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재면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6:02:38    조회: 34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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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면의 본명은 정병태(郑秉泰)이며 호는 벽거(碧居), 일광(一光), 우산(雨山)이다.
1884년 2월 14일, 조선 평남군 숙천에서 아버지 정학전, 어머니 김성약의 아들로 태여났다.
1898년에 평남 순안측량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상동교회 전덕기목사를 만나 그의 애국사상, 민족의식,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정재면의 민족운동은 일찍 서울상동교회부설 청년학원의 학생시절부터 시작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5조약》을 강요하여 국권을 빼앗자 그는 학교 사생들과 함께 을사5조약 무효화투쟁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상동교회 청년학원파가 중심세력의 하나가 되여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会)가 창립되자 그는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고 23세에 신민회의 파견으로 원산보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을 때 신민회 중앙간부이며 함경도 총감인 리동휘와 총서기 리동령이 찾아와 북간도 룡정에 가서 리상설이 운영하던 서전서숙의 교육사업을 계승할것을 권고하자 이를 수락하고 북간도교육단을 묶어가지고 룡정으로 왔다.

  1908년, 원산을 떠나 룡정에 왔을 때 서전서숙은 이미 복구운영이 불가능했다. 서전서숙이 폐교된후 박무림과 김영학이 룡정에서 20리 떨어진 명동촌에 가서 김약연과 상의하고 규암재서당을 명동서숙으로,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고치고 박무림을 교장으로, 김약연이 교감으로, 정재면이 교무주임을 맡았다. 정재면의 요구에 의하여 성경과목을 설치하였다. 그후 명동학교는 중학부에 이어 녀학부까지 증설하였다.
정재면은 명동촌을 근거지로 배상회전도사와 함께 1911년부터 1914년까지 간도 각지에 70여개의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하여 명동촌은 정재면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교민족운동의 책원지가 되였고 그후 민족반일운동의 중심으로 되였다.
조선인마을건설에 성공한 김약연, 문치정, 김하규, 남위언, 마진등은 정재면의 권고와 리동휘의 부흥사경희로 인하여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신앙과 반일민족운동은 동일한 것이였다.

  정재면은 또 김약연이 회장직을 맡고 김영학이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간민회》에서 총무로도 활약하였다.
《간민회》는 북간도 조선인사회를 대표하는 자치기관으로서 12부의 부서를 두었는데 연길, 훈춘, 왕청, 등 간도 4현은 물론 안도, 무송, 장백현에까지 그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1914년 《간민회》는 왕청현에 군관학교를 건립할 계획을 하였다. 정재면은 이 일을 추진하다가 일본령사관경찰에 체포되여 서울로 압송되였다. 그러나 달라즈와 명동사람들의 대부분 그러하듯이 정재면도 중국 국적에 올랐었기에 중국법에 의해 처벌됨이 원칙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오록정의 배려로 사면되였다.
1919년 3월 13일 정재면은 명동촌대표로서 의사부원으로 선출되였고 상해림시정부 북간도대표로 되였다.
그후 1923년 룡정 가나다선교부소속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정재면은 1925년에는 남경금릉대학 신학부에서, 1928년에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하였고 1928년부터 1930년까지는 룡정 은진중학교 교목으로서 기독교민족교육을 철저히 수행하였다.

  1930년부터 해방무렵까지 조선 함경북도 청진과 원산에서 종교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하던중 1944년 9월에 감옥에 갇혔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재면은 광복이 되자 즉시 서울에 가서 독립촉성기독교 중앙협의회, 기독공보서 등 언론활동에 참여하여 기독공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6.25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재임하였다. 또 1949년부터 1950년까지 홍사단이 경영하던 한국일보사의 리사장직을 력임한후 언론계를 떠나 중앙교회에서 목회자로서 삶을 살다가 1962년 78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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