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빨찌산 - 황정해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8 10:30:39    조회: 264회    댓글: 0

황정해는 1918년 10월 17일에 길림성 훈춘시 양포향 연통라즈 서골의 한 조선족애국지사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황병길은 안중근과 함께 반일민족독립투쟁에 종사한 저명한 반일투사였으며 어머니 김숙평은 반일조직인 “한민회”산하의 부녀회 회장으로 활약하였었다. 어릴 때 선후하여 량친부모를 잃은 정해는 누나들의 보살핌속에서 동년을 보냈다.

1931년 가을, 중공 훈춘현위의 책임자 김규봉의 지도밑에서 서골에 당지부가 건립되여 반일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때 13살밖에 안되는 정해는 아동단 단장을 맡고 당조직의 구체적지도밑에서 아동단원들을 이끌고 보초를 서고 백여리 산길을 넘나들며 통신련락을 하였으며 또 훈춘거리에 들어가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어느날 당책임자 김규봉이 정해와 광춘에게 마안산밀영에 있는 현위서기 서광에게 편지를 전할 임무를 맡겼다. 임무를 맡은 그들이 사금구산마루에 이르렀을 때였다. “토벌대”를 가득 실은 트럭 한대가 훈춘에서 빠져나와 서골방향으로 달리고있었다. 정해는 조금도 서슴없이 광춘이한테 편지임무를 맡기고 자기는 지름길로 서골에 달려가 소식을 알렸다. 정보를 받은 유격대원들은 인차 매복권을 쳤다. 결국 가만히 서골을 토벌하려던 놈들은 여러 개의 주검만 남기고 뿔뿔이 도망치고말았다. 유격대원들은 보총 7자루와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
1933년 봄, 공청단조직에 가입한 정해는 아동단지도사업을 맡고 열심히 사업하였다. 미구에 정해는 중공훈춘형위 통신원, 동만특위 통신원 사업을 맡고 무시무시한 백색테로속에서 고생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차례나 중요한 통신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1934년 5월, 정해는 한 아동단원과 함께 3일간이나 산길을 더듬어가며 현위의 긴급문건을 동만특위에 전하고 답서를 갖고 귀로에 올랐다. 이제 홍기하를 건너 리수구에만 들어서면 유격구에 이르게 되였다. 그때 유격구와 린접한 로룡구일대는 왜놈들의 경비가 매우 삼엄하였다. 정해는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같이 간 아동단원에게 편지를 맡기고 자기 혼자서 홍기하를 건너 적정을 살피기로 하였다.
정해가 강을 건너 제방뚝에 올라서자마자 총을 든 왜놈들이 빈집에서 뛰쳐나왔다. 정해는 어쩔 사이도 없이 놈들에게 붙잡혀 마적달수비대로 끌려갔다. 정해는 놈들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나들이가는 길이라고 딱 잡아뗐다. 놈들은 정해를 춘화에 있는 헌병대에 넘겼다. 정해의 입에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해 놓아주려던 헌병대 대장놈은 정해가 령리한데다가 일본말도 잘하는 것을 보고 신변에 남겨두고 심부름을 시키기로 했다.
정해는 놈들의 소굴에 있는수밖에 없었다. 그는 헌병대장놈의 침실을 청소하고 구두를 닦고 세수물을 떠다주고 지어 놈의 발까지 씻어주는 등 자질구레한 일까지 해야 했다. 정해는 대장놈을 단번에 요정내고싶었지만 꾹 참고 굽석굽석 시중을 잘 들어 대장놈의 신임을 얻기에 애썼다.
헌병대장놈은 정해에게 속히워 술,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데로부터 지어 권총 닦는 일까지 시켰다. 이렇게 놈들의 소굴에서 두달이란 시간을 보내던 정해는 드디여 탈출기회를 얻게 되였다.
추석달이였다. 헌병대장놈은 푸짐한 연회를 차리고 부하들을 청했다. 권커니작커니하면서 실컷 처마셔대던 대장놈은 녹초가 되였다. 정해는 대장놈을 침실에 부축해다 눕혔다. 밤 11시가 되였지만 다른 놈들은 계속하여 마셔댔다. 정해는 대장놈의 물심부름을 하는것처럼 꾸며가지고 연회석을 드나들면서 주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12시가 거의 돼서야 놈들은 흩어졌다.
정해는 대장놈이 깰가봐 조심조심 이불을 덮어주면서 놈의 몸을 뒤져봤다. 권총이 허리에 찬채로 있었다. 정해는 총을 살짝 빼내여 허리총에 감춘후 살그머니 침실에서 나와 밖으로 문을 잠갔다. 정해는 조심조심 담장을 뛰여넘어 미리 감추어두었던 음식을 찾아 허리춤에 매고 산으로 내달렸다. 정해는 7주야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끝내 리수구유격구에 이르렀다. 유격구에서는 환영대회를 열고 정해의 용감성과 기민성을 찬양하면서 그를 따라배울것을 호소했다. 며칠후 정해는 동북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오랫동안 품어오던 소원을 풀었다.
어느 한번 부대가 묘령에 주둔한 위군영을 치게 되였다. 정찰임무를 맡은 정해는 일자리를 찾는 일군처럼 변장하고 위군주둔지에 들어가서 적들의 장비와 병력을 낱낱이 정찰해가지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 습격전이 벌어지자 정해는 한개 소분대를 거느리고 곧추 위군 영장의 침실로 달려갔다. 침실문앞에 이른 소분대는 순시하러 나오는 영장놈을 포로하고 권총을 빼앗아냈다. 이리하여 소분대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적군을 몽땅 사로잡고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정, 경기관총 3정, 보총 100여자루와 많은 탄약을 로획하였다.
1937년 여름, 정해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항일련군 제2군 교도퇀 2련 기관총패 패장으로 되였다.
어느 한번 정해는 기관총패를 거느리고 하루밤사이에 백여리를 강행군하여 위만경찰대를 들이치고 귀로에 올았다. 그런데 도중에서 백여명의 적군을 실은 트럭 몇대와 마주쳐 창졸간에 조우전이 벌어졌다. 우세한 병력으로 소분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망상한 놈들은 산마루를 먼저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먼저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정해는 가파로운 비탈을 죽기내기로 톺아올았다. 그가 산마루에 올아보니 놈들도 한창 고지를 바라오르느라고 야단이였다. 정해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기관총을 바위우에 걸어놓고 맹사격을 퍼부어 무리죽음을 안겼다. 놈들은 우세한 병력을 턱대고 거듭 반격해왔다. 전투는 밤늦도록 지속되였다. 날이 희붐히 밝아올 때 소분대는 놈들의 마지막공격을 격퇴시키고 무사히 부대로 돌아왔다.
1940년 가을, 항일련군 대부대가 전이하게 되였는데 제1로군 정위 위증민이 부상을 입은데다가 심장병까지 도져서 대부대와 함께 떠날수 없게 되였다. 사령부에서는 정해에게 전사 10여명을 거느리고 위증민을 고동하 상류에 있는 서북차밀영에 호송해가서 병치료를 하는 한편 경위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기나긴 겨울철에 심산속의 밀영에서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것은 엄중한 식량난이였다.
놈들은 산으로 통하는 길목을 엄밀히 봉쇄하는것으로써 항일련군전사들을 산속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여 식량을 조금 얻자 해도 몇십리나 되는 눈속을 헤매야 했다. 정해와 전사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으면서 식량을 아껴 위증민을 대접하였다. 허나 위증민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였다.
어느 하루, 정해와 호섭, 문익 셋이서 위증민의 경위를 서고 다른 전사들은 모두 식량 구하러 갔다. 저녁무렵에 부근 산마루에서 별안간 총소리가 울였다. 보초서던 문익이가 긴급정황을 알이는 신호였다. 정해는 즉시 위증민을 업고 귀틀집에서 나와 뒤산으로 달리고 호섭이와 문익이가 뒤에서 엄호했다.
놈들은 귀틀집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소리쳤다. 놈들은 한참 총질한후 귀틀집에 기여들었다. 집안은 텅텅 비였다. 놈들은 눈우에 난 발자국을 따라 정해네를 쫓아왔다. 정해는 위증민을 업었기에 빨리 달릴수 없었다.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단축되였다. 총알이 귀전을 휙- 획- 스쳐지났다. 산굽이를 돌아선 정해는 위증민을 등에서 내려놓았다.
“호섭이, 어서 정위동지를 업고 산줄기를 타고 철거하오. 나와 문익이가 남아서 엄호하겠소. 집합지점은 옛곳이요. 빨리 떠나오!”
“패장동지,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안되오. 어서 명령을 집행하오.”
호섭이는 정해의 엄숙한 기색을 보자 두말없이 위증민을 업고 산줄기를 따라 철거했다.
정해와 문익이는 바위뒤에 엄페하여 산아래를 응시했다. 수십명의 적들이 산으로 기여오르면서 헛총질을 해댔다.
“문익이, 침착해야 하오. 내 명령이 없이 절대 총을 쏘지 못하오.”
적들이 30여메터 되는 곳까지 다가왔다.
“쐇!”
순간 문익이의 기관총과 정해의 두 목갑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뜻밖의 맹렬한 사격에 10여명의 적들이 나동그라졌다. 나머지 적들은 누우에 엎드려 머리도 쳐들지 못했다.
“1패는 오른쪽으로, 2패는 왼쪽으로, 돌격!”
정해의 높은 소리에 놈들은 항일련군의 매복권에 들지 않았나 하여 반격할념도 못하고 주검들을 내버린채 황급히 도망쳤다. 정해와 문익이는 이튿날 아침에야 고동하기슭의 집합지점에서 위증민과 호섭이를 만났다. 식량 구하러 갔던 전사들도 모두 집합지점에 돌아왔다. 정해의 보고를 들은 위증민은 용감하고 슬기롭다면서 연신 칭찬하였다.
1941년 봄, 화전현 쟈피구밀영에서 겨울을 보낸 그들은 또 식량난에 들어 며칠째나 쌀알구경을 못했다. 4월 7일 아침, 정해는 낯이 퉁퉁 부은 전사들을 차마 볼수 없어 한 전사를 데리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디디며 먹을것을 구하러 떠났다. 그런데 이 길이 마지막길일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전우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보니 정해는 피못에 쓰러져있었는데 그 옆에는 엄청나게 큰 곰 한마리가 뻐드러져있었다.
“황패장… 황패장…!”
전사들은 정해를 끌어안고 목놓아 소리쳤지만 정해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3살의 어린 나이때부터 가렬처절한 항일투쟁의 포화속에 뛰여든 소년빨찌산 황정해는 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영용히 박투하였으며 나중에는 23살의 아까운 청춘까지 서슴없이 바쳤다. 소년빨찌산 황정해의 영웅사적은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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