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양림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3:11    조회: 88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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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jpg  양림(杨林,1898-1936년)은 중국조선족가운데서 명망이 가장 높은 군사활동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중공만주성위의 군사책임자였고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동북항일유격대의 창건자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1898년에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김훈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의하여 선후로 양주평, 양녕, 베스티, 주동무, 양림 등 여러가지 이름을 사용하였다.

  양림은 1919년에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유명한 《3.1》반일운동에 참가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들의 항쟁을 무참히 탄압하였다. 양림의 아버지는 일제의 탄압에 장렬히 희생되고 양림은 일본군경의 체포대상으로 되였다. 조선에서 더는 투쟁을 전개할수 없게되자 양림은 반일단체의 결정에 따라 출국하여 중국으로 오게 되였다. 그리하여 1919년 가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에 도착하였다. 그때 합니하에는 조선민족이 집거해 있었고 조선민족반일단체에서 꾸리는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양림은 이 학교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다.

  1920년 5월, 양림은 신흥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왕청의 서대파사관학교에 가서 군사교관직을 맡았다. 그해 6월에 홍범도부대가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왔다. 이 소식은 반일무장부대에 커다란 고무를 주었고 관병들의 투지를 크게 북돋우어 주었다.
한편 일본침략군은 봉오동전투에서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그것을 구실로 많은 병력을 모아 연변에 있는 조선독립군의 무장단체들을 탄압하려고 망상하였다.

  이에 반하여 연변각지에 있는 조선독립군의 무장단체들에서는 서로 련계하여 일본침략자들을 반격할 준비를 하였다. 서대파사관학교에서도 학원들을 앞당겨 졸업시키고 그 학원들을 기초로 북로군정서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부대는 10월 5일에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일대에 이르러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인반일부대는 그후 일본군의 대규모적련합토벌에 견디지 못하여 전이하거나 해산되고 말았다. 이때 양림은 조선민족의 독립은 오직 중화민족의 해방에서만이 이룩될수 있다는것을 느끼고 1920년 말에 상해에 갔다가 광주, 향항, 해풍, 로가 등지를 경유하여 1921년초에 곤명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양주평이라 이름을 고치고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하여 제6대 제1구대에 편입되였다.

  양림은 군사기술뿐만아니라 정치에 대하여서도 큰 중시를 돌렸다. 특히 《5.4》운동이후의 중국혁명형세에 흥분하였다. 그때 학교에서는 《군인은 정치를 운운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양림은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비밀리에 혁명도사들의 서적들을 얻어들여 탐독하였고 친구들과 혁명의 도리며 중국의 전도에 관하여 담론하였다.

  1923년말에 양림은 운남강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계요부대에서 복무하라는 요청을 뿌리친채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주로 갔다. 바로 제1차국공합작이 실현되였을 때였다.
당시 광주의 형세는 중국인민들은 물론 동방 각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국의 혁명지사들이 광주에 모여들었다. 1924년 하반년에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제의에 의하여 광주에서 대회를 열고 《민족해방대동맹》을 결성하였다. 양림은 곧 이 동맹에 참가하였다.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양림은 점차 맑스주의를 신봉하게 되였고 무산계급혁명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였다. 특히 주은래의 연설을 자주 듣게 되면서부터 그는 더욱 중국공산당과 밀접히 접촉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주동적으로 접수하게 되였다.

  제1차국공합작이 시작되고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지자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소개와 파견에 의하여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 황포군관학교 내부정세는 아주 복잡하였는데 교장인 장개석은 자기의 우파세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1925년말에 공개적으로 《손문주의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진보적인 《청년군인련합회》에 대항하였다. 양림은 이처럼 복잡한 형세에서도 동요함이없이 중국공산당의 켠에 견결히 서서 열심히 사업하였다. 그러면서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학생군 제3기학생대 대장직을 맡아 200여명의 학생군을 이끌고 진형명의 반혁명세력을 치기 위한 제1차동정에 참가하여 해풍, 륙풍, 면호, 안류, 오화, 홍녕, 매현 등 지구를 넘나들면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또 주은래가 령도하는 동정군을 따라 광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제6련 상위련장으로 임명되여 진군(湞军)총사령 양회민과 계군(桂军)총사령 류진중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1925년 11월에 광동 조경헌에서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이 창립되였다. 엽정이 퇀장으로 임명되고 양림은 제3영 영장 겸 당소조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다가 1926년 4월에는 당의 결정에 따라 독립퇀으로부터 다시 황포군관학교에 돌아왔다. 이때 학교내에서는 좌파와 우파사이의 투쟁이 매우 치렬하였다. 장개석은 주은래를 위수로 하는 학교내의 공산당세력과 공청당세력을 배척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청년군인련합회》라는 좌파조직도 해산되였다. 이런 정세에서 양림은 주은래를 비롯한 당조직의 령도밑에 기타 동지들과 손을 잡고 우파세력의 진공에 맹렬히 반격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끝내 반혁명정변을 일으켰다.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공산당원, 공청단원, 그리고 진보적 인사들이 살해당하고 투옥되였다. 황포군관학교에도 백색테로가 뒤덮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당조직에서는 양림을 관심하여 그해 8월에 쏘련모스크바에 류학을 보냈다.

  1930년 봄에 양림은 쏘련으로부터 상해에 돌아왔다. 당중앙에서는 그를 중공만주성위로 파견하여 주로 군사사업을 조직하고 령도하게 하였다. 양림은 중공동만특위위원 겸 군위서기의 신분으로 당시 만주에서 혁명투쟁을 제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연변으로 왔다. 그는 10월부터 연변 각현의 군사사업을 강화하면서 연길, 화룡, 왕청, 훈춘등지의 군중들을 령도하여 반동지주와 군경들의 무기를 탈취하는 투쟁을 벌리고 로농적위대 등 혁명무장조직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연변각지에서 도합 15000여명이 참가한 징병반대 및 광주봉기 3돐기념대회를 열고 일제의 만주침략음모를 폭로함과 더불어 국민당의 부저항주의를 규탄하였다. 대회에서는 또 일제의 주구 30여명을 처단하였다.

  1931년 3월에 양림은 사업의 수요에 의하면 연변을 떠나 동만으로 갔다.
1931년 9월 18일,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켰다. 중공만주성위가 파괴당하고 주요한 책임자들이 체포되였다. 이처럼 엄중한 정세하에서 만주주재 대표였던 라등현이 중공중앙의 의도에 따라 중공만주성위를 정돈하여 새롭게 서기직을 맡게 되면서 동만에 있는 양림을 불러다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로 임명하였다.

  만주성위 군위서기직을 맡은 양림은 1932년 4월부터 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반석지구에 내려가 중공반석중심현위를 협조하여 《4.3》, 《5.1》, 《5.7》 반일농민봉기를 발동하였다. 그중 가장 기세가 높았던 것이 《5.7》봉기였다. 이 봉기는 바람을 만난 불길마냥 이통, 쌍양 등 지역으로 급속히 타번지여 4000여명이 참가한 성세호대한 대폭동으로 발전하였다. 봉기자들은 하루동안에 50여명의 일제의 주구를 체포, 처단하였고 한간지주놈들의 식량 1000여섬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로령일대의 철길 10여리를 걷어다가 강물에 처넣었다.

  양림은 또 리홍광이 조직한 《개잡이대》를 핵심으로 반석로농의용군을 건립하였다. 이 의용군은 그후 남만유격대와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으로 되였다.
1932년 늦가을, 양림은 중공중앙국 서기이며 중앙쏘베트 로전위원회 주임인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동북을 떠나 강서중앙쏘베트구역에 가서 베스티(쏘련류학시에 썼던 이름임)라는 이름으로 참모장직을 맡아 사업하게 되였다. 로전위원회의 과업은 중앙쏘베트지구의 적위대를 령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것이였다. 양림이 적위대의 사상건설과 군사건설을 함께 강화하여 쏘베트구역에 대한 국민당의 50만병력을 동원한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한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로전위원회를 충병참부로 고쳤으며 양림은 여전히 참모장직을 맡았다.

  1934년 1월에 양림은 조선민족의 대표로 전국쏘베트 제2차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주석단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였고 쏘베트공화국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산되였다. 대회기간에 그는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민족인민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조선민족인민들의 반일투쟁상황을 소개하였다.
1934년 7월 15일, 모택동과 주덕은 중화쏘베트중앙정부와 중국로농홍군을 대표하여 《중국로농홍군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7월 22일에 양림은 《홍중사》를 통하여 《홍군북상항일옹호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는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양림의 이 선언은 전체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한것이다.

  만악의 국민당은 중국의 절반이상의 땅을 팔아먹고도 지금 또 전중국을 몽땅 일본제국주의자에게 팔아먹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망국의 참화가 눈앞에 펼쳐졌고 망국노의 치욕이 바야흐로 매개 중국사람의 머리우에 들씌워지게 되였다. … 국민당반동파는 중국을 갈라 삼키려는 모든 제국주의자들의 방조자이며 유사이래의 최대의 매국적이다. … 오직 쏘베트 및 그 홍군만이 전 중국의 민증을 무장할수있는 통수이며 항일의 유일정확한 대표자이다.

  북상항일선언이 발표된후 양림은 중앙홍군대학교 전근되여 거기서 국민당의 제5차 《포위토벌》을 반격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홍군의 북상항일을 위한 준비사업들을 책임지고 하였다.

  1934년 10월, 중국로농홍군의 장정이 시작되였다. 양림은 《홍색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퇀장은 진갱이고 정위는 송임궁이였다. 《홍색간부퇀》은 로농홍군의 북상항일을 위하여 첩첩한 난관을 돌파하면서 길을 헤쳐나갔다.
1935년 4월 29일, 중앙군위에서는 이 간부퇀에 금사강 권양기나루터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림은 진경, 송임궁 등 간부퇀의 지도자들과 함께 전사들을 거느리고 주야 강행군으로 180리를 걸어 금사강가에 이르렀다. 간부퇀은 양림의 제의에 의하여 기습작전을 펼쳐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루터에 있는 적 60여명을 몽땅 사로잡고 나루터를 점령하였다. 간부퇀은 중앙군위의 명령에 따라 련속작전을 펼쳐 화염산을 탈취하고 통안진을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간부퇀은 적의 퇀장 1명을 망라하여 적군 600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간부퇀과 함께 양림의 성망은 전체 홍군속에서 날로 높아갔다.

  금사강을 건넌후 양림은 전체 홍군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장개석비도와 지주, 토비 무장의 진공을 격파하고 설산초지를 지나 1935년 10월에 당중앙을 따라 승리적으로 섬북혁명근거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양림은 중앙군위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6년 2월, 홍군은 화북을 구원하고 전국의 항일구국운동을 원조하기 위하여 동정항일(东征抗日)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건너는것이 난관이였다. 당시 산서성에 둥지를 틀고 있던 염석산은 공산당을 막기 위하여 황하의 동쪽기슭에 수많은 또치까와 중무기를 배치하여 《천리황하방선》을 설치하여 놓고 있었다.

  이 방선을 돌파하는 과업이 양림이 소속된 부대에 하달되였다. 상급에서는 양림에게 75사 223퇀 제1영을 인솔하여 도하선봉이 되여 대안의 진지를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주력부대의 도하를 보증할것을 명령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림은 사전에 농민으로 가장하고 황하기슭을 다니면서 지형이며 물의 류속이며 강의 너비며 도하지점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전사들을 향하여 《모주석께서 여기로부터 도하하시게 되니 우리는 꼭 이 길을 잘 뚫어야 합니다.》하고 도강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도하동원을 하였다.

  양림은 선발영의 전사들과 함께 배에 올라 야음을 리용하여 대안으로 향했다. 적들의 화력이 선발영의 전진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양림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대오를 인솔하면서 앞장에 섰다. 대오는 하가요서북에 신속하게 상륙하였다. 적의 또치까가 아군의 전진을 가로 막았다. 양림은 포화를 모릅쓰고 전진하여 하가요길어구에 있는 적의 또치까 하나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련이어 적을 또치까 여러개를 까부시고 끝내 하가요촌의 모든 거점을 점령하였다.

  양림이 계속하여 적의 중심진지를 향해 돌진할 때 만악의 적탄이 그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그의 상처는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전우들의 문안에 《전방의 형세는 어떻소? 모주석께서 도강하셨소?》하고 맥없이 물었다. 전군이 모두 도강했고 모주석께서도 이미 도강하였다는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리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보려 온 군단의 지도자들에게 《저에 대한 근심은 하지 말고 빨리 전진하시오.》라는 부탁을 남기고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밖에 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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