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義士)리봉창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7:24    조회: 30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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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jpg  리봉창(李奉昌, 1900-1932)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 원효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리진규(李镇奎)는 본래 수원에서 농사에 종사하였는데 토지가 철도부근에 붙어있었던 관계로 농지를 일본놈들에게 빼앗기고 용산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리봉창은 가정이 빈한하여 10살되던 해에야 비로소 용산 문창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꾸리는 과자점에 들어가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살때에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의 고용원으로 들어갔다. 그뒤 퇴사하여 1923년 11월에 형 리룡태(李龙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는 일본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 민심이 불안정하였고 일본정부에서는 류언비어를 산포하여 동요되고 있는 민심을 조선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돌려놓던 때였다. 그리하여 리봉창형제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생활의 터전을 잃었고 적국의 로동시장에 들어가서라도 생계를 유지해보려고 현해탄을 건넜으나 일본에 가서도 마음놓고 생활할수 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 형제는 도꾜와 오사까 등지를 류랑하면서 6~7년이나 불안정한 생활을 하였다.

  리봉창은 천성이 내성적이고 온화한 사람이라 가슴속에는 나라와 민족을위한 대의와 일편단심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조금도 다른 기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를 양자로 삼으려 하였고 딸을 주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리봉창은 여러가지 리유로 이러한 요구들을 회피하면서 오직 때가 되기만을 기다리였다.

  1931년 1월중순, 리봉창은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왔다. 그리고는 곧 상해에 설치되여 있는 대한민국림시정부를 찾았다. 림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은 그의 비범한 모습을 보고 잠시 부근의 려관에 투숙하게 한 뒤 때때로 그를 찾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중 폭탄만 있으면 일본천황을 구중천에 날려보내겠다는 리봉창의 속심의 계획을 알게 되였다. 김구선생이 생각하건대 이는 안중근의 뒤를 이어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할수 있는 훌륭한 계획이였다. 그리하여 리봉창의 이 계획을 채택하기로 최후로 결정하고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김구선생이 준비사업을 하는동안 리봉창은 일본인의 거주지역에 가서 양수포(杨橱浦)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들어가 고용살이도 하고 악기상점에 들어가 점원으로도 있었다. 그러면서 몇 달에 한번씩 비밀리에 김구선생을 만나 준비사업의 진전을 탐문하였다.

  1931년 12월, 드디여 준비사업이 끝났다. 13일 그는 정식으로 김구선생이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천황을 암살할것을 장엄하게 선서한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시에 그는 김구선생한테서 사업자금과 폭탄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그들 두사람은 세밀한 작전방안을 세웠다.

  일본인들의 신임을 깊이 받고 있는 리봉창은 비록 폭탄을 지닌 몸이였지만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고 무난히 상해에서 기선에 올라 다시 일본 도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한 려관방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한 신문에서 올해에서 1월 8일에 요요끼륙 군련병장에서 일본천황이 매년 거행하는 년중의식의 하나인 열병식을 거행한다는 기사를 보게 되였다. 그는 곧 김구선생에게 《상품은 1월 8일에 팔아버리겠으니 안심하소서》라는 전보문을 보내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1932년 1월 8일, 리봉창은 아침부터 행인으로 꾸미고 사꾸라다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요요끼륙군련병장에서 검열을 마치고 오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오전 11시경이 되자 일본천황의 행렬이 사꾸라다문앞에 당도하였다. 리봉창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폭탄 두덩이를 일본천황이 탄 마차앞에 던졌다. 폭탄 한덩이는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터졌으나 한덩이는 불발탄이였다. 말을 타고 가던 근위병 두놈이 거꾸러졌다. 그러나 파편 하나가 천황의 옷깃을 스쳤을뿐 천황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만하여도 이 의거는 성공한 셈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리봉창의사가 던진 폭탄은 천황을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정신적으로 죽인것이나 다름이 없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일이 터지자 세계의 여론계는 떠들썩하였고 일본사회도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일본정계에서도 법석을 떨었다. 총리대신 이누가이 이하 전체 각료들은 총사직을 해야 하였다.
동년 10월 10일, 리봉창의사는 의젓한 모습으로 적의 교수대에 올라 결연히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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