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가 문익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6:01:50    조회: 17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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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jpg  문익환은 1918년에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만주이민 1세대인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 사이의 첫 아들이였다. 문익환은 어릴때부터 준수한 용모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문익환은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민족시인 윤동주와 같이 수학했다. 중학교(5년제)를 졸업한 뒤 일본의 일본신학교와 만주의 봉천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문익환은 일본류학중에 만난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하여 3남1녀를 낳았다.
그는 해방뒤인 1946년에 월남하여 서울의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되였다. 1949년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류학하여 공부하던중 조선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유엔군의 통역이 되여 판문점과 일본 도꾜의 유엔군사령부 등지에서 일했다. 휴전뒤에 다시 프린스턴으로 돌아가서 1954년에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55년부터 모교인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에서 구약을 가르치면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신, 구교 공동성서 번역작업이 시작되였을때 구약번역 책임위원으로 위촉되여 1968년부터 히브리어로 되여있는 성서를 우리 말로 번역했다. 구약은 본래 40%가 시로 되여 있다. 구약의 시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그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타고난 신명으로 이내 그 자신은 시인이 되여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3)를 출간한 이래 모두 다섯권의 시집을 펴냈다.

  문익환은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으로,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민주통일 민중련합 의장으로, 1989년에는 전민련 고문으로 활동했다.
문익환이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는 재야운동가로 크게 방향전향을 하게 된 것은 1976년 3월 1일에 윤보선, 김대중 등등의 저명한 재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되면서부터였다. 그런 변신의 전기가 된것은 친구였던 장준하의 유지를 계승하겠다고 반독재투쟁에 뛰여 들자 관변측은 그에게 대뜸 《정치목사》라는 표찰을 달아주며 질시했고 재야쪽에서는 그를 《이 시대의 량심》으로 부르며 크게 기리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는 이렇게 《들판의 삶》을 시작했다.
시대상황이 엄혹해질수록 그가 감옥에 투옥되는 일이 잦아지고 그에 대한 량쪽의 평가는 그 간격이 넓고 깊어졌다. 그러나 감옥의 높고 차거운 담장도 그가 지닌 특유의 생기와 신명은 누르지 못해 그는 감옥생활도 늘 유쾌하게 치렀다. 그의 유명한 별명 《감옥체질》은 그래서 생겼다.

  문익환이 반독재투쟁에 뛰여든 다음의 궤적을 보면 아주 흥미롭다. 처음 민주화투쟁에 뛰여들었을때 그는 많은 재야운동가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비중이 커지더니 급기야 재야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였고 이내 명실이 부합되는 대부의 자리에 올라섰다.
재야운동가로서 그가 지녔던 위상은 아주 독특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재야의 대부가 된 사람이 아니다. 그가 지닌 특유의 생기와 신명이 절로 강력한 구심력이 되여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고 함께 뛰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그는 저절로 재야의 대부 자리에 앉게 되였다. 생기와 신명에 본능적으로 민감한 년령인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특히 그의 주위에 많이 모여들었던 현상이야말로 그의 그런 특질을 잘 보여준다.

  그는 손자벌되는 청소년들과 어울려서 줄기차게 뛰였다. 세월이 흐르고 대통령이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였어도 그는 변함없이 젊은이들과 같이 뛰면서 법정에 끌려 다니고 감옥출입을 계속했다.
그가 드디여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태우정권의 통치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담은 그릇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물과도 같은 유연성을 드러낸것이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량 김과 싸워 대통령이 된 로태우는 억압적이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물태우》라는 별칭을 들을만큼 유연한 통치방식을 보여주었고 세계적인 정세변화의 추세에 맞추어 《북방정책》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대공산권정책을 활발하게 개척해갔다. 국회도 여소야대로 개편되여 여당이 심한 수세에 몰렸다. 이처럼 주변환경이 바뀌자 다른 재야운동가들은 졸지에 과녁을 잃은 사수처럼 주춤거렸다. 그러나 문익환은 그 특유의 생기와 신명으로 오히려 한발 더 앞으로 내뛰였다. 통일운동으로 새 방향을 설정한것이다.

  문익환은 사상과 리념,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사선을 헤치고 평양방문의 길을 개척한 남북통일의 애국인사이다.
1989년 3월 25일, 70고령의 문익환목사는 평양을 방문하여 2차례에 걸쳐 김일성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며 유관부문일군들과 공동의 통일방도를 확정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반세기가까이 동토대처럼 얼어붙었던 민족분렬의 장벽에 파렬구를 낸 문익환목사의 평양방문은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력사적 쾌거가 아닐수 없다.
참으로 문익환목사의 평양방문은 민족분단의 장벽에 파렬구를 내고 삼천리 온 강토에 통일의 열풍을 안아왔으며 7천만 겨레 모두에게 남북통일에 대한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어찌 그뿐이랴, 그의 방북은 국토통일의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한 민간대화의 물고를 터놓는데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문목사가 온갖 난관을 헤치면서 방북의 길, 통일애국의 길을 개척하였기에 그 길을 따라 각계 각층의 남북인사들이 평양과 서울의 길에 올라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대내외에 힘있게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익환목사는 방북한것이 죄가 되여 7년간의 징역을 언도 받고 옥중생활을 할 때에도 평양방문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과감히 벌리였으며 병고로 가석방되였을 때에도 광주를 비롯한 여러곳을 돌며 방북보고대회와 강연회에 나섰다.
로태우정권은 《물》이 얼면 《얼음》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해보이듯 즉각 혹독한 공안정국의 한파를 몰아붙여 국회에서 어렵게 합의된 보안법페지약속을 취소하고 귀국한 문익환목사를 감옥에 집어넣는 등으로 그간 힘들게 거둔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묵살해버렸던 것이다.

  문익환목사가 방북으로 인한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것은 1990년 11월, 그뒤로 1994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통일운동을 생애의 목표로 삼고 활약했다. 그의 삶은 굴곡많은 한국현대사가 낳은 가장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의 투사로서의 모습이였다.

문목사는 비록 그처럼 바라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민족단합과 통일위업에 남긴 위훈은 영원히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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