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8:35    조회: 1,19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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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jpg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이것은 이 땅에 포연히 자욱했던 항일전쟁년대에 조선의용군이 부르던 군가이다. 조선의용군 사령원이였던 무정(본 이름은 김무정)동지는 이 군가를 부르기 좋아했다.
무정동지는 1905년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탄생하였다. 청소년시절에 그는 서울에서 공부했는데 서울기독교중학교를 졸업했다. 가정이 곤궁했던탓으로 그는 학비를 물지 못하여 학교에서 쫓겨난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일제침략자들의 압박과 착취하에 헐벗고 굶주리며 고역에 시달리는 서울시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그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겨주었고 혁명의 길에 올라 일본침략자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자기의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했다.

  배움과 혁명의 길을 찾아 그는 중국대혁명전에 북경으로 왔으며 1924년에 보정군관한교(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에 그는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상해에 와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에서 사업하였다.

  상해에는 그때 인성학교라는 조선인소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는 해마다 운동회를 열었었다. 운동회때면 학부형이고 아니고를 물론하고 상해에 사는 조선인들은 모두다 모여와 명절을 쇠듯 떠들썩하였다. 녀성들은 울긋불긋한 치마저고리까지 입고나선지라 그야말로 상해거리에서 민족적이채를 돋구었다. 운동회때면 무정동지도 참가하였다. 그때 상해의 조선인들가운데는 여러 정치파벌이 있었는데 이런 모임때면 각 파벌 사람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어느 한 정치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이 운동회에 참가한 무정동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했다. 그 소리를 직방 귀에 듣게 되였던 무정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그자들에게 달려들어 손에 들었던 사꾸라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조기였다. 무정의 성미와 사꾸라몽둥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야 말았다. 무정동지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사꾸라몽둥이를 짚고 다니는데 습과되였었다. 인성학교에서의 사꾸라몽둥이질이 있은후 상해거리에서는 아무도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사꾸라몽둥이를 버리고 서금에 가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한 무정은 팽덕회의 수하에서 사업하였다. 팽덕회가 전위서기로 있은 홍군 제3군단에서는 1930년 7월말에 묘략으로 동정호반의 악주를 점령했다. 그러자 동정호에 정박한 미, 영, 일 제국주의군함은 대안에 있는 악주성을 미친듯이 포격하였다. 무정은 적개심에 불탔다. 그는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반격할 자기의 심산을 말했다. 팽덕회는 그의 의견을 찬성하고 솜씨를 보이라고 격려해주었다. 당시 무정의 수중엔 야전포 4문에 산포 2문이 있었다. 이 대포들은 홍군이 악주를 점령할 때 놈들이 버리고 간것이였다.

  무정은 그때 홍군패장이였다. 그는 전사들을 데리고 로획한 대포를 은페지에 옮겨다 걸어놓았다. 무정은 전사들에게 포사격의 요령을 통속적으로 설명한 다음 포에 장탄하였다. 박근해오는 적함을 겨누고 사격하자 적함에서는 불길이 일었다. 그것을 보자 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하고 구호를 웨쳤다. 홍군의 사기는 더없이 충전하였다. 20여발을 쏘아 10여척의 군함을 명중하자 놀란 외국놈들은 다시 덤비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무정의 이름은 전 홍군에 알려졌고 조선인이 홍군에 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이때 홍군에서 대포를 쓸줄 아는 사람은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다.

  홍군은 악주를 점령한 닷새후에 그곳을 떠나면서 야전포는 폭파해버리고 산포 2문만을 가지고 갔다. 홍군은 장정때에도 그것을 갖고 다니며 쏘다가 적수하를 도하할 때 물에 처넣었다.

  1934년 10월에 중국로농홍군은 2만 5천리장정을 시작하였다. 무정은 홍군 제3군단에서 팽덕회를 따라 장정길에 올랐다. 대도하를 건너고 설산을 넘은 다음 파서에 이르렀을 때였다. 홍군 제4방면군의 장국도는 총지휘부의 진창호 등과 야합하여 무전암호를 거두어 들이였다. 그것은 군과군, 각 군과 모택동동지와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 병력의 우세를 리용하여 홍군 제3군단을 핍박함으로써 남진시키려는 것이였다. 이것은 모략이였다. 장국도의 이 모략을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군단과 무전련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자면 홍군 제3군단에서는 송신기를 마련해야 했고 무전암호를 만들어 홍군 제1군단에 보내주어야 했다. 팽덕회는 이 무전암호를 홍군 제1군단에 가져가는 중요한 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망망한 초원에는 길잡이도 없고 길을 물어볼데도 없었다. 어디가 아계인지 어떻게 알아내랴? 무정은 지나침을 들고 북으로 북으로 달리였다. 그는 물을 찾아 전진했다. 부대는 물을 마셔야 하니까! 그는 물구뎅이 곁에서 밥지은 자리를 찾아내며 걸었다. 풀섶에서 풀무데기를 발견했다. 헤치고보니 한 홍군전사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동지들이 풀을 뜯어서 그 전사의 시체를 묻고 갔던 것이였다. 거수경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는 무정의 두볼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산과 초지에서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쓰러졌던가! 그런데 지금 내부가 좀이 생기다니! 그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앞에 문득 가마후렁 하나가 나타났다. 손을 대보니 약간 따스했다. 밥지어 먹은지 오래지 않았다. 무정은 걸음을 재우쳤다. 그는 끝내 언덕을 넘어 제1군단의 대오를 따라잡고 무전암호표를 넘겨주었다. 그들은 곧 수신기를 꺼내놓고 무전을 받았다.

  《림표, 섭영진: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군단은 원지에서 대기할 것.》
모택동동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제3군단까지 찾아와 전문을 발송했던 것이다. 무정은 그 무전암호에 의해 전문이 번역되는 것을 보고서야 희열을 느끼며 돌아섰다.
홍군은 아계를 지나 백룡강량안의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인 랍자구의 천험을 굳은 의지력과 드높은 기개로 영용하게 정복해 나갔다. 무정동지는 홍군 제3군단의 전위서기인 팽덕회동지의 조수역할을 했다. 그들의 부대는 국민당군대의 포위토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부대는 포위를 돌파하여야만 했다. 추격해오던 국민당군대에서는 무정동지의 등뒤에 대고 《큰놈이다, 사로잡아라!》 하고 웨치였다. 거기는 밭이였다. 무정동지는 앞으로 내뛰다가 그만 짚신이 벗겨졌다. 무정동지는 앞으로 뛰자니 발목이 매달린 짚신이 거치장스러웠고 그것을 풀어버리자니 지척에 적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망설이며 앞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데 쫓아오던 적병이 앞으로 엎어지며 무정의 발목에 달린 짚신을 쥐고 잡아 당기였다. 무정은 마음을 도슬러 먹고 권총으로 그자를 쏴죽이고 위험에서 벗어났다.

  중앙홍군에는 조선인이 10여명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장정에 참가했다.
장정도중 홍군에서는 로획한 국민당비행기로 삐라를 뿌린 일이 있는데 그 사람은 조선인이였다. 그러나 장정도중 조선인전사들은 거의 희생되고 최후로 섬북까지 도착한 사람은 양림, 무정 두 동지뿐이였다.
1936년 2월에 홍군은 당주앙과 모주석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위대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동정항일을 시작하였다. 양림, 무정 두 동지도 동정항일에 참가했다.
홍군동정부대는 모주석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팽덕회동지가 지휘했다. 황하를 무사히 건너는 것이 관건이였다. 한달동안의 준비를 거쳐 적정을 자세히 정찰한 다음 두곳의 도하지점을 정하고 배를 준비하며 사공들에게 정치사상교육을 하는 등 많은 준비사업을 했는데 무정동지는 용감하고 민첩하게 정찰공작을 하여 팽덕회동지의 좋은 조수가 되였다.

  홍군 제15군단 75사의 참모장이였던 양림동지가 상급의 지시에 따라 소속 223퇀 1영을 인솔하고 황하를 건너는 선봉이 되였는데 도하작전중 무정은 양림동지의 좋은 참모로 되였다.
양림동지는 도하임무를 완수하고 홍군주력군과 모주석의 도하를 담보한 다음 등륙지점인 하가요를 떠나 적들의 종심진지를 향해 돌격할 때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이렇게 되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으로는 무정동지 한사람만이 남게 되였다. 그는 또 연안에 와 사업하게 된 첫번째 조선인이였다.

  연안에 와 혁명사업을 하게 된 두번째 조선인은 리휘이다. 그는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서안사변직전에 서안에 파견되였다.
서안에서 리휘는 장학량장군수하의 군관이 되였으며 장개석을 붙잡는 서안사변에 기여한 유일한 조신인이였다. 서안사변후 리휘는 신문에 《나의 고향 고려》라는 글을 발표했다.

  연안으로부터 리휘에게 사태가 위급하니 신속이 몸을 연안으로 피할것을 지시해왔다. 그는 1937년 1월에 서안을 빠져 연안남쪽 운향에 옮겨갔다. 운향에는 팽덕회동지가 지휘하는 부대가 있었다. 양상곤동지가 리휘를 접견했다. 그후 양상곤동지는 리휘에게 훌륭한 조선동지를 만나보라는 전화를 걸었다. 이윽하여 솜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리휘앞에 나타났다. 양상곤동지의 소개로 인사한 다음 그들은 접대실에 가서 오랫동안 담화를 했다. 리휘동지는 그때 나이가 21살이였다. 오래간만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혁명의 선배 조선동지를 만나게 되니 그에게 경례를 붙이는 리휘의 손은 떨렸다. 리휘의 가슴속에서는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사품쳤다. 무정은 경례를 받을 대신 그 청년을 포옹하였다. 무정동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고 조선의 정화, 조선인들의 살림형편, 국민당구역에 있는 조선인들의 정황에 대해 물었으며 한위건 등 동지들의 정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리휘는 처음에 그를 양림동지로 생각했다. 그는 보고식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무정동지에게 죄다 말씀드렸다. 이윽고 무정동지는 홍군에 대해 그에게 소개해주었으며 2만 5천리장정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의 이야기를 비장하게 말해주었다. 《2만 5천리장정도 이겨낸 삐스티(양림)는 가석하게도 황하도하작전후에 희생되였습니다.》 하고는 눈물을 흘리였다. 리휘는 그제야 그가 양림동지가 아니라 무정동지 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무정동지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많은 것을 처음으로 만난 이 조선청년에게 피력했다.

  《우리는 많은 조선청년을 홍군근거지로 끌어들여야 하오. 홍군은 하나의 혁명대학이요. 그들은 이 혁명대학에 와서 혁명리론을 배우고 군사리론과 군사기술을 배워야 하오. 앞으로 조선을 일본침략자들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고 자유, 민주의 공화국을 건립하자면 우리에게 혁명적골간이 있어야 하고 군사기술이 있어야 하오. 이런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겠소? 아니요, 우리 조선사람의 손으로 창조하여야 하오. 그러자면 우리는 인재를 양성해야 하오. 우리는 화북에서 류랑하고 있는 조선청년들을 여기에 불러들여야 하고 동북과 화중, 화남에서 방황하는 조선청년들을 여기에 불러들여야 하며 조선에 있는 지향있는 청년들을 불러들여야 하오. 그러자면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아야 하고 홍군과 어깨겯고 싸워야 하오. 중국사람들은 꼭 중국을 일본침략자의 마수에서 구해내고야 말것이요. 중국혁명에 가담하는 것은 중국을 구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력량을 키워 앞으로 조선을 해방시키려는 것이요.》

  리휘는 무정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나고 앞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무정의 말은 원칙성이 있었고 원견성이 있었으며 현실성이 있었다. 그의 말은 후에 많은 부분에서 실현되였다. 리휘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정률성이 연안에 왔으며 뒤이어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팔로군이 창설한 혁명근거지로 찾아왔다.

  무정동지가 그해 락천으로 갔을 때이다. 115사에 배치되여 정치부에서 사업하고 있던 리휘동지가 이때 적후에 있는 한일래라는 조선청년에게서 받은 여러통의 편지내용을 무정에게 알려주었다. 한일래는 신문에서 리휘의 글을 보고 리휘가 근거지에 온 것을 알고 편지를 썼던것이다. 그 편지에는 조선청년들의 많은 정황이 씌여져 있었다. 항일과 혁명을 갈망하는 많은 조선청년들의 의향이 반영되여 있었으며 혁명하려하나 갈곳을 몰라 방황하고 번민하는 정황도 씌여져 있었다. 그 편지에서 많은 정황을 알게 된 무정동지는 광범한 조선청년들에게 항일을 호소하고 혁명을 호소하며 군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런 목적에 도달하자면 피끓는 조선혁명청년들은 홍군근거지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는 련명신을 발표하자고 건의했다. 토의끝에 무정, 진광화, 성치백, 리휘 등 동지들이 신문에다 상술한 내용의 련명신을 발표했다.

  무정동지는 홍군대학에서 특과영 영장을 맡았으며 포병사수를 양성하였다.
1937년 8월 25일, 중국로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무정은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주덕과 팽덕회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 그는 성급하고 과격했지만 군인으로서의 강의한 의지력도 갖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대도 뚫고 나간다는 강철 같은 의지가 있었기에 팽덕회는 그를 믿어주었던 것이다.
평시 무정은 라서경과 같이 주숙했다. 라서경은 조선인에 대해 깊은 료해가 있었다. 라서경의 입당보증인도 조선인이였다. 무정은 팽덕회의 주선으로 결혼했다. 무정의 안해는 직속포병퇀에서 지도원으로 있었다.

  1937년말에 무정동지는 부대를 거느리고 진서남 림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팔로군은 《독립자주적으로 산지유격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본침략군과 유격전쟁을 진행하였다. 항일전쟁형세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부에서는 무정동지에게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에다가 평양, 평요 일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총부직속 유격제2대를 접수하여 포병퇀을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량자를 합친후 총인원이 1000명에 달했는데 6개 련을 편성하고 그밖에 또 기관과 관통대 및 선전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포병퇀은 우리 군대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포병퇀이였다.

  팔로군총부에서는 무정동지를 퇀장으로 임명하고 구창선동지를 정치위원으로, 원극동지를 정치처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워낙 구창선동지는 총부 특무퇀 퇀장이였으며 원극동지는 총부직속 유격제2지대의 지대장이였다. 포병퇀에는 그밖에도 참모처와 관리처가 있었다.

  1938년 1월 28일, 림분부근의 류촌과 와구지간의 한 광장에서 성대한 대회를 열고 포병퇀의 건립을 정식으로 선고하였다. 이날 지방각급조직에서 사람을 조직하여 대회에 참가시켰으며 당시 팔로군과 통일전선을 맺고 있은 국민당 제2전구 사령장관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하여 축하를 표시했다. 대회에서는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동지가 포병퇀의 세 지도자에 대한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했다. 중공중앙북방국책임자 양상곤동지도 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드렸고 항일구국 10대강령을 랑독하였다. 그 다음 양상곤동지는 일체 곤난을 극복하고 문화를 잘 학습하고 포병기술을 잘 련마하며 간부를 잘 양성하고 우리 당, 우리 군대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발양하여 신속히 군사훈련고조를 일으키며 하루속히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나가며 항일전쟁의 전면적승리를 취득하기 위해 힘을 다할것을 전 퇀의 지휘원과 전투원들에게 호소하였다. 대회가 끝난후 무정동지의 제의에 의해 포병퇀의 명의로 전국에 팔로군 포병퇀의 건립을 알리는 통전을 냈는데 사전에 팔로군총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통전을 내였기에 상급의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포병퇀건립과 정중의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포병퇀이 건립된후 곤난이 막심하였다. 홍군시기에 비록 포병은 있었지만 장정중 환경이 긴장하고 또 포탄이 없이 적수하반에서 몇문 안되는 산포와 박격포를 강에 던져버리고 말았었다. 섬북에 도착한 다음 거의 적수공원으로 다시 포병부대를 건립했다. 1936년 홍군이 황하를 건너 동정할 때 중양현경내의 석구전역에서 산포 4문을 로획했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여 염석산부대가 대동에서 패전할 때 많은 대포를 강물속에 던져버렸었는데 팔로군이 대현으로 들어갔을 때 호타하 물속에서 대포 11문을 건져내였다. 그것들을 큰 마차로 림분, 찰식으로 운반해오고 또 섬북까지 실어왔다. 그후 평형관전역승리후에 팔로군이 왜놈들 손에서 노새와 말, 큰 마차를 로획한데다가 염석산이 공산당의 통일전선의 감화를 받아 약간의 안장과 피혁을 증송한데서 얼마간의 물질적기초가 있게 되였다. 그러나 포병부대건설에 수요되는 기자재는 매우 결핍했었다. 무정은 군중을 발동하여 방법을 생각해내게 하고 되도록 자체의 손으로 해결하게 했다. 당시 관통대에 시급히 수요되는 트랜싯(경위의)포대경, 측원경을 림분에서는 해결할수 없었으므로 주은래동지가 무한팔로군판사처에서 통일전선관계를 통하여 구매하는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포병퇀이 건립된지 얼마 안되여 구창선 정치위원이 무한까지 가서 이런 중요한 기자재들을 운반해왔다.

  장비가 부족한외 간부와 기술골간도 결핍하였다. 당시 팔로군은 발전시기였으므로 우에서 간부를 보내줄것을 바랄수도 없었거니와 또 우에는 포병간부가 근본상 없었던 것이다. 자기의 손으로 포병인재를 양성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 퇀 인원의 대부분이 분양, 고의, 평요 일대에서 온 농민들이였고 동포선, 평한선, 롱해선에서 온 10여명의 로동자와 약간의 청년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포는 고사하고 총 쓸줄도 잘 몰랐던 것이다. 게다기 대부분 청년들은 단순한 항일열정에 타번질뿐 공산당, 팔로군의 종지와 혁명도리에 대한 지식도 매우 천박하였다. 무정동지는 간부를 양성해내기 위해 계획있게 정치사상교육을 진행한 기초우에서 제4련을 전문적으로 간부를 양성하는 련으로 삼고 각 련에서 우수한 골간을 뽑아다가 단기훈련반을 열었다. 훈련반을 나온 동지들은 련에 돌아가면 기술골간으로 되였는데 중요한 령도직무를 맡았다. 이리하여 당시의 긴급한 수요를 해결했을 뿐만아니라 그후의 포병발전을 위해 인재를 준비하였다. 오늘날 중국인민해방군 여러 포병부대의 책임적 지위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고위급지휘원들 가운데는 그때 이 훈련반에서 양성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때 몸소 강의를 맡은 무정동지는 련과 패의 간부를 집중하여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그들을 데리고 사격원리를 더듬어 내였으며 그들에게 포를 조종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사람이 많고 포가 적은 정황하에서 사람은 쉬여도 포를 쉬우지 않는 방법을 취한데서 과거에 포를 본적도 없는 전사들은 신속히 기술을 장악할수 있게 되였다.

  1938년 2월에 일본침략군은 태원을 침점한후 계속하여 진남을 침범하였다. 포병퇀은 상급의 명령에 의해 연안을 거쳐 락천에 가서 정돈훈련을 하였다. 그때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 동지가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주은래동지는 짧디짧은 시일내에 각 방면의 사업이 빠른 궤도에 오르고 성적이 있다고 치하하였다. 그리고 동필무, 하룡 등 동지와 리공박선생도 포병퇀에 와서 시찰하고 격려해 주었다. 상급지도자들이 돌려주는 이와 같은 배려는 포병퇀 정돈훈련에 커다란 추동력으로 되였다. 정돈훈련을 거쳐 4,5월간에 황하를 건너 중양현에서 129사와 배합하여 한차례의 전투세례를 받았고 일본침략군이 섬감녕변구에 침입했을 때 4련, 9련, 관통대의 일부를 보내여 황하가의 미가천에 포진지를 수축하고 변구를 보위하는 임무를 짊어졌다.

  1939년초, 포병퇀건립 첫돐에 즈음하여 모주석께서는 《동무들은 정치군사학과 과학기술과의 학습에 노력하여 항일전쟁가운데서 주력병퇀으로 되여야 하며 싸우면 이기고 치면 성과를 얻는 목적에 도달하여 민족을 위해 영광을 따내고 팔로군을 위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라는 제사를 써주시였다.
1939년 2월중순에 무정동지는 팔로군총부의 지시에 의해 3련, 4련, 관통대를 거느리고 락천에서 삼원으로 간후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황하를 건넌 다음 진동남에 가서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1940년에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이 일어났다. 4월 22일에 총부 포병퇀의 대부분은 정태선전역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좇아 포병퇀을 인솔하여 진동남에 이른 무정동지는 전사들을 인솔하여 될수록 적진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들어가 포를 걸어놓고는 사격을 지휘함으로써 적의 또치까를 백발백중으로 격파하여 보병들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격로를 열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항일전쟁중에서 포병퇀은 전투의 세례를 받았고 끊임없이 발전장성 되였던것이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동지는 당중앙의 지시에 좇아 관내 여러지방에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항일단체들의 통일과 련합에 대한 지도사업을 맡아 나섰다. 1941년 1월 10일, 기열로군구 태항산분구 동욕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가 건립되였는데 무정, 진광화가 각기 회장, 부회장을 책임지고 구체적인 조직령도사업은 진광화가 책임졌다. 그해 7월 9일에는 총회 섬감녕변구지회가 연안에서 건립되였다. 무정동지는 그때 총회회장의 신분으로 연설을 했다.

  1942년말에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임명된 무정동지는 태항산에 가서 하북조선혁명군사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겸임하였다.
1945년 7월말에 연안팔로군총부에서는 무정사령원을 불렀다. 그는 장년에서 비행기를 타고 연안으로 갔다. 그때 그는 많은 중대한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8월 1일에 열린 연안포병학교의 개교식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연안총부 제6호명령을 내렸다. 무정동지는 이 명령에 좇아 즉시 화북과 화중의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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