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서숙>의 창시자 리상설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6:05:01    조회: 29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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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룡드레우물가에 처음으로 근대 민족교육의 종소리를 울린분은 리상설이다. 리상설은 충청북도 진천국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고중 7년(1870년) 음력 12월 7일에 시골선비 리행우와 벽진 리씨사이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복남이였다.

  리상설은 7세때에 동부승지 리룡우의 양자로 한승부 남부 장동장박골(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 한국은행총재의 저택터)로 상경하였다. 이 해가 바로 일제가 조선침략을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해였다. 리상설이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일화가 있다.

  한가지는 리상설이 어릴 때부터 조숙하여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이 비범하여 린근에서 모두가 한입으로 그를 칭찬하였는데 마침 리룡우가 늦도록 후사가 없어 이름있는 관상쟁이 김모를 데리고 경주 리씨의 집단 향리인 진천 초평으로 양자감을 고르러 가던 도중 복남의 재질과 총명이 비범하다는 평판을 듣고 산직마을에 들리니 관상쟁이 김모가 7세의 복남이를 이윽토록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보기 드문 귀상이라 극구 칭송하기에 그 자리에 그를 후사로 정하였다는 이야기고 또 다른 한가지는 리룡우가 양자를 구하려고 진천 초평을 거쳐 터골로 행차할 때 재상의 행차가 호화찬란하여 부락민들과 아이들이 많이 모여 구경하는지라 애들의 기지와 인품을 보려고 대추 한말을 펼쳐 놓았는데 그 어떤 아이도 감히 그 대추에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7세밖에 안되는 복남이가 그 대추를 집어먹고 주머니에 넣으니 복남이가 하는양이 마음에 들어 즉시 그를 양자로 정하고 한성으로 데리고 올라가 공부시켰다는 이야기다.

  복남이 13세 되던 해인 1882년 4월, 같은 달에 양부 리룡우와 생부 리행우가 련이어 사망하였다. 16세때 탈상하고 참판 서공순의 장녀달생 서씨와 결혼하였다. 그는 구학문인 유학을 배우고 시국과 사회의 전환을 살피는 한편 신학문과 근대사상을 거의 자습으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25세때인 1894년에 조선왕조 최후의 갑오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이어 세자시독관이 되였다. 1895년에는 또 좌비서원랑에 제수되였다. 하지만 승지자리에 한달 근무하고 아예 조정에 들어가지 않은 탓으로 6월 17일에 해임 되였다. 이듬해 1월 22일에는 성균관 교수 겸 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오래 봉직못하고 또 한달만에 한성사범학교 교관직을 담임하게 되였다. 그러나 신문화사상을 가진 그는 구사상과의 대립으로 하여 이해 3월 25일에 또 사임하였다. 그후의 여러관직도 일제가 통제함으로 하여 일일이 사임하고 최후로 1905년 11월에 의정부 참찬으로까지 발탁되였으나 그것도 마다하고 1906년 4월 18일에는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리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나 이 해 8월에 북간도 중심인 룡정에 도착했다.

리상설은 룡정에 도착하자 룡정에서 제일 큰 집인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자기 돈으로 사들이고 학교건물로 수선한후《서전서숙》이라 명명하고 자신이 숙장으로 되고 리동녕과 정순만은 운영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기타 교원의 월급이거나 교재, 학생들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를 그 자신이 전부담하면서 룡드레우물가에 근대교육의 첫 종소리를 울리였다.

《서전서숙》의 건평은 70평 가량되였고 개숙할 때의 학생은 린근의 조선족청소년 22명밖에 안되였다. 당시 이곳의 조선인들은 신교육에 대한 리해가 없었으므로 교직원들이 떨쳐나서 조선인마을을 돌아다니며 입학을 권유했으며 멀리 두만강을 건너 회령, 종성, 온성 등지에까지 가서 입학을 권유하였다. 북간도의 교육의 선구자 김약연이 한문을 배우던 자기의 제자2명을 보내왔던 일도 이 무렵의 일이다.

《서전서숙》은 처음에 학생들을 갑, 을 반으로 나누었다. 갑반은 고등반이였고 을반은 초등반이였다. 갑반에는 20세좌우의 청년학생들인 윤정희(尹政熙), 리병치(李丙驰), 윤규한(尹圭漢), 김정문(金鼎汶), 남세극(南世極), 채우석(蔡禹锡), 구자승(具滋升), 구정서(具贞書)등이 있었고 을반에는 김학연(金学渊), 박일병(朴一秉), 오병묵(吴秉默), 리정치(李庭驰), 박효언(朴孝彦), 구자익(具滋益), 박세호(朴世豪) 등이 있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황달영이 력사와 지리, 려준이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으며 리상설은《산술신서》상하권을 직접 저술하여 가르쳤다. 리상설은 이 학교를 신학문을 실시하는 한편 철두철미한 반일민족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없는 학교로 만들었다.

  1907년초 일제통감부는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를 세우려는 야심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룡정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먼저 정탐을 룡정에 파견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정탐들은 상인으로 가장하고《서전서숙》을 찾았다. 그때는 바로 점심때여서 놈들은 더운물과 식사장소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리상설은 문을 나서다가 왜놈들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왜놈들은 별수없이 개울가를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반일교육의 기지였던《서전서숙》은 이듬해 9,10월경에 페숙하게 되였다. 그것은 이해 4월 3일경 헤이그 밀사로 리동녕, 정순만과 함께 리상설이 떠났기 때문이였다. 밀사지령을 받았기에 리상설은 훈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러 간다고 말하고 울라지보스또크로 떠났던 것이다. 그후 약 한달뒤에 리동녕이 리상설의 아우 리상익과 같이 돌아왔다. 리상설이 없자 재정난이 들이닥친데다가 또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된 뒤라 왜놈들의 감시와 방해가 극심해서 부득불 페숙하게 되였다.

  서전서숙은 비록 1년미만의 짧은 력사로 끝났으나 독립운동력사에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조선민족교육의 력사상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07년 6,7월 화란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리상설, 리준, 리위종 세 특사가 활동한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상설은 구미와 씨비리, 중국에서 전전하면서 독립활동기지를 세웠고 독립지사들과 통일된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였으며《대한광복군정부》건립 등 허다한 독립운동을 하셨다. 병약한 그는 1917년 3월 2일 연해주의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창 나이에 천추의 한을 품은채 작고하시였다. 니골리스트에서 병치료를 하던 그는 림종시에 부인달성 서씨와 아들 성희, 동생 리상익 등 가정성원들과 독립활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리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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