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사령 김좌진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50:22    조회: 34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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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jpg  김좌진(金佐镇)은 1889년 11월 24일 조선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의 량반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 김형규는 30여명의 머슴을 두고 있었고 2000여쌍의 땅을 가지고 있은 갈산리의 갑부였다.

  김좌진은 5세때부터 마을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손자병법》, 《륙도삼략》 등 병서들을 남달리 즐겨 읽었다.
조선이 실제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후 김좌진은 기울어진 국운을 한탄하면서 부패무능한 통치계급과 량반세력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나라를 구하려면 오직 봉건등급차별을 없애고 민중이 일심단결 하여야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 있는 노비와 머슴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죄다 해방시켰다.
1906년에는 80여간이나 되는 집에 《홍명학교》를 꾸리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부근마을 자녀들을 받아들여 근대지식과 반일사상을 전수하였다. 그는 직접 교장을 담임하고 교수도 하였으며 자력갱생으로 2000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400여그루의 감나무를 가꾸어 학교경비에 썼다. 그래서 홍명학교는 충청남도에서도 이름난 학교로 되였다.

  1908년에는 서울에 가서 《대한협회》에 가입하고 선후로 《황성신문》의 리사, 경성고아원의 총무 등 직을 담당하고 로백린, 안창호 등 반일운동가들과 손잡고 반일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서울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군사훈련을 받았다. 그후 리동휘 등과 서북학회를 운영하면서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있었다. 그는 또 안창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에게 반일민족사상을 주입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한합병조약》이 체결되였다. 이에 애국지사들은 분분히 나라를 찾으려면 무장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군사가인 로백린 등은 중국 동북부에 가서 군사기지를 창설하고 김좌진은 남아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중국에 간 로백린이 급히 10만원이 수요된다니 김좌진은 모아둔 3만원에다 자기 집의 부동산을 2만원에 팔았으나 5만원밖에 안되였다. 그는 먼 친척되는 부호 김종근한테 5만원을 부조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결이 난 김좌진은 우격다짐으로 뺏으려다가 김종근 가족들이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당장에서 체포되여 《강도죄》로 2년 6개월의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다.

  1913년 9월말, 감옥에서 나온 김좌진은 반일의지를 꺾지 않고 또 다시 군사자금을 모았으며 1916년에는 채기중 등이 핵심이 되여 조직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7년 8월, 광복단에서는 상해에서 권총 13자루와 탄알 650여발을 구입해가지고 13명의 결사대원을 조직하여 강경한 수단으로 친일부호와 일본인들에게서 조국광복을 위한 자금을 탈취하였다. 조선 각지에서 친일분자와 일본인부호들이 총탄에 쓰러졌다는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되고 친일분자들이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되자 일본경찰과 헌병대는 총동원하여 광복단 결사대의 활동을 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광복단 결사대원들은 신출귀몰하면서 11명의 친일부호들을 암살하고 자금을 모아 가져갔다. 악에 받친 일경과 경찰들은 백색테로를 실시하고 광복단에 대한 추적을 강화하였다. 하여 채기중, 김순화, 김세규 등 골간들이 일경에게 체포되였다. 더는 국내에서 반일활동을 하기 어렵게 된 김좌진은 1917년 11월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였다.

  김좌진은 길림에 도착하여 대종교에 가입하고 려준, 조소앙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건립하고 군무를 관리하였다. 1919년초 려준 등 39명과 함께《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혈전으로 독립을 이룩한다》는 무장투쟁방침을 천명하였다. 그해 8월에 왕청현에 나와 서일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하고 12월에는 서일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건립하였다. 그는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사업하면서 리장녕, 김혁, 김규식, 라종소 등 한말장교들을 초빙하여 사관련성소를 설치한뒤 소장을 겸임하고 엄격한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으로 수백명의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1920년 9월 9일, 사관련성소에서는 제1기졸업생 298명을 사회에 진출시켜 북로군정서의 무장력량을 더 강화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지휘하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는 10월에 비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구실로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2만여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연변에서 활약하는 조선족반일부대를 사면으로 포위하고 토벌하였다.

  김좌진은 600여명의 교성대를 앞세우고 간고한 행군을 하여 삼도구 송월평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일군 19사단 73련대의 추격을 받게 되자 김좌진은 대오를 이끌고 청산리협곡으로 들어가 행군하였다. 적들은 그들은 바싹 추격하였다. 김좌진은 강파로운 산비탈에 교성대를 배치하고 있다가 적들이 사격권안에 들어오자 집중사격을 하였다. 30분가량 사격하던 교성대는 로령방향으로 철퇴하는것처럼 하다가 주력부대를 따라 갑산촌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그런줄은 모르고 오후 2시까지 로령방향으로 추격하다가 헛물만 켰다. 이것이 백운평전투이다. 22일, 북로군정서군은 천수평을 기습하여 일본기병 1개 소대를 요정냈고 어랑촌서쪽 약계골에서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일본 기병 27련대의 주력과 싸웠다. 오후 2시경에는 홍범도부대가 이곳에서 싸웠고 맹개골, 천보산, 대금창 등지에서도 수차의 전투를 하여 적들을 타격하였다.
이번 청산리전역에서 김좌진부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침략군을 기동적이고 령활한 유격전으로 유력하게 타격하였다. 청산리전역에 대한 보도는 《길창일보》, 《독립신문》 등을 통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에 따라 김좌진장군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후 북로군정서는 김좌진의 지휘하에 북상하여 라자구, 동녕현 일대로부터 북상한 서일, 현천묵이 지휘하던 북로군정서 동북전선부대와 기타 반일부대와 합류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로씨야로 철퇴하였다.
1922년에는 《성동사관학교》를 꾸려 군사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25년 3월에는 《신민부》를 건립하고 군사부장 겸 무장대 사령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무정부주의동맹과 합작하여 《한족총련합회》를 건립하고 민중의 실업발전과 교육보급을 위한 자치로선을 집행하면서 해림현 산시에다 수십쌍의 황무지를 조차하고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6월, 과거의 부하였던 백상설에게 의례정미소에서 암해되였다. 향년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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