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리홍광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3:48    조회: 27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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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jpg  리홍광(1910-1935)은 1910년 조선 경기도 단삼동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리홍해이고 또 리의산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조선의 《3.1》운동을 직접 겪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예속과 억압에 못이겨 1925년에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 반석현에 이사왔다가 1926년에 이통현 류사저자툰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는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농민동맹》에 가담하여 혁명사상을 접수하였으며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후에 길림성 성장대리이며 독군서 참모장인 회읍이란자가 일본군에 투항하였기 때문에 일본침략자들은 총 한방도 쏘지 않고 길림을 점령하였다. 반석은 길림철도의 요충지였다. 반석현 당위에서는 만주성당위의 지시에 따라 10월에 《개잡이대》 또는 《적위대》라고 하는 무장대오를 건립하여 당의 기관을 보위하고 친일주구들을 타격하였으며 농민운동과 배합하여 백성을 적으로 삼는 반동적인 지주분자들을 징벌하였다. 이 《적위대》는 처음에는 일곱사람에 《무쇠수탉》이라 불리우는 단발배기 총 한자루밖에 없었다. 대장은 리홍광이였다. 후에 이 대오는 날이 갈수록 더 장대해져 중요한 항일무장력량으로 되였다.

  1932년초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북만지위에서 무기사업을 책임진 양군무(즉 양좌청)를 반석에 파견하였고 또 2월에 길림성주재 성당위특파원 장옥형을 반석에 파견되여와서 《개잡이대》를 유격대로 고치고 리홍광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양군무를 정위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유격대가 건립된후 리홍광은 정위에게 무기가 없는것을 보고 몇번이나 자기의 군총을 정위에게 주려고 했으나 양군무는 번마다 완곡히 사절하였다. 그리하여 리홍광은 정위에게 권총을 꼭 얻어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버리허토에 있는 한 지주가 권총을 차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날 그는 이 마을에 쥐도새도 모르게 들어가 하루동안 숨어있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지주놈이 문밖으로 나왔다. 리홍광은 슬그머니 이 지주놈의 뒤에 다가가서 《손 들었!》하면서 잔등에다 권총을 들이댔다. 그랬더니 지주놈은 고분고분 권총을 바치였다. 리홍광은 반들반들 윤기도는 이 새 권총을 양정위에게 주었다.

  1932년 2월 7일, 리홍광유격대는 《2.7》대파업기념일을 리용하여 군중대회를 열고 일본놈의 앞잡이들을 공개징벌하였다. 이 한차례의 공개징벌은 필연코 반석현 혁명세력들에 대한 일제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었다. 2월 9일, 반석현 《보민회》에서는 60여명의 위만군 기병들을 거느리고 반석동쪽의 곽가점일대에 와서 사람들을 마구 붙잡았는데 한시간동안에 구당위 서기 리동광 등 9명의 당원과 단원, 그리고 10여명의 군중을 체포하였다. 리홍광은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소고산자일대에 와서 체포당하지 않은 당지의 녀성당원 3명과 같이 700여명의 군중을 발동하여 곽가점까지 적들을 줄곧 뛰쫓아갔다. 그리고는 밤낮 사흘동안이나 이만군 병영을 포위하고 구호를 불렀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왜놈들을 타도하자! 망국노가 되지 말자!》
그러자 위만군놈들은 체포해간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투쟁에서 유격대와 군중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많은 청년들이 자진하여 유격대에 참가하였고 군중들은 또 사냥총, 양포와 자작탄 등 많은 무기들을 유격대에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이 유격대는 곧 2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밤중에 《보민회》를 기습하여 일본간첩 한놈을 처단하였다.

  《9.18》사변때 지주계급들은 농민폭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주무장대를 조직하였다. 호란진서남쪽으로부터 약 10킬로메터 떨어진 한마을에 리보동(별호는 두번째 염라왕)이라는 대지주가 있었다. 그의 수하에 있는 지주무장대에는 대원이 20여명이 있었는데 모두가 새 총을 가지고 있었다. 리홍광은 양정위와 상의한 다음 어느날밤에 대오을 거느리고 남몰래 지주무장대의 숙소를 포위하였다. 리홍광은 4~5명의 대원을 데리고 도박군으로 변장하고 집안으로 끼여들어 갔다. 놈들은 도박에 눈이 어두워서 왁자지껄하며 놀다보니 낯선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오는것도 모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선 대원들은 리홍광의 암시에 따라 번개같이 방안 네구석에 붙어서면서 권총을 빼들었다. 리홍광은 《꼼짝 말앗! 손 들엇!》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깜짝 놀란 지주무장대의 놈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서 순순히 손을 들었다. 대원들은 재빨리 벽에 걸려있는 20여자루의 총을 몽땅 벗겨 들었다. 이렇게하여 리홍광은 뛰여난 지혜와 담략으로 놈들한테서 아주 손쉽게 20여자루의 총을 빼앗아냈다.

  그후 지주 리보동은 조선족과 한족의 민족모순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조선족반일회원 3명을 죽이고 그것을 한족들이 죽인것이라는 요언을 퍼뜨렸다. 적들의 음모를 폭로하고 타격하기 위하여 리홍광은 두번째 염라대왕인 리보동을 체포하여 반일회원이 살해당한 마을에서 공판대회를 열고 그 놈을 총살해 버렸다. 그때로부터 리홍광의 이름은 군중속에 널리 전해졌다.

  이때 리홍광이 령도하는 유격대는 30여명으로 발전하였다. 1932년 6월 4일, 반석중심현당위에서는 반석로농항일무장력량을 정식으로 건립하고 《만주로농반일의용군 제4군 제1종대》라 명명하였다. 략칭으로 《반석로농의용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 3개의 분대를 두었는데 리홍광을 참모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오는 확대되였지만 유격대의 몇몇 지도자들은 모두 군사지휘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당훈장에게서 《손자병법》을 얻어다가 참답게 학습하였다. 그들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낮에는 사격훈련을 하고 밤에는 병법을 배웠다.

  어느날 위만군 기병 한개 분대가 반석에 출병하여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놈들은 곽가점부근에 있는 한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된 리홍광은 반석로농의용군을 이끌고 이 마을에 기습해 들어가 그 놈들을 몽땅 사로잡았다. 리홍광은 흐뭇하여 《이것이 바로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불의에 공격하라>는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그후 오라지 않아서 일본수비대의 한개 중대가 위만군 두개 중대를 거느리고 유격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방에 대하여 대소탕을 감행하였다. 이때 리홍광은 《일본군과 위만군이 이처럼 많은 형편에서 우리는 무턱대고 맞다들수 없습니다. 그래도 <강한 적은 피하고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며>그런 다음 <소란을 피워 승리한다>는 <손자병법>대로 해야겠습니다.》라고 자기의 소견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유격대는 적들이 오면 분산하여 피해 숨어있고 적들이 쉴때에는 번갈아 가면서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주둔지에 가서 눈먼 총질을 하고는 돌아왔다. 그럴적마다 적들은 뒤를 쫓아왔지만 유격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격대에서 이렇게 거듭 소란을 피워대는 통에 적들은 밤낮 근심에 싸여 안절부절 못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적들이 지쳐서 노그라져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바로 이때라 판단하고 유격대는 리홍광의 인솔하에 적들을 꾀여다가 매복권안에 넣은후 불벼락을 안겼는데 50~60여명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1932년 11월, 양정우동지가 중공만주성위를 대표하여 반석에 와서 반석로농의용군을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에 양정우는 정식으로 유격대정위를 맡고 유격대를 3개 대대, 한 개 교도대로 편성하였다. 리홍광이 교도대정위로 임명되였다. 교도대는 늘 양정우를 따라 활동하였고 리홍광도 역시 늘 양정위의 신변에서 사업하였다. 항일련군 제1군의 전투력사과정에서 리홍광은 줄곧 양정우장군의 친근한 전우였으며 믿음직한 조수였다. 1934년 12월에 양정우장군은 중공만주성위에 보내는 보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리홍광동지는 일처리에서 견정하고 군사상에서 자립적인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업에서 적극적이다…》
이처럼 양정우장군은 리홍광을 더없이 애호하였고 리홍광도 양정우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그후 대오가 확대됨에 다라 1933년 9월 18일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정식으로 건립되였는데 양정우장군이 사장 겸 정위로 되였고 리홍광은 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독립사가 건립된후 항일군사력량은 더한층 강화되였다. 사령부에서는 제1퇀과 보안련, 소년영을 인솔하여 가지고 반동으로부터 반서로 와서 반일군의송퇀장 등 부대와 련합하였다. 그들은 선후로 서안의 협신자와 유수천 등지에서 일본군, 위만군과 싸웠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이때 일본군도 《황군제1사단》을 주력으로 한 일본군과 위만군 12000명을 출동시켜 유격구를 대거 소탕하였는데 우리근거지는 엄중한 파괴를 받았다. 부대의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양정우장군과 리홍광은 제1퇀과 소년영을 로유격구에 남겨두어 적들을 견제하게 하고 사령부에서는 주력부대를 인솔하여가지고 전략적이동을 하여 통화지구에 가서 더욱 큰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결정지었다.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는 전략적이동을 하는 가운데서 4~5개월의 전투를 거쳐 12000여명의 일본군과 위만군의 포위공격을 무찌르고 많은 적들을 살상하였으며 통화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대오도 더욱 발전되고 장대되였다.

  1934년초에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는 항일련합지휘부를 조직할데 대한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받았다. 2월 21일에 림강현 장랍자의 밀림속에서 17갈래의 항일무장력량 수령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6일간의 토론을 거쳐 《항일련합군선언》과 《항일련합군투쟁강령》 등 문헌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양정우장군을 총지휘로, 중장청을 부지휘로, 리홍광을 참모장으로 선거하였다. 이와 더불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독립사를 제외한 그 나머지 반일군은 모두 8개 지대로 편성되였다. 그후 1934년 11월 7일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으로 창립되였는데 그 산하에 2개사를 두고 리홍광을 제1사 사장 겸 정위로 임명하였다. 그때 리홍광은 아주 성숙된 지휘원으로 자라났다. 리홍광은 평소에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아주 무게가 있었다. 그는 매번 전투가 시작되기전이면 전투동원을 하여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그는 전장에서는 늘 앞장서서 용감히 적을 무찔러나갔고 후퇴할때면 또 제일 뒤에 서군 하였다. 그렇기때문에 리홍광은 군대내에서 위망이 제일 높았다.

  1935년 4월하순에 리홍광은 명령에 의하여 재차 환인유격구에 들어가 제1군사령부와 배합하여 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5월초에 리홍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홍경현 합당구에 진주하였다가 또 로독정자에 이동하게 되였다. 그런데 부대가 로도구령을 넘어서 까바채의 웃쪽켠에 있는 로령구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등창방면으로부터 오는 200여명의 일본수비대, 위만경찰과 조우하게 되였다. 산이 높고 나무가 우거졌기에 우리군이 적을 발견했을 때는 그 거리가 몇십메터 밖에 되지 않았다. 적들이 먼저 불질하니 우리 군의 장병들은 재빨이 흩어져 엄페물을 찾아 그 자리에서 반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적아 쌍방간에는 가렬한 전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오후 4시로부터 어둠이 깃들때까지 계속되였다. 이때 리홍광은 산등성이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적들은 밀집한 기관총사격으로 우리 측의 화력을 제압하였다. 리홍광이 망원경을 들고 적들의 기관총화점을 까부실 유리한 지형을 찾고 있는데 돌연 기관총탄이 그의 오른쪽 흉부를 꿰뚫고 나갔다. 붉은 피가 그의 낡은 군복을 붉게 물들였다. 리홍광의 4명 경위원이 즉시 그를 담가에 메고 동쪽의 산등성이를 넘어 환인현 해청화부락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상처가 너무도 엄중하였기에 구급치료를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튿날인 1935년 5월 12일에 남만에서 위력을 떨치던 항일명장 리홍광은 불행하게 25세를 일기로 희생되였다. 리홍광의 유체는 제1사 후근부 부장인 한진이 책임지고 비밀리에 지금의 신빈현 홍묘자촌 대청골의 큰 호두나무밑에 묻었다.

  리홍광은 반석항일유격대의 창시자이며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걸출한 지휘원의 한사람이며 민족영웅 양정우장군의 친근한 전우이다. 그의 일생은 비록 짧았지만 광범한 중화민족 인민대중과 우리 민족 인민들에게 지워버릴수 없는 인상을 남기였다. 렬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해방전쟁가운데서 렬사의 빛나는 이름으로 명명된 《리홍광지대》는 동북해방전쟁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후 렬사가 유격대를 창건한 반석현에는 《홍광》이라 명명한 거리, 상점, 공장, 학교들이 나타났다. 1985년에 렬사의 고향인 이통현 류사저자툰에서는 리홍광렬사의 기념비를 세우고 길이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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