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배의 어버이 최창호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4:12:12    조회: 69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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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을 다녀간 사람들치고 사과배를 모를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다. 해마다 5월초순이면 사과배꽃이 만발하는 연변대지는 곳곳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른듯 이르는 곳마다 가관을 이룬다. 연변의 특산물인 사과배는 알이 굵고 맛이 시원하며 만만한것이 특징적이다. 1993년부터 해마다 사과배축제를 열고있다. 그렇다면 사과배를 육성해낸이는 누구겠는가?



이주와 창업

  100여년전의 일이다. 조선 함경북도 경서군 주남면 룡정동의 청빈한 선비 최병일(崔秉义)선생은 장자 최창호(崔昌虎,1897-1967년)를 보았다.
1909년, 일제침략자들의 손아귀에 쥐여진 조선 리씨왕조의 운명이 바야흐로 칠성판에 오르고있을무렵, 최병일은 조용한 은거생활을 동경하여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중국 길림성경내의 안도현 내두산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 봄에 다시 자리를 옮겨앉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룡정시 도원향 소기촌이다.
그때만해도 도원향과 로두구진이 차지하고있는 벌판은 잡목림이 무성한 황무지였는데 다만 몇몇 살림집들이 띠염띠염 널려있을 뿐이였다.

  소기촌은 로두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남쪽으로 10여리 뻗은 골짜기에 들어가 위치해있었다. 골짜기는 가운데로 내물이 흐르고 좌우 량켠 안쪽은 펑퍼짐하나 바깥쪽은 경사진 언덕받이가 그리 높지않은 산마루에 잇닿아있어 그 지형이 버치모양 같다하여 시초에는 《버치골》로 불리워졌는데 동쪽고개를 사이두고있는 《큰 버치골》과 대응하여 《작은 버치골》로 불리웠고 후에 와서 그 뜻이 한자로 적혀져서 지명이 《소기》(小其)로 굳어져버렸다.

  최창호네 일가가 소기촌에 이주한 때는 이곳에 밭 한뙈기도 없었다. 인가라곤 오직 부르하통하에서 가까운 골짜기어구에 초막 한채가 있었을뿐이다. 그것은 소기골을 차지한 중국인 《점산호》(占山户)가 파견한 황산을 지키는 순시원의 림시거처였다. 몇백년간 고이 잠자던 소기골에는 최창호일가가 와서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인가가 있게 되였다.

  그때 최창호는 방금 약관지년(弱冠之年)에 들어선 열혈청년이였다. 그는 할아버지가 강동 (지금의 로씨야 원동지구에 속한 연해주)땅에 건너가 금점을 해서 벌어온 돈으로 《점산호》한테서 잡목림과 잡초가 우거진 내가의 평지, 북쪽 경사지와 황산을 합쳐 10여헥타르의 땅을 샀다. 그리고 일가식솔들이 죄다 일떠나 황무지개간에 달라붙었다. 큰 나무는 대밑을 자르고 뿌리를 파냈으며 작은 나무와 잡초는 불태워버린 뒤 괭이로 뚜져 화전을 일구어 첫해농사를 지었다.

  1917년 봄, 최창호는 일가를 총동원하여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샘물터 서북쪽의 지세높고 양지바른 곳에 바깥기둥을 더 세우고 널마루까지 번듯하게 깐 8간집을 지었다.



첫 사과배나무를 육성

  최창호는 무던하기만 한 재래식농민이 아니였다. 한학에 능하고 식견이 넓으며 다방면의 흥취를 가진 그는 수전과 한전 농사외에도 과수원을 꾸리고 양봉업을 벌렸으며 약국을 차려놓고 의사일도 보는 한편 소기골 《광영학교》의 학감으로 교육사업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과수재배와 약용식물재배에 흥취가 컸고 조예도 깊었다.
그의 집 뒤켠은 그리 가파롭지 않은 언덕밭이였다. 창호는 거기서 9600여평방메터 되는 잡목림을 떼내여 개간하였다.

  이 땅은 새로 지은 집에 맞붙어있고 그 웃머리에 잇닿아있는 산등성이에는 여러가지 나무들이 무성하여 천연적인 방풍림을 이루고 있었기에 과수재배에 아주 알맞춤한 곳이였다. 시초에 창호는 산비탈에다 살구, 오얏, 노란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나무를 줄지어 심었다. 당시 돌배나무는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접지》(接枝)하는 침목(砧木)으로 삼았다. 이렇게 과수원을 꾸리기 시작한것은 1918년이며 그때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꾸려졌다.

  1921년에 창호는 동생 최범두(일본제국대학 졸업)가 조선 고향에 다녀올 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배나무가지 6대를 가져오게 했다. 창호는 각지로 돌아다니거나 사람을 띄워 과일묘목과 종류다른 식물종자를 수집하였다. 창호는 동생이 가져온 배나무가지를 보고 보물이나 받아안은것처럼 매우 반가와하면서 김치움에 넣어 잘 보관했다.

  그해 봄 날씨가 따스해지자 창호는 집앞 터전에서 2~3년 자라난 62그루의 돌배나무에 북청의 배나무 가지를 접지(接枝)하였다. 그 시절에는 접목수단이 지금처럼 현대화되지 못하여 짜개진 대목틈에 접지를 꽉 끼워넣고는 수분증발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감자를 저며서 잘리운 대목우에 얹어놓은 뒤 삼오리로 꽁꽁 동여맸다.
5월에 접어들자 북청에서 온 이 《손님》들은 소기골에서 자란 돌배나무의 수분과 양분을 제법 받아들여 새싹이 터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그해 마가을이였다. 최창호는 근 3도의 위도차가 있는 남쪽땅에서 모셔온 이 《손님》들이 북방의 엄한을 견디여낼수 있겠는가를 념려하여 땅이 얼어붙기전에 매 그루마다 물을 흠뻑 주고 마른 풀로 밑부분을 덮고 흙으로 다져서 과동시켰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듬해 봄에 3대가 동상을 입어 죽고 살아남은 3그루마저 가지의 끝부분을 잘라버리니 한해사이에 2자 남짓이 자랐던 과일나무가 접지한 때보다 좀 굵어지고 컸다.

  두번째해 겨울에는 과일나무주위에 짚가리를 조심스레 쌓아두어 과동시켰다. 세번째 해에는 원대만 짚으로 싸고 곁가지들은 삼으로 여러벌 동여서 과동시켰다.
그랬더니 3그루의 새 과일나무는 기본상 동해를 입지 않았고 그 이듬해 봄부터 몰라볼 정도로 쑥쑥 자라났다. 창호는 보다 신심과 희망을 지니고 몇해간 정성들여 과동시켰다.

  6년째 되던 해 봄이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3그루의 새 과일나무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였다. 창호는 못내 기뻐하면서 더욱 알심들여 3그루의 새 과일나무를 보살펴주었다. 그해 가을, 창호네 식구들은 새 과일나무의 열매를 처음으로 맛보게 되였는데 배가 어찌나 큰지 어른들의 주먹만했으며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이 많은 반면 핵이 작았으며 당분과 수분이 많아 입에 넣고 씹으면 스르르 녹아버리는듯하여 그 맛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이 배를 맛보는 사람들마다 일등가는 진품이라고 칭찬이 자자했고 또 그것들의 부본(父本)이 돌배나무이지만 과일은 돌배에 비해 비할바없이 참 좋다는 뜻에서 《참배》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1950년대초까지 줄곧 불리웠다. 1952년에 와서 그 열매의 외모가 사과와 흡사한 특징을 가졌다는데서 《사과배》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이렇게 최창호가 육성해낸 3그루의 과일나무가 사과배나무의 선조로 되였다.



사과배나무의 전파와 보급

  새로운 과일품종인 사과배가 그 품질과 질이 연변지구의 각가지 과일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받게 되자 사과배의 재배도 재빨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몇해사이에 소기골과 로두구 일대에 전파되였다.

  사과배는 새로운 과일품종이여서 재배실천과정에 여러가지 뜻하지 않던 과제가 나타났다. 그때는 과수재배에 관한 기술서적이 전혀없는 형편이였다.
최창호는 오로지 모든것을 자기의 힘과 지혜에 의거하여 실천가운데서 경험을 모색해내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초에 사과배나무는 로두구지방은 물론 세린하의 일신, 문화촌, 광신향의 수남촌에까지 전파되였는데 총면적이 무려 750무나 되였다. 1939년,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경내의 사과배나무의 재배면적은 1770무로 늘어났다.
해방전후, 최창호의 영향을 받아 룡정은 물론 화룡현 등 여러 지방에서 사과배나무재배고조가 일어났다. 《연변의 미츄린》으로 불리워온 최일선로인도 품종개량과 새 품종 육성에 심혈을 몰부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사업했던 주덕해동지는 몸소 룡정시 모아산 남쪽기슭에 만무 사과배기지를 꾸릴 설계를 내놓고 제1선에서 지휘하였다.

  그후부터 40여년간의 노력을 경주하여 사과배수확량을 3.6만톤으로 늘였고 재배기지를 1.3만헥타르로 늘구었다. 그사이 우량종사과배품종을 11가지나 육성해내였고 외지에 600만그루의 묘목을 지원하여 북방 14개 성, 시, 자치구에 사과배나무가 옮겨앉게 하였다. 그중 룡정시의 사과배 재배면적은 6200헥타르로 늘어났고 년간수확고는 2만 6천톤으로 늘어나 아시아에서 제일 큰 사과배생산기지로 되였다.
연변의 사과배는 1991년 전국 과일전시평의에서 《전국상질과일1등》, 《상질록색식료품》, 《배왕》으로 평의되였다. 지금 사과배는 조선, 한국, 로씨야, 싱가포르 등 나라에도 수출되고있으며 인민대회당의 국가연회석에도 오르고있다.

  1950년대초에 국가 해당과학연구부문에서는 사과배의 육성과정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최창호가 육성해낸 3그루의 사과배모수에다 《사과배모수》라는 패쪽을 세워두었다. (최창호는 1967년 8월에 병으로 사망.) 그후 여러가지 정치운동의 세례를 받아 그 패쪽은 없어졌다. 1987년 9월 25일, 룡정시정부에서는 사과배의 공헌을 기념하고저 최창호가 처음 육성해낸 사과배나무앞에 《사과배선조기념비》를 세웠다.

인류에게 재부를 창조해준 발명가들이 후대들 마음속에서 영생하듯이 사과배와 더불어 최창호의 공로도 영원히 전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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