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문예수집가 정길운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26:12    조회: 75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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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조선족문예사업의 개척자 정길운(郑吉云,1919-1991년)은 1919년 5월 조선 충청북도 영동구에서 태여났다.
  그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에 서울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도꾜에 가서 토목과를 다니다가 리공과에 흥취가 그다지 없어 다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43년에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쏘련류학을 바라고 한동안 로씨야어를 자습하던중 당시 강소성 회음현에서 장사를 하던 이모사촌형의 주선으로 중국에 건너와 동방 고대철학을 학습하게 되였다. 그 이듬해, 20대의 열혈청년이였던 그는 탄원하여 신사군에 가입하여 항전에 떨쳐나섰고 항일전쟁이 승리한후에는 또 중국인민해방군 모 련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여 동북일대에서 국민당반동파와 영용하게 싸웠으며 뒤이어 조선전쟁시기에는 공군신문사 편집부장의 직무를 담임하였다.

  50년대초에 연변에 온 정길운선생은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의 창립과 더불어 제1대 상무부주석,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 《연변문예》 주필 등 직무를 맡았다. 그후 그는 중국민간문예가협회 상무리사, 중국민속학회 리사, 중국민간문예가협회 길림분회 부주석, 길림성 민속학회 부리사장,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민속학회 리사장 등 사회직무를 맡고 연변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민간문예사업을 개척하고 줄기차게 밀고나갔다.

  정길운선생은 수십년간 작가들을 이끌고 민간문예수집정리에 피타는 노력을 몰부어 《민간문학자료집》 1, 2, 3, 4권을 륙속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민간음악집》 3권을 심열, 출판하였다. 그리고 저서로는 《조선족민속》(혼상제편), 민간이야기집 《백일홍》 등 여러권이 있고 장편소설과 중편소설도 발표하였다,
정길운선생은 로인독보조나 양로원에도 자주 찾아가서는 민간이야기를 수집하였는데 로인들은 그가 온다고 하면 버선발로 마중나가서는 《정선생님 오셨습니까?》 하고 친인을 맞듯 반가이 맞이하였고 구들에 엎드려 절을 올리군 했으며 그럴때마다 그도 《그간 별고없으셨습니까?》 하고 인사말을 하면서 맞절을 올리군 하였다.
정길운선생은 지식인의 틀과 항일간부의 틀을 조금도 차리지 않았으며 특히 구변이 좋아 신분이 낮은 시골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잘 어울렸다. 편벽한 산골에 가서 강냉이와 감자로 끼니를 에우면서 로인들과 무릎을 맞대고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군 하기도 하였다.

  정길운선생은 이렇게 민간문예수집을 다니면서 시골에 파묻혀 해빛을 보지 못하는 문학도들도 제때에 발견하고 부추기여 문단의 중견으로 키워내였다. 지금 문단에서 활약하는 적지않은 민간문예가들은 거개가 정길운선생의 지도를 받았을뿐만아니라 이름있는 시인, 소설가들도 그의 따뜻하고 친절한 보살핌을 받았다.
1962년 봄의 어느날, 정길운선생이 어느 시골에 있는 같은 성씨인 친한 한 로인네 집에 갔다가 문학에 흥취를 갖고 시쓰기에 전념한다는 한 젊은이를 만났었다.
《문학을 애호한다지? 어디 작품이 있거든 보기요.》

  옆에서 송구스러워 어쩔줄을 모르고있던 젊은이는 정길운선생님이 소탈하게 나오자 제꺽 구겨쥐고있던 자작시집을 펼쳐올렸다. 정길운선생은 그 자리에서 시 몇수를 훑어보고나서 《젊은이는 시공부에 흥미를 두었구만. 좋소, 나는 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요. 그러니 이 시를 이대로 갖고 가서 김례삼선생더러 봐달라고 하겠소.》 하고 약속하였다.
기실 정길운선생은 동년시절에는 미래의 시인이 되려는 문학적지향도 가져보았고 일찍 고향 영동군의 여동소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그가 지은 교가가 전교 교가모집에서 일등으로 당선되여 천여명학생들속에서 널리 불려졌으며 가렬처절한 혁명전쟁년대에는 사선을 넘나들며 원쑤들과 싸우면서 수십편의 시와 노래를 지어 전사들을 고무하였다. 1947년에 그가 지은 혁명가곡 《송화강 칠백리》는 당시 동북민주련군 길동군구의 조선족전사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그후에도 시와 노래에 애착을 가졌지만 운명은 그에게 민간문학을 선택하게 하였다.

  정길운선생은 시에 대해서 일정한 소양을 갖고있으면서도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기에 이렇다저렇다 평가하는것은 과분하다고 생각되여 젊은이의 자작시들을 김례삼선생한테 맡기였던것이다.
정길운선생의 겸손하고 가식없는 거동을 본 젊은이는 어느사이에 그이와 구김없는 사이가 되였다.  
정길운선생은 마을을 떠나오면서 젊은이에게 《너한테는 말이야, 우세가 있지 않나? 풍토좋고 인품좋은 이런 고장에서 문학공부를 하니 꼭 성공할거야. 나도 고향삼아 자주 놀러 올터이니 고심히 써보라구.》라고 부드러운 남도말씨로 고무격려해 주었다.
그것은 문학의 지름길을 찾으려고 애면글면 고군분투하던 젊은이에게 양지쪽문을 열어주어 일목료연한 희망의 지평선을 바라보게 하는 봄날의 성스러운 종소리와 같았다.

  과연 열흘쯤 지나서 정길운선생은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김례삼선생이 시를 읽어보고 향토맛이 다분한데 겉등치기를 하지 말고 요령있게 인간의 감정을 그려내라는 부탁이더라는 내용과 기회를 보아 연길로 한번 왔다가라는 기별이였다.
젊은이는 자기와 같은 하찮은 농촌청년에게 이와같이 분에 넘치게 상대해주는 정길운선생의 사랑에 감격되여 더 열심히 문학공부를 하였다.

  젊은이는 정길운선생이 로인들을 모시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캐는 《옛말내기》를 하는데 끼여서 조용히 문학의 꽃씨를 가슴에 묻었다. 하여 젊은이의 글은 활자화되여 정길운선생이 편집한 《연변민간문학자료집》(제1집)에 까지 오르게 되였다. 젊은이는 원래 민간문학에 흥취가 없고 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중인만큼 그닥 열정이 없었다. 정길운선생은 젊은이의 이런 의도를 아끼고 존중하여 억지로 잡아끌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글을 다루는 련습을 하는 셈치고 동네로인들을 찾아 옛말로 드문드문 수집해보라고 부탁하였다.
그후 정길운선생은 젊은이에게 문단의 많은 우수한 시인들을 소개하여 그들의 지도와 방조를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얼마 안가서 연변시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였다.

  정길운선생은 민간문예수집을 위해 연변의 각지역 나아가서는 동북3성과 관내에까지 발자국을 남기면서 우리민족의 많은 민간예인들도 발견하고 부추기여 그들한테서 민간문학의 보귀한 유산을 발굴하였다.  
그는 민간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언제나 소학생으로 치부하고 이야기구술자를 단순한 이야기군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선생으로 존경하였다. 그러면서 수집과정에 나오는 기이한 사물, 사건, 용어의 함의에 대해서도 《이럴것이다.》는 자기의 추측이거나 옅은 지식으로 대충 넘기는것이 아니라 엄밀한 과학적고증이 될 때까지 이면에 지식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묻기도 하고 열심히 자료도 수집하였다.
정길운선생이 민담 《유벙어리》에 나오는 《가래토시중》의 함의를 해명하기 위해 8년간이라는 오랜시일을 고증해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구전문학일군들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민담은 임진왜란시기 조선인민의 반침략투쟁을 배경으로 숨은 기인인 유벙어리란 애국자의 형상을 전기적수법으로 생동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유씨는 중년에 벙어리가 되였다가 가래토시증이 오는걸 알고 하루아침에 다시 말을 할수있게 되여 그 중놈을 만나보고 고명한 도술로써 그를 온종일 물바다에 떠있게 하였더니 중이 마침내 무릎꿇고 항복하였다 하여 그중에 대한 징벌로 가벼운 겨릅대세대를 가져다 종아리를 슬쩍 세번 친것이 고질이 되여 그 중이 돌아가 9년동안이나 앓았다고 한다.

  정길운선생은 1955년에 훈춘에서 처음 《가래토시중》이란 말을 듣고 그 뜻을 해명하기 위해 그후 8년동안이나 고증하고 연구하였으나 줄곧 명확한 답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1963년에 룡정현 동불향 영승촌에 사는 정한영로인한테서 그 소원을 이룩하였다. 한학지식이 풍부한 그 로인의 해석에 의하면 가래토시란 산에서 나는 나무열매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일본 대마도의 별칭으로서 가래토시중은 곧 일본중이라는 뜻이니 그 중이 다름아닌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清正) 즉 후날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다가 패배당한 그 일본침략자의 괴수라고 한다.

  정길운선생은 이렇게 모르는것을 대충 넘기지 않고 끝까지 하기에 애썼으며 다른 사람들이 물음을 제기하여와도 모르는것은 겸손하게 모른다고 대답하지 아는체하거나 어지간하게 알고있는것을 해석해주고 명답인것처럼 하지 않았다.
어느 한번은 외지에 있는 한 문학도가 정길운선생에게 이런 물음을 제기하였다.
《선생님, 이름, 자, 호의 구별과 그의 사용법은 어떠합니까?》
《너 참 귀신같구나. 내가 잘 모르는성을 내놓으니.》
《잘 모르신다는것은 그래도 알고는 계신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것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정길운선생은 이름, 장, 호의 정의와 그 사용법에 대해서 아는대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선생님, 저는 이것으로도 대단히 만족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건 안돼. 지식에는 약간의 에누리가 있어도 안되는 법이야. 내가 대강 아는것으로 이야기한것을 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대충 설명한다면 나중에 가서는 무엇이 되겠니? 며칠후에 내 상세히 알려주지.》
《선새님, 저는 래일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편지로 알려주면 되지 않니?》
과연 한달도 못되여 정길운선생은 그 문학도에게 자기의 저작과 함께 이름, 자, 호의 구별을 자상히 적은 편지를 보내주었다.
정길운선생은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에서도 그의 재능과 권위가 인정되는 학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허심히 배우려 하였고 자료도 확인하여 과학성을 부여하고저 하였다.

정길운선생의 이와 같은 훌륭한 학풍은 그로 하여금 조선족민간문예연구사업에서 권위자로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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