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걸출한 시인 심련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3:32    조회: 385회    댓글: 0

ls_title_renwu_10.gif


10.jpg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399번지에서 삼척심씨 심은택의 셋째자식(맏아들)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는 강릉일대에서 유명짜한 유학자였고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였으며 삼촌 심우택은 반일단체에 가담했으며 남일, 홍범도, 리동위 등과 어울렸다.

  1924년, 심씨일가는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이사했으며 1931년에 중국 밀산에 건너온후 신안진을 거쳐 1935년에 룡정 길안툰으로 이주했다.
룡정소학교에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 한시기 고민하다가 《큰일 하려면 공부 좀 해야잖겠는가》고 부모님께 속마음을 터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 공부시켜주마!》 하고 씨원하게 대답했다. 하여 련수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다니게 되였다.

  1943년 류학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 가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반일사상과 조선독립의 도리를 깨우쳐준 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나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고향에 돌아와 백보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갔다가 몇 달후 광복을 며칠 앞두고 귀향길에서 그만 27세 꽃나이로 왕청현 춘양역에서 일본병사들에 의해 피살되여 망향의 혼으로 요절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달구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

  심련수의 300여수의 시, 3편의 소설, 200여통의 편지, 300여편의 일기, 1편의 평론, 1편의 기행문을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었다.
일찍 《만선일보》에 다섯수의 시를 발표했던 심련수는 어릴적부터 책벌레여서 아버지한테 엉뎅이를 채우기도 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때 쓴 시들이 빼앗긴 조국과 망국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간정을 담담한 빛갈로 잔잔히 여울치게 쓰면서 언덕이나 시내물, 실향민의 설음과 자연을 감상적이고 애상적으로 썼다면 일본류학시절부터 사망직전까지에 씌여진 시들은 완전히 탈바꿈했다.  시적구조가 보다 복잡해지고 사유공간이 넓어지고 시적포섭량이 많아졌으며 시적시각이 상승시각으로 이전 되였다. 특히 인간적성숙과 예술적성숙을 보여주면서 호방성, 거창성, 모호성 등이 획득된다. 후반기에 보여준 시는 우주의 질서가 잘못되였으니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런 세계적인 눈높이의 시적차원으로 오른다.  

  룡정이 낳은 또 한분의 시인-심련수는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시로 하여 영원히 우리 민족의 문단에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