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그가 력사의 현장에서 만난 슈퍼인물들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2-28 11:15:14    조회: 23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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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은 장개석과 그의 측근실세들인 하응흠(何应钦), 장군(张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특무두목 대립(戴笠), 주은래와 곽말약(郭沫若), 팽덕회와 라서경(罗瑞卿), 김원봉과 김구, 유자명과 석정, 김두봉과 최창익, 박헌영과 여운형, 김일성과 최용건, 무정, 허가이 그리고 어린시절의 김정일, 최승희와 문예봉, 모택동과 정령, 애청, 하기방, 애사기… 이러한 슈퍼력사인물들을 력사의 진행현장에서 만났고 교감했다.

윤한윤(尹汉胤,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처 처장)의 평가:

"김학철선생은 독립적인 사고방식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위대한 작가이다. 김학철선생처럼 사회의 독립계층으로 명석한 두뇌를 갖고 사회발전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투시하는 작가는 너무 적다. 자기의 결함을 알고 자기절로 비판할수 있는 민족만이 강한 민족이다. 조선족이 김학철선생과 같은 작가를 갖고있다는 자체가 민족의 강대함을 표시한다."


김학철은 그가 직접 만난 정치인중 팽덕회를 가장 존경했다. 팽덕회가 태항산 동욕(桐峪)에 함께 주둔하고있는 조선의용대을 찾을 때는 통신병 한 사람만 데리고 온다. 다른 장령들처럼 부하장교들을 여럿 거느리고 위풍을 과시하지 않았다. 소탈한 담화와 연설은 고향을 천리밖에 등지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부모형제들의 해방을 위해, 장총들고 전장터에 뛰어든 우리 나젊은 전사들에게 따뜻함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하기에 김학철은 30년 후, 당내에서 사심없이 옳은 말을 감히 수령께 진언하고 반당분자로 외롭게 따돌림을 당한 팽덕회를 위하여 정치소설 《20세기 신화》를 쓰고 역시 그 대가로 문화대혁명의 옹근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학철은 철응(铁凝, 중국작가협회주석)의 말대로 한손에 필을, 한손에 총을 든 작가로써 민족감정과 용기 그리고 관건적시각에 정의를 수호하려는 립장과 정감으로 현시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김학철은 그의 조선, 중국, 일본, 한국을 거친 파란만장한 혁명려정으로써 그 누구도 다시 모방할수 없는 인생드라마를 엮어 내려갔다.

장개석과 그의 측근실세들인 하응흠(何应钦), 장군(张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특무두목 대립(戴笠), 주은래와 곽말약(郭沫若), 팽덕회와 라서경(罗瑞卿), 김원봉과 김구, 유자명과 석정, 김두봉과 최창익, 박헌영과 여운형, 김일성과 최용건, 무정, 허가이 그리고 어린시절의 김정일, 최승희와 문예봉, 모택동과 정령, 애청, 하기방 애사기… 이러한 슈퍼력사인물들을 김학철은 력사의 진행현장에서 만났고 교감했다. 그러나 평생을 후회하는 유감도 있다. 상해 로신의 집앞까지 찾아갔다가 용기부족으로 도저히 노크하지 못하고 되돌아와 그 해에 돌아가신 로신선생을 영원히 만나보지 못하였다.

1930년대 상해지하활동으로 혁명의 첫 발자국을 내디딘 김학철은 유자명, 석정의 무정부주의 반일테러사상으로 무장했다. 목적은 일본제국을 뒤엎은 왕정복구이다. 유자명은 학자형으로 누구도 그가 파금과 함께 중국무정부주의 괴수라고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자상하고 론리적이다. 수십년이 지난 훗날 호남농학원에서 농업과학을 연구하는 유자명과 편지거래를 할 때는 상해시절이 안개처럼 되돌아 보일 뿐이였다.

김학철이 로신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34년 봄, 문예잡지《개조》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몇해후 상해에서 낮에는 거리가 복잡한 틈을 타서 브라우닝(布朗宁)권총으로 일본인과 반역자에 대해 테러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점잖게 책읽기를 하였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로신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1936년 여름, 로신의 문장에 매료되여 그의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도저히 문을 두드릴 엄두가 나지 않아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퇴각령을 놓았다. 후에 로신이 자주 다니는 우찌야마서점에서 로신을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헌데 어찌 알았으리오, 그토록 숭배하던 로신이 그해 10월의 어느 날 영원이 동지들과 숭배자(김학철을 포함)를 두고 떠날 줄이야. 이것이 김학철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당시 남경 화로강(花露岗)은 반일지하활동의 아지트였다. 문정일, 정률성, 최채, 등이 그시기 화로강 동지이다. 문정일은 김학철과 황포동창생으로 중국공산당에도 함께 입당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가는 인연이 있다. 김학철 등 조선의용대가 장개석을 등지고 황하를 넘어 팔로군구역으로 올 때 문정일이 극적으로 나타나 도강증을 타내 위기를 모면하여주었고 짚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올 때도 신기하게 나타나 거처를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문화혁명 10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왔을 때도 문정일이 나서 호요방(胡耀邦)과 토의해 복권(平反)되였다.


1937년 중국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로의 진학은 장개석과 그의 측근들을 만날 기회를 주었다. 당시 학교의 교장이 바로 장개석이였다. 장개석은 황포졸업생이 아니면 군정(军政)을 막론하고 승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장개석 국민당정권의 기석(基石)이 바로 이 학교이다. 하기에 장개석은 황포 졸업생들에게 스승으로 친절했고 모든 혜택과 특권을 부여했다.

장개석은 학원들께 연설할 때 몹시 말을 더듬었다. "에…말하자면…"(这个 这个---)하며 청중을 지루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측근들을 훈계할 때는 청산류수이다. 사이사이 토마냥 끼워지는 "냥시피"란 욕설만 아니면 아주 잘 째인 론설이였다. 땀을 뻘뻘 흘리는 측근들에게 실컷 욕설을 퍼붓고 되돌아 보낼 때는 벽돌 한장씩 안겨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벽돌이 금으로 만들어졌다는것이다. 그의 통치수단이다.

하응흠, 장군, 그리고 특무두목 대립도 그시기 군관학교에서 만났다.

그런데 당시 군관학교내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진행되였다. 즉 교관 김두봉(金枓奉)과 한빈(韩斌)이 국민당골간을 배출하는 핵심기지에서 공공연히 맑스주의를 강의한것이다. 김두봉선생은 보기에 옛 서당의 선생처럼 점잖고 인자하다. 하지만 강의에서는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선진적이며 민족의 현실적 문제와 잘 결합하였다. 김두봉선생은 로씨아 10월혁명이 일어나는 해 서울 보성고에 시간강사로 다녔고 훗날 김학철과 조정래 등이 그 학교에 진학하였다. 평양에서도 가까이 지냈고 김학철결혼식에 와서 은수저를 선사하기도 했는데 김학철부부는 오래동안 소중이 보관하였다. 북조선로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등 직을 력임하였다.

한빈은 1920년대 초반에 벌써 중국동북지역에서 맑스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활약하고 룡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지부를 결성했다.

1930년대 조공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여 6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써 철저한 맑스주의자로 양성한 김학철 등 100여명 졸업생들로 창건한 조선의용대와 함께 태항산 팔로군 항일근거지로 갔으며 일생을 공산주의운동에 이바지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한구(汉口)에서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 100여명으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사실은 전체가 국민당 장교들이였다. 즉 군관단이다. 장개석으로 말하면 조선이 독립하면 이들로써 조선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 창립의식에는 당시 무한에 함께 체류중인 주은래와 곽말약이 중공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주은래는 황포에서 특별한 인기가 있었다. 미남인 그의 연설은 활기차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현실적인 정치인이고 천재적인 외교가였다. 그는 많은 관심을 두고 조선인 항일세력을 지켜보았으며 그들이 리념과 파벌로 단합하지 못하는데 대해 개탄하였다.

곽말약은 남경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을 책임지고있었다. 곽말약의 박식과 문필에 김학철은 평생 오체투지(五体投地)할 정도로 탐복하지만 그의 말기 인격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판했다. 곽말약이 홍파곡(洪波曲)에서 묘사한 무한 함락시 조선의용대에 관한 감격적인 묘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있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은 일찍 길림에서 항일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1919년에 조직한 의렬단은 중국과 조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있다. 1920~30년대 중국, 조선, 일본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반일테러사건들의 배후에는 대부분 의열단이 있었다. 그는 1926년 제4기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했다. 김원봉의 예리한 눈빛, 멋진 연설, 그는 선천적인 혁명가요 정치가로써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김학철은 그에게 매료되였고 그가 추진하는 혁명사업에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 고된, 고향과 가족을 멀리한 전쟁마당에서 힘으로 되였다. 그가 1938년 무한에서 창건한 조선의용대는 우리 민족의 첫 정규화된 항일군대이다.

조선의용대에서 최창익의 사상리론적 지도력은 석정과 맞먹는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생으로서 일본에서 맑스주의자가 되였고 맑스주의에 조예가 깊었다. 1925년 중국 동북에서 김좌진과 함께 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국제공산당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8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8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1936년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동참하여 함께 활동하였고 후날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태항산으로 북상, 김두봉, 무정(武亭) 등과 합세하였다.

석정은 상해지하활동시기부터 김학철의 직접적인 지도자였다. 3.1운동때부터 반일운동의 선두에 서있었고 길림에서 김원봉과 함께 의렬단을 조직했다. 역시 반일테러활동으로 7년간 옥살이를 하고 줄곧 김원봉의 한팔이 되여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다. 애석하게도 1942년 5월 태항산전투에서 영용히 전사하였다.

김구는 김구대로 매력이 있었다. 깊은 학식에 어버이다운 자애로움, 혁명모식(模式)은 달라도 항일의 목적은 같았다. 김학철은 김구한테 심부름을 갔다가 그의 격려와 소비돈을 받았다. 그때 김학철로 말하면 격려의 말씀보다 소비돈이 더 좋았다. 소비돈이 적다고 구두쇠령감이라 놀림들을 하였지만 인간적으로 그를 존경했다. 광복후 고국에서 그가 받은 서러움과 비운은 김학철을 가슴 아프게 했다. 김구선생은 영원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김학철은 재삼 이야기하였다.

일본감옥에서 풀려 나온 김학철은 감옥 옥우(狱友) 송지영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그는 공산당원으로 좌익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서울 종로에 있는 YMCA청년회관 (그 건물은 지금도 예전대로 보존되여 있다)에서 박헌영과 충돌했다. 박헌영은 당시 조선의 해방을 완전 외세에 의한것이라고 대회에서 연설하였는데 김학철은 그에 반발하여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을 지적했다. 쌍지팽이를 짚고 퇴장하는 그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김학철은 일본감옥 옥우이자 훗날 KBS사장으로 활약한 송지영의 소개로 소설가 리무영을 알게 되였고 그는 김학철의 문학계몽스승으로 되였다. 서울에서의 창작활동은 좌익작가들의 호응을 받았다. 우정을 나눈 중견작가들로는 리태준, 조벽암, 김남천, 리원조, 안희남 등이 있다. 김학철작품합평회에서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볼품없이 주위가 부식되였지만 보귀한 력사유물로 남았다.

정률성, 최승희, 문예봉, 황철 등과는 평양에서 절친한 사이였다. 정률성은 중국, 조선 두나라 군가를 작곡한 유명작곡가로 조선의용대 시기부터 전우로 북경에도 함께 체류하고 평양에서도 이웃으로 정률성부부와 한집안처럼 지냈다. 부인 정설송은 답답한 일이 있으면 김학철을 찾아 하소연하였고 중국에 돌아와서도 연락이 끊기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 파견된 중국의 첫 녀대사로 되였다. 정률성과 김학철은 함께 대형합창곡《동해어부》을 창작하기도 했다.

최승희, 일본, 한국, 조선, 중국에 영향력이 있는 무용가이고 배우이다. 그가 주인공인 영화 《반도의 무희》가 도꾜에서 4년간이나 흥행했고 그의 제자들이 한국, 조선, 지어 중국의 원로 무용가들로 활약하고있다. 참으로 중,조.한 무용계의 원조인 셈이다. 최승희는 북경의 김학철 사저에도 수차 찾아와 김학철의 네댓살된 아들(이 글의 저자-편자 주)을 안고 정령의 집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문예봉, 황철은 북조선 영화황제이고 연극황제이다. 황철의 웅글진 목소리가 춘향전의 변학도로 전체 조선국민을 사로잡았다. 김학철이 고골리의 《검찰관》을 각색하여 황철, 문예봉 연출로 준비가 다 되였는데 애석하게도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중단되였다. 김학철은 짚차로 중국으로 올 때 외팔 가극천재 황철을 데리고 왔다. 다리 하나 없는 사람이 팔 하나 없는 친구를 데리고 온것이다. 더우기 기구한 운명은 동유럽에서 류학한 황철의 딸이 수십년 후인 1990년대 연길에 파견되여 피아노학원 교수로 일하게 되였는데 김학철의 손녀가 그의 제자로 우연히 들어간것이다. 이 일이 김학철을 너무나 개탄하게 하였다.

1950년대 초 김학철은 중국으로 돌아와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정령(丁玲)의 부하로 연구활동을 했다. 정령, 애청(艾青,) 하기방(何其芳,) 애사기(艾思奇) 등 작가, 시인들과 이화원(颐和园) 정령 집에서의 정기적인 모임은 김학철이 중국현대문학의 정수를 알기에 충분했다. 그들 매개인이 다 당시 중국 문단의 거물급 대표인물들 이였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정령과 김학철은 당시 이화원에서 앞뒤 집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 뒀다. 하루는 정령의 집을 군인들이 갑자기 포위하여 궁금했는데 군인들이 철수하자 정령은 뒤문으로 숨가쁘게 달려와서 김학철 세식구에게 빨리 곤명호로 내려가라 했다. 모택동이 정령의 집을 방문하고 그곳에 체류하고있었다. 풍채가 좋고 학문이 깊은 모택동을 김학철은 숭배했다. 허리를 굽혀 작가의 집을 방문하는 대국의 령수가 보기 좋았다. 그러나 력사란 참 결말이 보이지 않는 게임과도 같다. 후날 그분은 정령과 김학철을 류배지로 감옥으로 보내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정령과의 인연은 이로써 그치지 않았다. 정령은 북대황(北大荒) 류배지에서, 진성감옥(秦城监狱)에서 인생고초를 겪었고 김학철은 연길구치소에서, 돈화감옥에서 새로운 인생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는데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정령이 김학철에게 보낸 편지). 정령과 그의 남편 진명(陈明)은 "외다리 김학철이 견딜수 있는데 우리가 못 겪겠는가"고 자아격려했다고 후날 만나서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다시 만난것은 정령부부가 김학철을 만나러 일부러 연변을 찾은 1981년이다. 밤새며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격정적이고 심각하였다. 력사와 력사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일치했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다소 엇갈렸다. 김학철의 아들(이 글의 저자-편자 주)이 엎드려 정령의 신끈 매드릴 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가 어릴 때는 내가 네 신끈을 매주었는데…".

정령이 영원히 우리곁을 떠났을 때 김학철은 진명에게 편지했다. "사람들은 력사는 공정하다고합니다. 그러나 그이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까? 나는 로신처럼 누구의 동정도 필요없고 또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것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로신의 전우들을 위하여,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모두 손잡고 끝까지 싸웁시다."

윤한윤(尹汉胤,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처 처장)의 말대로 "김학철선생은 독립적인 사고방식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위대한 작가이다. 김학철선생처럼 사회의 독립계층으로 명석한 두뇌를 갖고 사회발전과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투시하는 작가는 너무 적다. 자기의 결함을 알고 자기절로 비판할수 있는 민족만이 강한 민족이다. 조선족이 김학철선생과 같은 작가를 갖고있다는 자체가 민족의 강대함을 표시한다."

김학철 략력

1916년 11월 4일 조선 원산에서 태여남, 본명 홍성걸(洪性杰.)
1934년 서울 보성고등학교 졸업.
1935년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중국 상해로 망명. 상해에서 심운에 포섭되여 의렬단에 가입. 석정의 령도아래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입당, 김원봉의 부하가 됨. 중앙본부 소재지는 남경 화로강(花露岗).
1937년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 입학.
1938년 중앙륙군학교 졸업, 소위 참모로 국민당군대에 배속. 10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창립,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1년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元氏县)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부상,포로됨.
1942년 1~4월 석가장 일본총령사관에서 심문받음. 당시《일본국민》으로 10년 수감판결,
5월 북경~부산~일본 일본나가사끼형무소(长崎刑务所)에 수감.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함.
1945년 수감 3년 6개월만에 좌각절단.
8월 15일 일본 투항.
10월 9일 맥아더사령부(GHQ)의 정치범석방명령으로 송지영 등과 함께 출옥.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회 위원으로 좌익정치활동, 소설창작.
1946년 11월 좌익탄압으로 월북.
1947년 로동신문사 론설기자, 인민군신문 주필, 창작활동. 김혜원(金惠媛)녀사와 결혼.
1948년 외금강휴양소 소장으로 좌천.
1951년 1월부터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은 정령)에서 연구원으로 창작활동.
1952년 10월 주덕해 초청으로 연변에 정착.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활동.
1954년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상, 중, 하) 연변교육출판사 출판.
1957년 반동분자로 숙청당해 24년동안 창작권리 박탈.
1967년 12월부터《20세기의 신화》를 쓴 죄로 징역살이 10년. 연길류치소(미결), 추리구(秋梨沟)감옥 복역.
1977년 12월 만기출옥, 향후 3년간 반혁명전과자로 실업.
1980년 12월 복권. 24년만에 65세의 나이로 창작활동 재개.
1983년 전기문학《항전별곡》출판해서부터 장편소설《격정시대》(상,하) 산문집《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자서전《최후의 분대장》, 장편소설《20세기의 신화》, 《김학철문집》 1~2, 3~4권 출판.
1994년 3월 KBS해외동포상(특별상) 수상.
2001년 2001년 9월 25일 연길시에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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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작가들과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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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부터)조남기 문정일 김학철 조룡호 정판룡 

출처: http://korea.cpc.people.com.cn/73554/150731/150733/99997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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