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윤동주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4:13    조회: 220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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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jpg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파평 윤씨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고 교육가인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용의 큰아들로 태여났다.
윤동주네 집은 1886년 증조부 윤재옥때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으로 이민왔다가 1900년 조부 윤하연때에 명동촌으로 옮겨와 살게 되였는데 소지주로서 생활이 넉넉한 편이였다.

  윤동주가 태여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선생이 일찍 이 지방에 이주해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이 다른 어느곳보다 활발했던 곳이다.
윤동주가 태여날 무렵에는 조부 윤하연이 기독교 장로직을 맡고 있을 때였기에 윤동주는 태여나서부터 유아세례를 받을수 있었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1895년 음력 6월 12일에 출생했는데 명동중학교 출신으로서 김약연선생의 주선으로 북경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윤동주가 태여날 무렵 명동소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였고 그후 1923년을 전후하여 도꾜에서 류학하고 돌아왔다.
윤동주는 어릴 때 해환이라고 불리웠고 또 동요를 발표할 때에는 동주(童舟) 혹은 동주(童柱)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윤동주의 형제는 모두 3남 1녀인데 누이 윤혜원(한국 부산에 거주)과 동생 윤일주(한국 성균관대학 교수)외 그 아래로 윤광주가 있었는데 그도 시를 쓰다가 1960년대에 페결핵으로 룡정에서 사망하였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소학교는 당시 동만의 정신기둥이였던 외삼촌 김약연선생이 설립하여 경영하던 규암서숙을 후에 신문호의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던 학교였는데 후에 중학교는 페교되고 윤동주의 재학당시는 소학교뿐이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윤동주는 그 학교에서 조선력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사상교육을 받았다. 명동소학교의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조선력사와 조선어였다. 그리고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러 애국정신을 높였다. 이러한 영향은 윤동주가 연회전문 1학년재학시의 학업성적에도 나타났는데 첫학기밖에 없는 조선어학점(2학기때부터는 일제에 의해 조선어과가 페지되였음)이 연전 재학 4년을 통털어 다른 학과목에서 찾아 볼수 없는 유일한 백점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다시 명동소학교를 함께 다닌 급우로서는 고종사촌 송몽규 그리고 문익환, 외사촌 김정우 등이였다.
1928년 12세인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아이생활》 등 아동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고 이밖에 연극활동을 통하여 문학적 재질과 정서를 닦았다. 그 이듬해 윤동주는 송몽규 등 급우와 함께 벽보비슷한 《새명동》 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하고 동요, 동시 등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1년 3월 25일 윤동주는 15세 나이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20리 남쪽에 있는 달라자(大拉子)에 가서 소학교 6학년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1932년 4월 16세때에 윤동주는 룡정에 있는 은진(恩真)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윤동주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명동에 있는 밭과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에 있는 룡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하여 왔다.
은진중학교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차지하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 학교에서 윤동주에게 크게 영향을 준 선생은 동양사와 국사학문을 가르치던 명의조(名义朝)선생인데 그는 학생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많이 깨우쳐 주었다.

  1934년 《삶과 죽음》, 《초 한대》, 《래일은 없다》 등 시작품을 쓰면서부터윤동주는 자기 작품에다 창작날자를 기록하였다.
1935년 3월부터 윤동주는 룡정 중앙교회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들을가르치다가 그해 9월에 은진중학교로부터 평양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는데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남쪽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 시작품들은 이때에 쓴것이다.

  1936년 신사(神社)참배거부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윤동주는 다시 룡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진입하여 학습하면서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토릭소년》지에 동주(童舟) 라는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 《비자루》 등을 발표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또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구사나》, 《거짓부리》 등 동시들을 발표하였다.
상급학교진학문제로 문학을 지망하는 윤동주는 의학을 지망하는 부친 윤영석과 대립되였으나 조부 윤하연장로와 외삼촘 김약연선생의 중재, 권유로 문과반 진학을 확정지었다. 그때 또 《유언》, 《한단계》, 《풍경》등 수십편의 시작품을 썼다.

  1938년 2월 17일 22세 나이로 윤동주는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연회전문학교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입학하여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송몽규는 은진중학시절 명의조선생의 밀명을 받고 북경, 상해 등지를 다녀옴으로써 일본경찰의 요시찰인으로 지목된적이 있었으며 룡정의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연회전문에서 윤동주와 함께 학습하게 되였는데 일본경찰의 요시찰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윤동주는 연회전문에서 당시 홍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에 근무중인 최현배선생에게서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사사받고 정신적, 사상적인 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리양하 선생에게서는 영시(英诗)를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새로운 길》, 《슬픈 족속》, 《사랑의 전당》, 《이적》, 《아우의 인상화》 등 시작품과 동시 《산울림》, 《고추밭》을 썼다. 첫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때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북부 하기성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9년 23세때 산문 《달을 보다》를 《조선일보》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고 《자화상》, 《달같이》, 《소년》 등의 시작품을 썼다. 이해 가을에 윤동주의 고향집은 룡정의 정안구 제창로 1-20호로 이사를 했다.
1940년 12월에 《병원》, 《위로》, 《팔복》 등 시작품을 썼다.

  1941년 25세때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세는 밤》, 《눈오는 지도》, 《눈감고 간다》,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십수편의 원숙한 시작품을 썼으며 연전문과에서 발행한 《문우(文友)》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하였고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김송집에서 하숙생활을 하다가 9월에 일본인 형사들의 주목을 피하여 정병욱과 함께 북아현동으로 다시 하숙을 옮겼다. 12월 27일 윤동주는 연회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되였다. 일제는 2월부터 강제로 일본식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는데 이해 말 고향집에서는 일제의 탄압과 또한 윤동주가 일본으로 가는 수속의 편리를 위하여 성씨를 히로우마로 창씨개명하였다.

  1942년 윤동주는 26세에 일본에 건너가서 도꾜립교대학(立教大学)영문과에 입학했다.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룡정에 있는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다녀왔다. 고향집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 가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꾜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되면서 교또시 자교구다나까다까겐마찌 27호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다. 이 시절에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등 작품을 썼다.

  이해에 룡정에서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선생이 세상을 떴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공포되고 문과계통대학, 고등학교, 전문학교 재학생들중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은 적격자 및 졸업생에게는 통일적으로 징용령장이 발부되였다.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전에 도꾜대학에서 재학중인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일본경찰에게 체포(7월 14일)되여 도꾜카모가와 (鸭川)경찰서에 구급되였다. 윤동주의 죄명은 일제형사의 심문결과 취조서에 《독립운동》으로 기록되였는데 체포될 때 윤동주는 일본류학기간에 썼던 상당한 분량의 작품과 일기를 몰수 당했다. 일제취조형사의 요구로 윤동주는 유고가 되고만 상당량의 우리 말 원고를 일어로 번역하였다.
도꾜에 있던 당숙 윤영춘과 외사촌 김정우는 옥중의 윤동주와 송몽규를 각기 면회하였다.

  1944년 2월 22일 윤동주는 기소되였는데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결과 《독립운동》이란 죄목으로 2년 언도를 받고 규슈(九州)후꾸오까(福罔)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송몽규도 같은 죄목으로 2년 언도를 받았다.
윤동주는 투옥중 고향집에 부탁하여 차입한 《신약성서》를 옥중에서 읽었다. 투옥된 뒤 고향집으로 보내는 서신은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장씩만 허용되였다.
1945년 고향집으로 매달 초순에 배달되던 엽서가 이해 2월중순까지 도착되지 않았다. 대신 《2월 16일 동주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온것으로 윤동주가 옥사하였음을 알게 되였다.

  부친 윤영석이 고인의 당숙 윤영춘을 대동하고 시체를 인수하러 일본으로 떠난사이에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불련이면 규슈제대(九州帝大)에다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을 기다림.》이라는 내용을 일제가 우편으로 먼저 보냈다는 통지서가 뒤늦게 고향집으로 배달되였다.
일본에 도착한 부친과 당숙은 우선 송몽규부터 면회하였다. 매일과 같이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는 송몽규는 여윌대로 여위여 있었고 다른 청년들과 윤동주도 주사를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규슈제대의 방부제를 사용한(이는 시체해부를 위한것으로 짐작됨.)윤동주의 시신은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였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지 23일만인 3월 10일에 옥사하였다.

  한줌의 재가 된 윤동주의 유해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간도 룡정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에 의해 3월 초순 룡정 동산마루턱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흩날렸다.
이해 단오무렵 묘소에 《시인 윤동주묘지》(诗人尹东柱之幕)》라는 비석을 가족들이 세웠다.

  1947년 2월 16일 정지용, 안병육, 리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서울 소공동 플로워회관에서 윤동주사망 2주년모임을 가졌고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1955년 2월 윤동주사망 10주년을 맞이하여 흩어진 유고를 보완하였는데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2월 16일 연회대학 문과대학 주최로 박영준, 김용호, 정병욱, 최영해, 로천명, 조병화 등 동문, 문단친지 20여명이 모여 윤동주 추도의 모임을 가졌다.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친지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회전문시절 윤동주가 지내던 기숙사앞에 윤동주시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 시비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설계하였다. 1970년 10월 15일부터 1주일간 윤동주사망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고인의 친필유고와 유품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10월 22일 국립중앙도서관 회의실에서 백철, 윤영훈, 문익환, 김정우, 정병욱 등 13인이 참석하여 윤동주추모 좌담회를 가졌다. 그러나 윤동주의 고향사람들은 물론 중국조선족 대부분 사람들은 그의 이름도, 그의 시도 몰랐고 그의 묘소와 력사는 더구나 모르고 지내다 보니 추모활동은 운운할 여지조차 없었다.

  참으로 저항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짧은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1985년 5월 14일 연변대학 권철교수와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교수가 룡정중학교의 원로력사교원 한생철선생의 안내하에 룡정동산에 있는 그리스도공동묘소에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이해 6월에 룡정중학교 사생들과 권철교수, 오무라교수, 윤동주의 친척들이 참가한 추모모임을 늦게나마 가졌고 당시 교장이였던 류기천선생의 노력과 해외의 지원으로 묘소를 다시 수선하였다. 이때로부터 룡정중학교에서는 사회지명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추모활동을 하였으며 12월 30일이면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99년부터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잡지사에서도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동포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윤동주문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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