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와 장덕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6:04    조회: 28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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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jpg  1999년 7월 27일, 룡정시 《3.13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룡정시 동성용진 동명촌 부근에 있었던 원 장암촌 터전에 《장암참살사건유적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장암촌참살사건이란 대한군북로도독군부의 조직인 련합된 대한독립군, 군부도독부, 국민회군이 홍범도의 총지휘하에 1920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진행한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인해 10월에 약 2만명에 달하는 정규부대를 동만(연변)에 끌어들여 조선족집거구에서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학살을 감행하였는데 이 참살사건중의 하나이다.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에서는 이른바 《경신년대토벌》의 기사를 이렇게 밝혔다.

  《최근 3주이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명에 달한다.》
장암촌참살사건도 역시 《경신년대토벌》때의 사건으로서 일제는 장암촌에서만 하여도 무려 33명이나 되는 무고한 조선족동포들을 례배당에 몰아 넣은후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만 있으면 총을 쏘아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모든 집들에 불을 놓아 페허로 만들었다. 일제는 장암촌뿐만 아니라 왕청현, 훈춘 일대와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만행을 기탄없이 감행하였다.
치떨리는 이른바 《경신년대토벌》에서 수천명의 무고한 조선족이 일제의 총칼아래 무참히 쓰러졌고 수천채의 초가삼간들이 불에 타버렸다.

  일본제국주의의 이 천추에 용서못할 야수적 만행은 국내외의 선량한 사람들의 강렬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당시 조선 《동아일보》기자로 있었던 장덕준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취재하여 온 세상에 널리 폭로, 규탄하려는 결심을 내렸다.
장덕준(张德俊)은 1891년 조선 황해도 재녕에서 태여났다. 1920년 4월 1일, 김성수(金性洙),리상협 등 77명의 애국지사들의 발기로 서울에서 《동아일보》를 창간할 때 당시 29살인 장덕준도 이에 참여하여 발기위원 겸 론선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초창기에 그는 특파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그는 특파원신분으로 중국 북경에 건너와 미국국회의원단의 중국방문을 취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조선국내의 실정을 여러모로 소개하면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민족적량심과 기자의 신분이기에 서울에서 《경신년대토벌》소식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수 없었던 장덕준이였다.
장덕준선생이 중국 룡정으로 길을 떠날 때는 바로 중조국경이 막힌 때여서 도강증이 없이는 두만강을 건늘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을 모르는 장덕준선생은 함경북도 경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사정을 알게 되였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시 함경북도 도지사로 있은 동창생 나까노지사를 찾아갔다. 그는 동창생에게 사정하여 도강증을 얻어 가지고 1920년 11월말에 룡정에 도착하였다.

  장덕준선생은 룡정 삼성려관에다 행장을 풀기 바쁘게 룡정에 있는 간도성일본총령사관으로 자신의 안전도 고려하지 않고 찾아갔다. 그가 조선족에 대한 일본군의 야만적 학살행위를 알아보련다고 총령사에게 말하자 교활한 총령사는 단마디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일축해버렸다. 그러나 이에 물러설 장덕준이 아니였다. 그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피비린 참살사건을 기어이 객관적이며 공정하게 취재할 결심을 내린 그는 또 이번에는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일본군토벌 대사령부로 찾아갔다.  
장선생은 삼엄한 계엄속을 헤치면서 두려움없이 사령부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참살사건에 대하여 강력히 질문하자 천하의 까마귀는 모두 검다고 총령사와 똑 같은 족속인 사령관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리하여 장덕준선생은 홀몸으로라도 이 사건을 꼭 취재하려고 사건이 발생한 장암촌을 찾아갔다. 그는 장암촌 현장에서 사진도 찍고 증거물들도 수집한후 자료들을 귀국할 때 가지고 가려고 잠시 기독교목사 박걸(외국인 선교사)에게 맡겨 보관하도록 하였다.
장덕준선생은 또 룡정 은진중학교 교장 부두일(외국인)을 찾아가서 민족적 울분을 터치워 놓았다.

  《왜 조선민족이 피살된 참상을 보고 그저 수수방관을 합니까? 왜 영국령사관에 알림과 동시에 온 사회의 여론을 불러 일으키지 않습니까? 예?!》
부두일은 부두일로서의 난감한 문제가 있었다.
《일본군이 우리가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요. 누가 토벌현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로씨야인으로 간주되여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해 사전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성명하였지요.》
《그럼 기록증거문서를 나한테 주면 내가 직접 영국령사관에 제기하겠습니다.》
장덕준선생이 이토록 강경히 나서자 부두일 교장은 쾌히 응낙하고 일주일이나 열흘후 조선으로 출발시에 비밀리에 전해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다시 만나기로 굳게 약속하고 헤여졌다.

  장덕준선생의 돌연적 출현과 행각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주의를 자아냈다. 이리하여 일제놈들은 장선생을 불러다가 《조선으로 당장 돌아가라.》, 《계속 눌러있다간 재미가 없을줄 알아라.》 하고 갖은 위협과 공갈을 가하였다.
《너, 일본군사령부의 종군기자허가증을 가졌느냐? 종군허가증이 없으면 스파이의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래도 기어코 종군할 의향이 있다면 서울로 돌아가서 일본군사령부의 종군기자증명서를 가져와!》
이에 장덕준선생도 조금도 굴함없이 떳떳하게 말하였다.

  《기자는 취재의 자유가 있을뿐더러 모든 군사에 관계되는 기사는 총독부와 일본군사령부의 사전의 검열이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또한 내가 취재한다고 하여 당신들 작전회의에 참석하는것도 아닌데 무엇을 두고 내탐이라고 하는가? 될수 있으면 작전사령부에서 나의 종군증을 해결해달라.》
이 무렵 룡정에 주재하는 서울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에서 한인가(韩人街)에 자리잡은 《해동관》료리집에서 장덕준선생의 환영연회를 베풀었다.
이날 저녁 일곱시경 장선생이 투숙하고 있는 삼성려관에서 연회석에 뜻밖의 전갈이 왔다.

  《일본군헌병대에서 두 헌병이 마차를 가지고 왔는데 래일 새벽의 와룡동토벌시 종군의향이 있으면 속히 국자가에 가서 새벽 일찍 토벌대와 함께 행동하라고 전해주라 합니다.》
의외로 이 소식을 접한 장덕준선생은 돌연감이 없지 않았으나 한편 취재의 기회를 만났다고 속으로 기뻐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를 한사코 말렸으나 장덕준선생은 오직 일제의 야만적폭행을 직접 보아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투철히 폭로할수 있다면서 연회석을 떠나 삼성려관으로 갔다.
그는 려관에서 행장을 차리고 난후 서울 《동아일보》 룡정지국장 김용찬과 《간도신보》 기자 정사무의 전송을 받으면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두 일본헌병과 함께 탔다.
장덕준선생이 떠나자 김용찬지국장은 《동아일보》 국자가 지국장 손정룡에게 이 일을 전화로 알렸다. 밤 열두시에 김용찬지국장은 손정룡지국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룡정지국에서 온 전화를 받고 아홉시 반부터 다리목에서 장덕준이 타고 온다는 마차를 기다렸는데 열두시가 다 되여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김용찬지국장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역시 같은 내용의 질문전화가 오자 김용찬지국장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곧 일본군사령부에 달려가서 물어보니 사령부에서는 장선생이 국자가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려관에 투숙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지국장은 또 즉시 국자가에 있는 손지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의 진상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시 걸어온 전화는 일본주인은 장선생과 같은 손님이 투숙한 일이 없다는것이였다…

  장덕준선생은 이렇게 행방불명이 되였다. 어떤 사람은 일본헌병대놈들이 장선생을 데리고 가다가 중도에서 살해한후 해란강에 처넣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모아산기슭에서 비밀리에 살해하고 쥐도새로 모르게 매장해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아무튼 이는 일본헌병의 악착한 만행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고 있다.
장덕준기자는 이렇게 갔다…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장덕준선생이 그 어느곳에 고요히 잠들고 있는지 알바가 없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묘소라도 알수 있다면 술을 부어 올리고 원혼을 위로하련만… 《동아일보》가 창간된 그해부터 일제는 장덕준선생을 암살한 사건으로 하여 우리 민족과 더불어 《동아일보》사의 동사자들에게 갚을수 없는 피빚을 졌다. 또 이 사건으로 하여 《동아일보》사 박영효(朴泳孝) 초대사장과 전체 직원들은 장덕준선생의 뜻을 받들어 더욱 열심히 민중계몽운동과 독립정신앙양에 이바지하면서 《동아일보》의 모든 기자들의 필봉이 비수와 총탄이 되여 일제를 규탄하였으므로 일제는 《동아일보》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게 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동아일보》를 선후 네차례 정간처분 하였고 633차 발행을 금지했으며 489차 신문을 몰수하였고 2432차 원고내용을 삭제하는 등 만행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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