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의 선각자 김약연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6:03:58    조회: 44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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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jpg  룡정에서 륙도하기슭을 따라 약 20리를 올라가느라면 길가에 우뚝 솟은 선바위를 지나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륙도하 북쪽에는 성고촌, 중명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륙도하 남쪽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등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력사적으로 이곳을 통털어 명동지구라고 불렀다.

  백여년전만 하여도 이 고장은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9세기말엽에 가난에 쪼들린 조선의 리재민들이 이 고장에 이주하여 차츰 마을이 이루어졌다. 명동에 처음으로 글방을 세운 민족교육의 선각자 김약연은 1968년 10월 24일에 조선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99년 2월 18일 조선 종성으로부터 우국지명 인사들인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언 등과 함께 중국의 연변 화룡현 지신사(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으로 집단망명 하여왔다. 그는 수백정보의 황무지를 사들이고 개척단 공동의 힘으로 조선족마을인 명동촌을 세웠다. 애국지사이며 한학자인 김약연은 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901년 4월에 《규암재》(규암은 김약연의 호)라 일컫는 서당을 꾸리였다. 주로 한학을 전수하는 구식교육이였으나 이것은 중국조선족교육의 첫 배움터로서 교육사상 아주 큰 의의가 있는것이다.

  《서전서숙》이 페숙되자 일부 선생과 학생들이 명동에 오게 되였다. 그들은 김약연 등 유지들과 협상하고 서당을 그만두고 1908년 4월 27일에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숙》을 창립하였다.

  《명동서숙》은 초대숙장에 김약연, 명예숙장에 박무림, 재무에 문치정, 교원으로는 김약연, 김학연(김약연의 사촌동생인데 《서전서숙》출신), 남위언, 김하규, 려준 등이 취임되였다. 숙장으로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반일민족독립사상을 가진 애국자들이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사립명동학교로 개칭되였으며 1910년에는 중학부까지 증설되고 김약연이 교장으로 취임되였다. 1909년 신민회 산하의 청년회 회원이며 서울 상동청년학관 출신인 정재면이 초빙되여 명동학교로 오면서부터 김약연은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였고 곧 명동교회를 세웠으며 또 정재면의 권유에 따라 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당시 명동학교의 소학부의 과목으로는 국어, 한문, 산수, 주산, 리과, 작문, 습자, 창가, 체조, 지리, 력사였고 중학부과목은 력사, 지지(地志), 법학, 지문(地文), 박물, 리화(물리화학), 생리, 수신(修身), 수공, 신한독립사, 위생, 식물, 사범교육학, 농립학, 광물학, 외교통역, 대한문전, 신약전서, 지나어(중국어), 작문, 습자, 산수, 대수, 기하, 창가, 체조(군사) 등이였는데 교학의 착안점을 반일민족독립의 심각성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명동학교에서는 교학의 질을 보다 높이기 위하여 조선으로부터 황이돈, 박태항, 장지연 등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자인 리도휘도 자주 학교에 와서 민족독립과 반일선동연설을 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녀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것은 중국조선족교육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그 당시의 교원들로는 박태항, 최기학, 송창희, 황의돈, 박무림, 박태식, 장지연, 김철, 박경철, 김성환, 김승근 등이였으며 학생수는 중학부에 160명(남학생 114명, 녀학생 46명)이였고 소학부 보통과 학생은 121명이고 고등과 학생은 159명이였는데 녀학부 보통과는 53명, 고등과는 12명이였다. 녀학부 교원으로는 정신태, 리의순(리동휘의 딸), 리봉운 이였다. 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당지는 물론 동북 각지와 조선, 로씨야 연해지구에서까지 학생들이 이 학교에 모여들었다. 수업료는 3학년까지 한 학생에게서 4원 80전을 받고 4학년은 4원 80전 외 좁쌀 여섯말을 더 받았으며 약간의 땔나무를 거두어 들이였다.

  명동학교에서는 공부할수 없는 조선족동포들을 계몽시키기 위하여 명동, 장재, 신동에 야학교를 꾸리고 신문화를 적극 전수하였다.

  명동학교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였다. 명동학교후원회에서는 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10여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모은 의연금 800여원으로 1917년 13개월이란 시공을 하여 드디여 현대식 교사를 짓게 되였다. 당시 선생들에게는 월급이 따로 없었다. 독신으로 와있는 선생님은 돌림차례로 학부모네 집에서 한달씩 주숙하거나 한집을 정해놓고 주숙하게 되면 쌀과 땔나무도 학부모들로부터 거두어 하숙집에 들여놓았다. 가족이 있는 선생은 학전(学田)을 적당히 부치게 하였다. 그리고 선생들의 옷도 학부모들의 쌀을 거두어 판 돈으로 해결하였고 땔나무는 학부모들과 상급학년 학생들이 해왔다. 학교운영경비는 학생들의 월사금, 학전수입, 기부금, 의연금 등으로 해결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명동학교의 여러가지 사업은 정연하게 잘 진행되였다. 수업이 눈에 뜨이게 성과적으로 진행되였을 뿐만아니라 과외활동과 사회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반일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명동학교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이면 체육, 문예 활동 또는 토론회, 강연회를 조직하였다. 토론회와 강연회는 《지식이 좋으냐? 금전이 좋으냐?》, 《영웅이 시대를 창조하느냐? 시대가 영웅을 낳느냐?》 등 제목으로 변론하기도 하였는데 발언자거나 방청자거나를 물론하고 모두 변론에 용약 참가하였다.

  1912년 봄, 룡정촌에서 동남쪽으로 약 5리가량되는 대교동에서 《제1차간도학생운동회》가 열렸다. 명동학교의 수백명 학생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질서정연히 줄지어 회장에 들어서면서 《애국가》를 소리높이 불렀다. 이에 전체 대회장에 모인 학생들과 관중들도 호응하여 따라서 대합창을 하였다.

  20세기 10년대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명동학교는 반일민족사상이 들끓는 배움터로 소문이 높았다. 조선 국내에서 점차 반일운동이 격화되고 있을때 이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19년 《3.13》운동때 이 학교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지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3월 13일날 이른아침부터 덕신사, 지신사 등 지방의 수천명 군중들과 함께 룡정으로 보무당당히 행진하여 들어갔다. 《3.13》운동때 일제와 맹부덕부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희생된 19명 시위자들 가운데는 3대독자이고 16세밖에 안되는 명동학교 중학부학생 김홍식도 들어있었다.
1920년 1월 3일,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외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 《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명동학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에 《경신년대토벌》이 있었다. 당시 일제는 갑자기 명동에 덮쳐들어 수백명 군중을 명동학교운동장에 몰아다 놓고 독립운동자를 내놓으라고 위협공갈 하였으나 동지를 팔아먹을 명동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헛물만 켜게 된 극악무도한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재더미로 만들었다.

  김약연교장은 1915년에 간민교육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고 연변 각지의 전반 교육사업을 추진하였고 1919년에는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가서 려운영, 리동휘 등과 독립운동의 련합전선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또 《상해림시정부》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는 도중 중국 민국관청에 체포되여 2년동안 연금되였다. 명동학교의 교장직을 계임한 김정규는 교감 리규환, 학감 진석관, 재무 진진규의 협조하에 교원 윤영복, 김성훈, 기지복, 오임환, 박성도, 녀교원 김신옥 등과 전교 학생들을 조직하여 당지 조선인들의 열정적인 협조하에 1922년부터 1923년 두해동안 거액의 자금을 들여 《경신년대토벌》때 불타버린 페허우에 또 새 학교를 벽돌로 지었는데 교실만해도 다섯칸이였다. 이때 재학생수는 중학생 102명, 소학생 160명, 녀학생 60명이였다.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 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갑자년(1924년) 특대 흉년으로 하여 1925년 중학부가 문을 닫게 되자 여러 선생들도 명동학교를 떠났으며 또 일부 학생들도 룡정 각 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명동학교는 교회에서 경영하게 되였으며 남녀가 공학하는 학교로 되였다. 그러나 새 사조와 학교는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여론과 웨침속에서 김약연은 1928년에 학교를 떠나 1929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명동교회의 목사로 되였다.

  1928년, 김약연이 학교를 떠나게 되자 오을렬이 교장으로 취임되면서 명동학교는 드디여 교회의 경영을 취소하고 또다시 사립학교로 되였으며 학교의 교학내용중 성경과 과목을 취소하였다.

  명동학교는 창설되여서부터 1925년에 중학부가 페지될 때까지 18년간 무려 1천여명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런 졸업생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항일투쟁이거나 민족교육사업에 나섰으며 그리고 더러는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되여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저항시인 윤동주, 영화배우 라운규 등도 명동학교출신이다.

  민족교육 선각자로서의 김약연은 1938년 2월에 룡정기독교, 은진중학교와 명신녀학교의 리사장으로 취임되였다.

한평생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시였던 김약연은 1942년 10월 29일 룡정에 있는 저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림종시 김약연선생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는 말씀을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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