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사(義士) 윤봉길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5:44    조회: 28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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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jpg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원효봉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은애국지사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 고향이다. 윤봉길은 농사군의 아들로 태여났다. 애명은 우의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마을 서당에서 훈장으로 있었다.
우의는 어렸을 때 큰아버지나 동네 어른들에게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들은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라를 위하거나 겨레를 위해 몸바친 충신이 아니면 애국자들의 사적이였다. 그중에서도 고려 5백년의 왕조를 지킨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두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하였다. 또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마치 자기가 그 자리에 같이 있으면서 가슴이 높뛰는듯한 감동을 받았다.

  《알고보니 일본은 력사적으로 우리의 원쑤로구나. 그렇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다. 나도 그분들처럼…》
이렇게 어렸을 때 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 여러가지 감동과 격분, 그리고 싹트기 시작한 애국심과 일제에 대한 증오는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가지 의문이 동반되였다.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호락호락 나라를 빼앗겨야 했을가? 우리에게는 그와 맞서 싸울 힘이 없단 말이가? 왜? 어째서?》

  우의는 보통학교에 입학한후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외에 새로운 의문들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첫째, 선생님들이 금테를 두른 모자와 제복을 입는것쯤은 그대로 넘겨버릴수 있더라도 긴 칼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리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 둘째, 조선인선생님들은 교장이라면 또 몰라도 왜 같은 교원인데 일본인선생님들 앞에서 굽실거리면서 아첨을 해야 하는가? 하는 등이였다. 우의는 도무지 리해할수 없다.

  그러던차 1919년 3월 1일, 기미년만세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우의는 교실에서 조선인선생님을 모시고 조선말을 배우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일본인교장이 나타나 지금 만세사건이 터졌으니 학생들을 단속하여 곧바로 집에 가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통지가 있을 때까지 휴교를 할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 밖에는 얼씬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일본인교장이 나가자 우의는 곧 조선인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만세를 부르는 것이 왜 나쁩니까?》
이에 선생님은 창밖을 한번 살펴보고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야 나쁠것이 없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서 독립만세를 부르는것이니깐.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거다. 하여간 학교의 방침이니 오늘은 어서 집으로 곧장 돌아가거라.》

  학생들은 뿔뿔이 집으로 돌아갔으나 우의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덕산장터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접 자기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과연 장터에서는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준비를 하였는지 저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잠시후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물론 왜놈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는 조선사람들을 향하여 발사하는 것이였다. 우의는 좀 떨어진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구 쏘아대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치가 떨렸다. 자기가 조금만 더 커도 그 경찰관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우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왜 일본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을 이토록 못살게 굴어요?》
《그건 우리가 힘이 없어 일본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지. 우리는 많이 배워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나라를 도로 찾아야 한다.》
그후 우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다시는 학교로 가지 않았다. 계속 마을의 서당에 다니면서 스스로 책을 구입하여 신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잡지도 청하여 보고 당시 민족의 대변지로 되고 있었던 《동아일보》도 매일 받아 빠짐없이 보았다. 또 한문실력을 닦기 위하여 민족적기개와 정의감이 있는 성주록이라는 선생님을 모시고 한문공부에 노력하였다.

  얼마 안되여 우의는 일약 마을에서 젊은 지도자로 되였다. 무지한 마을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도리를 깨우쳐주기 위하여 자기의 사랑방에 야학을 꾸리면서 활동하였다. 배우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마을의 어른들도 있었고 부인들도 있었으며 어린아이들까지 모여들었다.
우의는 사람들앞에서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농민들입니다. 가진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무식할 따름입니다. 일본인의 억눌림밑에서 살게 된것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저마다 배워서 힘을 기르고 힘을 길러서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그후부터 우의는 한글교과서를 만들기도 하고 부흥원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을의 부흥을 위해 힘쓰게 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애국애족의 계몽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야학에서 학예회를 가지고 노래와 연극을 한 것이 문제로 되여 우의는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연극은 이소프의 우화를 각색한것이였는데 사실 일본침략자들의 야심을 빗대고 폭로한 것이였다. 이로 인하여 우의는 주재소에 불리워갔다. 물론 우의는 곧 풀려났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우의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날카로와졌다. 그런대로 우의는 월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묵묵히 자기의 소신대로 농촌계몽운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서울에서 월간잡지 《시조사》의 기자라고 하는 김태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우의는 혹시 일경 밀정이 아닌가 하고 경각성을 높이면서 공손히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윤성생, 참으로 장하십니다. 이런 농촌에 선생같은 지도자가 있다는것은 이고장뿐만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사람입니다. 실은…》
알고보니 잡지사 기자라 한 것은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한것이였고 사실은 련락원직책을 맡고 있는 한 독립운동가였다. 김태식은 가방속에 숨겨가지고 온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계되는 책을 꺼내놓으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조선민족독립운동의 형편을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리고 중국 상해에 있는 림시정부의 내막이며 림시정부 주석인 김구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음--》
우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젊음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렇다. 농촌계몽도 좋지만 한 생명을 내놓고 왜놈들과 싸우는 것이 더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멋지게 생명을 버릴줄 아는 것이 사내대장부이다. 안중근의사처럼 말이다. 뒤일은 친구들한테 맡기고 나는 그 길을 택하자!》

  그후 우의는 김태식과 몇차례 밀회를 가진후 마침내 신의주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만주로 갈 계획이였다. 신의주에서 김태식과 만나기로 약속되여 있었다.
김태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지금의 단동)땅에 발을 옮겨놓자 윤우의는 이름을 윤봉길로 바꾸었다. 이때로부터 윤우의는 윤봉길로 불리우게 되였다. 만주땅에 들어서 여러 지방을 돌아 1931년 9월에 상해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만주를 삼킨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 내지에까지 손을 뻗쳐 상해는 물론 중국 천지가 온통 일본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몇사람이 겨우 림시정부의 간판이나 지키고있는 형편이였다.

  윤봉길은 박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김구선생을 처음 만나게 되였다.
《선생님, 저는 고향농촌에서 계몽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일본놈들의 횡포에 더 이상 견딜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하던 끝에 직접 독립투쟁에 참가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이곳에 오게 되였습니다.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을 모시고 저의 이 한목숨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고자 합니다. 》
김구는 애국정열에 불타는 윤봉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마침내 감동한듯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윤동지! 나는 바로 윤동지와 같은 사람을 찾고있던 참이요. 우리 앞으로 더욱 힘을 내여 왜놈들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하기요.》
그때로부터 윤봉길은 남새장사로 변장하여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부대앞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에까지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25살나던 해인 1932년 4원 20일 일본인이 발행하고 있는 《상해일일신문》에 아주 반가운 소식이 실렸다. 내용인즉 일본천황의 생일날인 4월 29일에 일본놈들의 기념행사가 바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 기념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점심도시락 한개, 물통 한 개, 일장기 한폭만을 가지고 오라는 포고문도 곁들어 있었다.

  (때는 왔다! 하늘이 마련하여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다!)
윤봉길은 높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그 신문을 쥐고 김구선생을 찾아갔다.
《선생님, 때가 왔습니다. 저도 안중근이나 이봉창의사처럼 목숨을 바치고자 합니다. 놈들을 송두리째 없어버리겠습니다.》
《내가 윤동지와 같은 인물을 찾은 까닭도 바로 이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소. 자, 우리 만단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요.》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선생이 이끄는 《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선서의식을 가졌다. 선서문을 읽는 윤봉길의 가슴속에서는 피가 끓는듯하였다.
4월 29일, 날씨는 화창하였다. 윤봉길은 새 양복에 새 구두로 정장을 하고 기념회장에 입장하였다. 미리 준비했던 도시락을 들고 물통을 어깨에 메였다. 그리고 오른소에 일장기 하나를 들었다. 경비를 서던 왜놈들은 윤봉길을 일본인 유지인사로 알고 누구도 검문하지 않았다.

  식장 정면 중앙에서 일본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까와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고위급지휘관들과 요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군중들의 틈서리에 끼여있던 윤봉길은 한발작한발작 식장 정면 중앙으로 접근해갔다.
이윽고 식이 시작되였다. 개회사에 이어 국가가 연주되였다. 일본인들은 자못 경건한 자세로 국가를 불렀다. 그리고 묵념이 시작되였다. 때는 11시 40분!
바로 이때라고 생각한 윤봉길은 침착하면서도 기민하게 물통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시라까와를 겨누어 온 힘을 다하여 그 물통을 던졌다.
《꽝!》

  천지를 뒤흔드는듯한 폭음과 함께 식장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였다. 시라까와를 비롯하여 그 주위에 있던 군관들과 요인들이 피를 흘리면서 거꾸러졌다. 윤봉길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을 위하여 준비한 또 하나의 도시락작탄을 터치려다가 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1932년 12월, 조선민족을 포함한 피압박민족과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에게 조선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윤봉길의사는 일본에 압송되여 일본군의 손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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