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사 송몽규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6:03:15    조회: 36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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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jpg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룡정시 명동촌에 있는 외가집에서 당시 명동소학교 교원을 지내고 있던 송창회와 기독교 신자인 윤신영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의 아명은 한범이였다.

  1925년 4월, 여덟살을 잡은 송몽규는 윤동주, 김정우,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였으며 매사에 적극적이여서 동학들중에서 언제나 코기러기였다. 송몽규, 윤동주 등의 적극적인 활동과 주선하에서 그들의 학급은 문학소년반과 다름없는 그런 길로 나아갔다. 이때 송몽규는 4학년이였는데 《어린이》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다 읽고 그것을 동학들에게 주어 돌려보게 하였다. 5학년때 그의 주도로 윤동주 등과 함께 《새명동》 잡지를 꾸렸으며 몇기를 계속 냈다. 그리고 송몽규는 또 동학들을 이끌어 성탄절이거나 학기말이 되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명동촌에서 10리 상거한 다라자촌에 있는 화룡현 립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되여 1년을 다니고 1934년 4월에는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시절부터 문학을 각별히 즐기던 송몽규는 중학교에 가서는 문학에 더욱 열심하였다. 그가 꾸준히 노력한 보람으로 당시 조선 《동아일보》 신춘문예현상모임에 그의 콩트 《숟가락》이 입선되였다. 이 입선은 장래가 기망되는 문학소년의 특성을 과시하였다.

  1934년, 중학 3학년시절 송몽규는 자기의 문호를 《문해》라 지었다. 그러나 문학적념원을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동양사와 국사 그리고 한문을 가르치던 민족주의자 조선생의 영향하에서 결연히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로 나갔다. 그는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주석의 지원하에 한국림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꾸린 학교였다.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 학생들을 인도, 조직하여 가지고 문화활동을 활발하게 벌리였다.
송몽규는 민족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에 남경을 떠나 산동성 제남에 있는 조선독립운동단체를 찾아갔다.

  1936년 4월 10일, 송몽규는 까닭없이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는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리며 갖은 곡경을 겪다가 1936년 4월 구사일생으로 고향집에 돌아오게 되였다. 그러나 고향도 일제놈들의 통치하에 있었기에 또다시 수감당하였다. 일제당국은 그를 본적지인 조선 함경북도 웅기읍 경찰서에 압송하여 가두어놓고 반복적인 심문을 들이대였다. 그후 겨우 놓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로부터 그에게는 《요시찰인》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놈들을 기이며 살아야 했다.

  함경북도 웅기읍 경찰서에서 나온후 송몽규는 대성중학에 편입되여 2년남짓이 중단하였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1938년 2월, 대성중학을 졸업한 송몽규는 아버지의 승낙하에 당시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있는 연회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함께 연회전문에서 민족정신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익혀나갔다. 1941년 6월 5일, 송몽규와 학우들은 연회전문학교 문고학생회 문우회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당시 문우회 문예부장이였다. 송몽규는 《꿀벌》이란 필명으로 《문우》에 발표한 자기의 시 《하늘과 더불어》에서 비운에 얼룩진 지난날을 되새기며 솟구치는 회한의 정과 더불어 비장한 결의를 토로하였다.

  1942년 12월, 송몽규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회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 3월초, 일본에 건너간 송몽규는 교또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일제당국은 마침내 1943년 7월 10일에 송몽규를 《도꾜조선인학생 민족주의집단사건》의 주모로 단정하고 체포하였다.
1945년 4월 18일, 송몽규는 일제의 생체실험대상으로 시달리다가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비명으로 조졸하였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분전하던 청년문사 송몽규는 일제당국의 무단적인 폭압에 비참하게 희생되였다.

  한줌의 재가 된 청년문사 송몽규는 그가 나서 자란 고향-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 북산에 와 묻히였다가 1990년 청명절에 룡정1중과 룡정 지명인사들의 힘을 입어 윤동주묘소의 서쪽에 그의 골회가 이장되였다. 이장된후에도 의연히 원래의 묘비 《청년문사-송몽규》란 비석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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