했다.

한편 연변의 경비부대는 안도, 돈화 방향에서도 토비숙청을 진행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 주력이 강신태 사령원의 인솔하에 왕청의 토비를 숙청할때 연변군분구 부사령원인 구회괴(邱会魁)는 조선족부대인 경비3퇀과 4퇀을 지휘해 안도에 있는 토비 선씨(单氏) 3형제를 공격했다. 선병준(单秉俊), 선병인(单秉仁), 선병의(单秉义) 3형제는 항일전쟁시기 일제에게 빌붙어 경찰대대 두목을 하던 자들로서 일제가 패망한후 토비들을 긁어모아 이른바 안도현 공안대대를 조직하였다. 천여명 병력을 가진 이들은 주로 이도백하(二道白河), 량강, 송강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고있었다.

아군은 우선 오도양차(五道阳岔), 오늘의 고동하(古洞河)의 적 한개 대대를 포위공격했다. 4퇀 박근식 퇀장은 전사들을 이끌고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화력으로 적을 제압했다. 궁지에 빠진 놈들은 아군의 남북협공을 받아 전부 소멸되였다. 이어 이 부대는 대전자(大甸子), 오늘의 만보(万宝)향에서 담판을 거쳐 필서문(毕书文)의 토비무리 800명의 투항을 받아냈다.

3월 16일에 경비 3퇀과 4퇀은 료남독립사의 협조를 받으면서 이도백하의 적을 공격하고 또 안도현성까지 점령함으로써 동만과 남만을 련결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토비들을 격살하고 선병준과 선병의를 포함한 350여명 토비를 포로하였다. 선병인은 200여명 졸개를 거느리고 화전, 길림일대로 도주했지만 길림시가 해방될때 포로되여 처형당했다.

1946년초, 연변지역의 각 부대번호는 비교적 혼잡했다. 작전수요에 따라 지방보안부대가 경비부대로 승격하고 여러 경비부대가 수차 집중재편성되면서 부대 번호가 자주 변하게 되였다. 특히 조선의용군이 들어오면서 거듭 재편성됨에 따라 부대번호가 더욱 자주 변했다. 동만의 토비숙청때로부터 근거지보위, 장춘-길림지역 전투때까지의 부대변화상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조선의용군 16퇀은 연길1퇀과 합쳐 삼도만 토비숙청을 진행한후 돈화부근에서 토비숙청을 하다가 장춘으로 들어가면서 길동경비부대 1려 1퇀으로 된다. 이 부대는 연변뿐만 아니라 길림성적으로 공산당이 장악한 비교적 유력한 전투부대였다. 조선의용군 15퇀은 안도 명월구에서 경비 3퇀과 합병해 길동경비 2려에 소속되였다가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승격된다. 이 부대 1영이 한족이고 2영과 3영 그리고 퇀직속부대는 모두가 조선족으로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17퇀은 훈춘에서 재편성을 거쳐 훈춘보퇀으로 되였다.

왕청과 안도의 토비무리를 숙청한후 연변을 중심으로한 동만근거지는 북만과 남만으로 이어져 더욱 확고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연변 각현 보안부대를 제외한 기타 조선족 부대는 돈화, 교하, 길림방향으로 밀고나가면서 팔로군에 배합해 계속 토비들을 숙청하였다.

흑룡강의 사학자 김우종 선생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연변의 조선족부대는 당시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한 부대였다. 연변의 당정사업을 책임졌던 옹문도는 회억록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우리는 부대건설에서 조선족 무장에 의지했기때문에 연변의 부대에는 무장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앞써 돈화현에 8개 무장대대가 있었는데 조선족 대대를 제외한 기타 7개 대대는 모두 전향했다.”

돈화에 남은 이 조선족 대대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지원을 받아 돈화의 토비두목 류화일을 생포한후 독자적인 돈화보안 독립대대로 되였다. 조선의용군으로부터 36명 간부를 지원받은 독립대대는 곧 길동군구 돈화 제4경비대대로 편성되여 산하에 4중대, 5중대, 6중대, 기포중대를 두었다. 독립대대 규모는 600명이고 대대장에 황봉록(黄风录), 정위에 김무(金武)였다. 그리고 4중대 중대장은 최봉준(崔风俊), 지도원은 오호연(吴浩然)이였으며 5중대 중대장은 박필수(朴必洙), 지도원 리일홍(李一红)이였고 6중대 중대장 리성진(李圣振), 지도원 홍순각(洪淳阁)이였으며 기포중대  지도원은 어해송(鱼海松)이였다.

국민당의 위임장을 받고 국민당쪽으로 전향한 돈화지역 기타 무장은 기대작(纪大作), 당옥(唐玉)을 두목으로하는 토비무리로 되였다.

1946년 양력설을 계기로 토비두목 당옥이 홍석라자(红石砬子)에 들어가 략탈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한 돈화 제4경비대대는 신속히 마을을 포위했다. 하늘에서는 흰눈이 펑펑 쏟아졌고 전사들은 흰천으로 위장하고 길목에 매복했다가 토비순라병 세놈을 붙잡았다. 놈에게서 적정을 알아낸 황봉록 대대장은 4중대와 기포중대로 정면을 공격하고 기타 부대는 우회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날 밝을 무렵 전투가 시작되였다. 이곳 토비들은 포수로 있던 자가 많아 사격술이 좋았다. 아군은 중기관총을 걸고 적의 화력을 압도했으며 박격포로 마을어귀 포루(炮楼)를 폭발시켰다. 그리자 전사들이 일제히 던진 수류탄 폭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질겁한 적은 머리를 들지 못했고 달려온 우리 전사들앞에 다투어 투항했다. 이번 홍석라자 공격전에서 300여명 적을 소멸했지만 토비 두목 당옥은 10여명 심복을 데리고 도주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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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덮힌 동만의 산과 물

돈화부근의 토비가 살벌했기때문에 1946년 2월에 관내에서 온 팔로군을 위주로 편성된 길동경비 2려가 려장 등극명(邓克明)의 인솔하에 토비숙청에 투입되였다. 이들은 대부분 관내에서 왔기 때문에 동북의 환경에 대해 잘 모르고있었다. 돈화경내 삼대산(三台山)부근에서 토비들은 아군 경비 2려 4퇀 1영을 포위공격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4퇀 1영 교도원 왕문빈(王文斌)을 비롯해 127명 아군 장병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후 3월 1일에 토비들은 또 안개가 많은 대황툰(大荒屯)에 매복했다가 경비 2려 5퇀을 포위공격했다. 치렬한 전투를 거쳐 5퇀은 대황툰을 점령하고 토비들을 숙청했지만 퇀장 강현여(江贤如)를 비롯해 136명 장병이 희생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경험을 총화한 경비 2려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쏘련군 땅크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토비를 사하연(沙河沿)쪽으로 몰아갔다.

홍석라자 전투를 마친 돈화의 조선족부대인 제4경비대대는 또 줘무태(柞木台)의 토비 류첩명(刘捷明)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일제의 밀정을 하던 류첩명은 백여명 토비를 이끌고 줘무태 부근에서 “왕”노릇을 하고있었다. 음력설이 다가오자 놈들은 부근의 마을을 략탈해 백성들이 기르는 새끼돼지까지 모조리 빼앗고도 성차지 않아 삼도황구(三道荒沟)쪽으로 나와 조선족마을의 입쌀과 황소를 략탈하려했다. 제4경비대대는 적 두목부터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6중대의 2소대를 삼도황구로 통하는 길목에 매복시키고 기타 부대로 줘무태를 정면공격했다.

2패 전사들은 눈을 파헤치고 삼각대형으로 길목에 매복해있었다. 눈속에 두시간정도 매복해 있으니 날이 밝기 시작했고 줘무태 산어구로부터 일본군복에 군도를 차고 서양말을 탄채 20여명 졸개를 거느리고 오는 토비두목이 나타났다. 그놈이 분명 류첩명이였다. 부대 명사수 최영준(崔永俊)이 류첩명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가 오형모(吴亨模) 반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격했다. 요란한 총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속에 류첩명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기타 토비들은 무릅을 꿇었다. 몇놈이 겨우 빠져 도주해 가보니 줘무태도 이미 4대대 기타 전사들이 점령한터라 할수없이 돌아와 총을 바쳤다. 이번 전투에서 돈화 경비 4대대 조선족장병들은 토비두목 류첩명을 비롯해 30명을 격살하고 150여명을 포로했다. 그리고 무기외에 로획한 량식과 말, 소는 다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1946년 3월말에 이르러 연변의 주요한 토비들은 대부분 제거되고 남은 토비 2천여명이 돈화부근의 사하연, 관지(官地), 황니허즈(黄泥河子) 등지에 집중되여있었다. 등극명 려장은 경비 2려 전부주력을 이끌고 돈화현 보안대와 쏘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토비들을 공격했다. 대포, 로케트포를 비롯한 중무기를 동원한 아군은 사하연, 관지, 흑산(黑山), 액목(额穆) 등지에서 토비를 전부 숙청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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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구 토비숙청 렬사기념비와 렬사명단

삼도만 토비숙청을 마친 조선의용군 제16퇀 6련 지도원 김응삼과 4련 련장 전룡화는 연길에서 병치료를 마치고 고향방문을 한뒤 왕청 배초구에서 부대에 복귀했다.

김응삼 로인의 소개에 의하면 경비 1려 1퇀은 왕청에서 토비숙청을 하고 명월구를 거쳐 돈화방향으로 진격했으며 돈화와 액목지구에서 비적들과 싸우다가 이듬해 4월에 장춘방향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이 부대 전사로 있었던 김병욱 로인은 돈화에서의 토비숙청은 아주 간고했지만 조선족 전사들은 드높은 열의로 가는곳마다 애민공작을 해서 인민들의 신뢰를 받았다고했다.

“부대는 가는 곳 마다 애민공작을 잘 했습니다. 마을에 가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5리밖에 가서 물을 길어다주군했습니다. 그리고 마당도 쓸어주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국민당이 다 달아나고 없으니 관지를 거쳐 액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싸우면서 토비숙청하느라 자꾸 돌아당겠지 뭡니까? 동고일대루, 장산령고개를 넘어가면 어딘가면 교하쪽입니다. 그래 거기서 토비숙청하다가 토비는 크게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무기를 많이 거두어들였습니다. 토비들이 감춰두었던 것들입니다. 그래 처음으로 나에게도 무기가 차례져서 어떻게 좋은지... 바지도 그런 바지를 언제 입어봤겠소? 미용저고리 다 집어치우고 덧저고리로 일본아들 수꾸노, 그걸 입으니 군대 같기도 하고 일본군대 같기도 하고 꼬쟁바지에 다가. 그런데 각반이라 있어야지, 신은 중국사람들 헝겊신 신고 거기서 있다가 또 행군했습니다. 황니하에서 교하쪽으로 진군해 들어가니 들어갈때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갔는데 그때까지는 태극기를 썼습니다.”

돈화인민들은 쌀을 보내고 돈을 보냈으며 부상병을 간호하고 위문공연을 하는것으로 토비숙청부대를 지지해주었다. 돈화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는 백성들을 동원해 수건, 양말, 치솔들을 모아 부대에 보냈으며 녀성동맹에서는 돈화영화관에서 부대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

많은 조선족 부대가 참가한 동만에서의 토비숙청은 승리를 거두었고 토비화근을 비교적 철저하게 제거했다. 그리하여 동만은 확고한 근거지로 되여 치렬한 장춘쟁탈전에 많은 병력을 파견할수있었고 사평에서 싸우는 공산당 주력부대의 튼튼한 뒷심이 될수있었다. 또한 전반 동북쟁탈전에서 동만은 줄곧 가장 유력한 후방의 하나로 될수있었다.

​출처: http://www.zoglo.net/blog/read/jinchenglong/29097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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