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류작가 강경애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1:49    조회: 395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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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jpg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조선 황해도 송하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집 머슴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미다 하지 않고 살아온 순박한 농민이였다. 늙으막에 겨우 땅마지기나 얻어 가정을 이루었으나 1909년 겨울에 사망하였다.

  1910년 병약하고 유순한 어머니는 호구지책을 찾아 방황하던 끝에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갔다. 최도감은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 늙은이였고 불구자였기에 강경애의 어머니는 몸종 같은 신세였다. 그런데다가 전처 소생의 아들, 딸이 있어 강경애는 그들의 구박속에서 살았다.
1915년, 강경애는 열살이 지나서야 겨우 자연소학교에 입학하여 온갖 고통속에서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숭의녀학교에 입학하여 친목회독서조에 참가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1923년 봄 장연태생의 도꾜류학생 양주동을 만나 련애하였으며 10월에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 그후 양주동과 함께 서울에 와서 동덕녀학교 3학년에 편입되여 1년간 공부하였다.

  1924년 5월, 양주동이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가마》란 이름은 강경애의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부른 아명이였다. 그해 9월 양주동과 헤여져 언니가 경영하는 장연 서선려관에서 지냈다.
1920년 후반기에 강경애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였는데 문학공부를 하면서 《홍풍야학교》를 개설하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북간도 룡정에 와서 1년 반 정도 강사노릇을 하다가 후에는 무직업으로 생활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룡정에서의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소설 《그 녀자》를 발표했다.

  1925년 11월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했다.
1929년 10월 근우회 장연지회 회원임을 명기하면서 조선일보에 《렴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여 마레주의 관점을 드러냈다.
1930년 11월에 《조선녀성이 밟을 길》이란 시론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뒤를 이어 1931년 1월에 단편소설 《파금》을 발표했고 강악설이란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이라는 양주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무렵 수원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군청에 고원으로 부임한 황해도 홍주사람 장하일이 강경애의 집에 하숙하면서 두사람은 련애를 하게 되였고 결혼까지 하게 되였다. 그러나 장하일의 조혼한 안해가 나타나면서 두사람은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다가 6월에 북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룡정에 온 장하일은 동흥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교도주임으로 사업하면서 반일,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강경애가 쓴 원고의 첫 독자가 되여 읽어보고는 조언을 주군 했다.

  강경애는 1931년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련재하였다. 이때로부터 문단에 정식 등단한 셈이다.
1932년 1월에 수필 《커다란 문제》를 발표하고 6월에 일본군의 간도토벌이 가심화된데다가 또 중이염 때문에 서울에 가서 치료하다가 9월에 다시 룡정으로 와서 수필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를 《동광》지에 발표했다. 그는 손수 물을 긷고 빨래하면서도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했다. 《그 녀자》, 《꽃송이 같은 첫눈》, 《부자》 등 수필을 매달 한편씩 발표했고 룡정을 배경으로 한소설 《채권》, 《축구전》과 중편 《소금》을 발표했다.

  1934년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그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120회로 련재하였다. 이 작품은 1949년에 평양에서, 1992년에 서울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으며 중국과 쏘련에서도 50년대에 번역출판되였다.
강경애는 1936년 룡정에서 안수길, 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회》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북향》잡지와 문학청소년들에게도 관심을 돌렸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력임하다가 약 3년전부터 얻은 신병이 악화되여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가고 장하일도 얼마뒤에 조선으로 갔다.
1944년 4월 26일, 병이 악화되여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하게 되여 한달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1949년, 장하일이 부주필로 있던 《로동신문》사에서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강경애는 25년동안에 장편소설 2부, 중편소설 1부, 단편소설 20편, 평론, 수필 27편, 시 8편을 발표했다.
강경애는 장편소설 《인간문제》에서 인간사회에서는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함으로써 발전할 것입니다.》고 지적하였다.

《인간문제》는 1930년대 조선사회의 정치본질과 계급의 동향을 보여주었으며 로동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을 가송하였다. 하여 《인간문제》는 조선소설문학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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