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투사 안중근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1:03    조회: 18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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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jpg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음력) 조선 황해도 해주읍에서 태여났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후 무함을 받고 서울을 떠나는 부친을 따라 사처로 방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부친의 애국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어릴적부터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큰 뜻을 키웠다. 청년시절 그는 서방의 발달한 문화와 접촉하면서 천주교를 신앙하였고 점차 교육과 과학구국의 도리를 깨닫고 계몽교육사업에 투신하여 나라를 찾으려고 하였다.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으로 이또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년에 조약을 맺어 황제를 페하고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안중근은 가족들과 리별하고 북간도로 들어가 의거를 일으킬것을 작심하였다.
룡정에 온 안중근은 명동에 자리잡고 선바위 뒤골짜기인 팔도하자 만진기에서 땀을 흘리며 무예를 익혔다.

  그러나 여기서도 의병양성이 어렵게 되자 다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반일의병장 리범윤을 만나 함께 《창의회》(倡义会)조직의 이름으로 30만원의 군자금을 모으고 수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지방을 기지로 삼고 1908년부터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조선국내진공전투를 진행하였다. 그는 의병대장 전제덕부대의 우군령장을 맡고 경홍의 고간원과 회령의 신간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의 회령신간원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아 부대는 훼명되였다. 그래도 안중근은 의지를꺾지 않고 1909년 봄, 연추에서 김기렬, 백락길, 박근식, 김태련, 안기린, 리주천 등과 함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와 《을사5적》을 처단키로 맹세하고 《7인단지동맹(七人断指同盟)》을 맺고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써 조선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1909년 10월 21일 오전 8시 55분, 안중근은 큰 뜻을 품고 동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덕순, 유진률과 함께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이튿날 오전 9시에 할빈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려관에서 《장부가》를 썼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또한 영웅이 시대를 만들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날에 업을 이룰가
동풍이 점점 차오르니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연히 한번 갔으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또여
어찌 즐겨 목숨을 구하는가
이에 이를줄 어찌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부터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대한독립 만만세!

  1909년 10월 26일, 아침 일찍 할빈역 대합실에서 긴장한 마음을 달래며 채가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덕순이 성사할 기회를 놓치고 보니 자기밖에 이또 히로부미를 죽일 사람이 없음을 실감한 안중근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또 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위해 룡정 명동에서, 신한촌에서 땀흘려 준비한 일,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하던 일들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오전 9시, 이또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서서히 역구역에 들어서자 플래트홈에서 대기하고 있던 꼬꼬브체브는 차에 올라 이또 히로부미와 수인사를 나눈후 함께 천천히 기차에서 내렸다. 군악이 요란스레 울리는 가운데 1등대합실로 해서 일본인 환영대렬에 끼여 플래트홈에 나온 안중근은 로씨야 명예의병대 뒤에 다가섰다. 오래전부터 사진을 통해 이또 히로부미의 모습을 기억한 안중근은 이또 히로부미가 외국령사단 앞에 이르러 악수를 나누고 되돌아서는 순간 권총을 빼들고 이또 히로부미의 등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땅!》, 《땅!》, 《땅!》 야무진 총소리가 할빈역에 울려퍼졌다. 페와 복부에 세발의 총알을 맞은 이또 히로부미는 힘없이 넘어졌다. 안중근은 불현듯 총맞은 놈이 혹시 이또 히로부미로 변장한 가짜 이또 히로부미이면 대사를 그르친다는 생각이 뇌리를 치자 총구를 뒤따르던 일본놈들에게 돌려대고 련속 세방을 더 쐈다. 하여 할빈주재 일본총령사 가와가미(川上), 궁내부대신 비서관 모리(森),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리사 다나까(田中)가 부상입었다.

  안중근의 총알은 이또 히로부미를 세발이나 명중했는데 한발은 팔을 뚫고 가슴을 뚫고 몸에 박혔으며 두발은 가슴과 복부를 쏘았다. 이또 히로부미는 당장에서 즉살했다.
이또 히로부미를 쏘아눕힌 안중근은 태연하게 품속에 간직했던 태극기를 펼쳐 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안중근은 로씨야헌병에게 체포되여 일본령사관에 인계되였고 려순감옥에 감금되여 갖은 악형과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이또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총잠 겸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군사장으로서 한국침략의 원흉-이또 히로부미를 처형한것이다.》고 떳떳이 말했다.
감옥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으며 전후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썼다.
안중근의사가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인 소식은 나래돋친듯 조선 방방곡곡은 물론 세계에 널리 퍼졌다.

  1910년 4월 16일 영국신문에서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였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또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는 자서전에서 《조선의 영웅 안중근이 일본의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을 다룬 연극 <안중근>을 공연했다. 1938년 <안중근, 이또 히로부미를 죽이다>에서 남편 주은래가 녀자역을 맡았고 나는 남자의 역을 맡았다》고 했다.
중화민국을 창립한 손중산은 《안중근의 공적이 삼한과 만국을 돕고 백세와 춘추에 빛나리라》고 했고 1931년에 일본에서도 《안중근의사》란 연극을 했다.
전 흑룡강성 성장 천레이는 《안중근은 내 맘속에 애국열정의 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항일혁명투쟁에 나선 계기는 안중근을 숭배하고 따라배우는것에서 시작되였다.》고 했다.

안중근은 사형선고후 이런 시를 남겼다.

为国献身 军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一日不读书 口中生荊棘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안중근의사는 조선독립을 기도하며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는 최후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할빈공원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원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가져다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 하며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이다.》
안중근은 32세의 새파란 나이에 민족독립의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을 바쳤다. 이것은 《눈보라 친 연후에야 송백이 기울지 않음을 아느니라》고 한 자작시구의 실현이였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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