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리동광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41:50    조회: 30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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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만에서의 항일투쟁을 말할 때 우리는 리동광동지를 떠올리게 된다. 리동광동지는 남만에서의 우리 당의 최초의 조직자이고 지도자이며 항일련군 제1군과 남만항일근거지의 창설자의 한사람이다.

  리동광(李东光,1904-1937년)의 본명은 리상순(李相淳)이고 별명은 손세현(孙世贤)이며 혁명에 참가한 후부터는 리동일(李东日,李东一)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4년 1월 23일(음력)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산간마을의 한 보통농가에서 태여났다. 그리고 1918년, 즉 그가 14살때에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성 훈춘시 대황구로 이주하여 왔다.

  1922년에 리동광은 룡정 사립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연변의 문화중심이였던 룡정에는 일부 맑스-레닌주의고전로작과 사회주의서적들이 쏘련과 상해, 북경 등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리동광은 중학시절로부터 이런 서적들을 읽으면서 혁명을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9월부터는 학교내의 사회주의과학연구회, 독서회 등 비밀단체에 참가하여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연구하였다. 그러는중에서 그는 진정 조선민족이 민족독립을 이룩하자면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투쟁에서만이 가능하는 것을 깨우치게 되였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그는 맑스-레닌주의의 적극적 신앙자로 되였으며 인류의 해방을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할 위대한 리상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외의를 걸치고 나온 반동적인 학교당국에서는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들이 맑스주의를 연구하는것을 발견한후 질겁하여 학적을 취소하는 등 그들의 활동을 백방으로 저애하였다. 그러나 리동광 등은 청년학생들을 《동창회》, 《학우회》 등 조직에 묶어세워 주로 종교문제를 둘러싸고 학교당국과 직접적인 투쟁을 벌리였다. 1923년말에 그들은 《교육은 종교와 분리되여야 한다.》는 기치를 들고 학교당국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의 압력에 의하여 학교당국에서는 마침내 학생들의 요구를 접수하였다.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승리를 취득하였다.

  동흥중학교에서의 반종교투쟁의 승리는 기타 중학교의 학생투쟁을 크게 고무하여주었다. 뒤이어 대성중학교의 사생들도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승리하였다.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들은 방학기간이나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룡정주위의 농촌에 내려가서 로농대중을 협조하여 《청년회》거나 《친목회》와 같은 군중단체를 조직하고 맑스-레닌주의와 로씨야 10월사회주의혁명 승리의 경험을 열정적으로 선전하였다.

  1925년, 연변에는 큰 재해가 들었다. 리동광은 가정의 경제난으로 잠시 학업을 중지하고 고향인 훈춘 대황구에 돌아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 광범한 학생과 농민들에게 진정 우리 민족이 민족독립을 이룩하고 근로대중의 해방을 쟁취하자면 모두다 일떠나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해야 하는바 그러자면 반드시 혁명의 도리를 깨우쳐야 한다고 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고 로씨야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에 다시 동흥중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하면서 계속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1927년 5월 1일, 연변의 룡정과 화룡 일대에서 《5.1》국제로동절을 기념하여 성세호대한 반제애국시위가 거행되였다. 이를 맞아 리동광은 동흥, 대성 두 학교에서 반제애국선전사업과 조직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5월 30일에는 두 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시위활동을 거행하였다. 이때로부터 리동광은 일본령사관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곧 체포되여 룡정감옥에 투옥되였다. 리동광은 옥중에서 놈들의 갖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러다가 1927년 9월에는 옥중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옥하였다. 그뒤 그는 연변을 떠나 남만 반석일대로 활동지점을 옮겼다.

  1928년여름, 중공반석현위에서는 일찍 광주봉기와 해륙풍농민운동에 참가하였던 진곡목 등 몇몇 조선족공산당원들을 파견하여 지하공작을 하게 하였다. 리동광은 가장 일찍 그들과 접촉하였다. 리동광은 그들의 방조와 교양하에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에 대하여 심각한 인식을 가지게 되였고 공산당을 따라 끝까지 혁명할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해말에 그는 반석에서 직접 남만 청년동맹 제4차회의를 소집하고 대표들에게 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그리고 중국혁명의 형세를 소개하였으며 동북을 강점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을 분석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회의에서 조선족의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은 파벌투쟁을 극복하고 오직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한족 및 기타 형제민족과 련합하여 투쟁하여야만이 승리할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리동광의 주장과 건의는 대표들의 열렬한 옹호를 받았다. 이때로부터 반석을 중심으로 한 남만 조선족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영향하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되였다.

  1929년에 리동광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0년 8월에는 중공반석현에서 구위서기직을 담임하였다. 그는 만주성위의 지시에 좇아 공고한 반동항일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여러차례나 농민들을 령도하여 항조항량(抗租抗粮) 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반동지구에다 농민협회, 부녀회, 아동단 등 군중조직을 건립하고 대다수의 농민들을 반일투쟁에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931년의 《9.18》사변이후에는 서위의 지시에 좇아 반만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리홍광동지를 협조하여 로농적위대 즉 주구숙청대를 건립하였다. 이주구숙청대는 1932년 5월에 반석로농의용군으로 발전하였다.

  1932년 10월, 왜놈들은 반석항일세력에 대하여 야만적인 대토벌을 발동하였다. 이에 현위의 부분적인 지도자는 우리의 혁명력량을 과소평가하고 적의 허장성세에 질겁하여 반석지구를 포기하고 동만으로 전이하자는 우경기회주의적인 주장을 제출하였다. 성위에서는 순시원으로 양정우를 파견하여 왔다. 이때 리동광은 《동만도 일본침략자가 점령하고 있는 지방인데 무엇때문에 반석유격근거지를 버리고 동만으로 가야 하는가? 적을 반대하는 이 지방의 투쟁임무는 반드시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양정우를 도와 그릇된 로선을 비판하고 3개월동안에 60여차의 전투를 거쳐 놈들의 발동한 4차례의 포위토벌을 분쇄하였다. 그리고 버리하투를 중심으로 하여 홍석랍자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33년 5월, 리동광은 중공반석현위 제4차확대회의에서 중공반석중심현위 서기로 당선되였다. 그는 우선 놈들의 몇차례의 포위토벌에 의하여 파괴된 당 및 기타 군중조직의 건설을 틀어쥐고 밤낮없이 분전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말에 이르러 괴자항, 버리하투, 반석, 의퉁, 서안 등 5개 직속지부가 건립되였다. 당원은 모두 278명으로 발전되였는데 이는 파괴되기전보다 1배 남짓이 증가된 셈이다.

  이에 따라 공청단조직도 아주 큰 발전을 가져왔고 농민위원회, 농민자위대 등 조직도 확대되였다. 리동광의 지도하에 길해철도에서는 2개의 당지부, 1개의 공청단지부, 6개의 공회소조가 건립되였다. 이와 더불어 리동광은 양정우를 협조하여 위만군쟁취사업도 힘차게 벌려나갔고 각지로부터 우수한 청년들을 동원하여 부단히 유격대를 확충하였는바 1933년 9월에는 반석 버리하투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립독립사가 정식으로 창립을 선포하였다.

  1933년 10월 일제는 황군 제1사를 주력으로 하고 일위군 1만2천여명을동원하여 우리 독립사와 홍석랍자유격근거지를 향하여 대토벌을 발동하였다. 현위에서는 리동광을 수반으로 하는 독립1퇀과 소년영을 반석에 남겨 놈들의 토벌을 반대하는 유격전쟁을 계속 진행하게 하고 그외의 주력부대는 양정우장군의 인솔하에 휘발하이남의 광활한 삼림지대에 진출하여 유격전을 진행하면서 유격근거지를 확대하도록 결정지었다. 주력부대가 반석을 떠난후 리동광은 우선 항일군가속을 몽강쪽으로 전이시키고 나머지부대를 이끌고 놈들의 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전투에 뛰여들어 휘황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1933년말부터 1934년 여름까지 선후하여 호란진 예간대 8련의 기의를 쟁취하였고 300여명의 항일군을 련합하여 이릉 이도구 위군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조양가를 점령하고 반북에서의 제일 큰 일위군의 거점의 하나인 일괴덕가마공장을 점령한후 2천여명의 군중대회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퉁하진을 습격하여 경찰 200여명을 소멸하고 40여필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1934년 11월 5일, 림강현 사도이차(四道二叉)에서 중공남만당 제1차대표대회가 열렸다. 리동광은 이 대회의 지도사업에 참가하였고 중공반석중심현위를 대표하여 사업보고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남만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리동광, 양정우, 기유림 등 동지들로 구성된 특위상무위원회를 세웠다. 리동광이 특위서기를 맡았다. 회의에서는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창건할데 관한 의제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1월 7일에 동북이민혁명군 제1군이 창건되였다. 이때로부터 양정우와 리동광은 남만의 당과 군대의 조직자와 지도자로 되였다.  

  1934년 겨울과 1935년 봄에 일본군은 1만명을 헤아리는 병력으로 남만에 대한 제3차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리동광은 남만의 군민들에게 놈들의 포위토벌을 짓부실것을 호소하였다. 리동광의 창의하에 남만의 당, 정, 군 기관간부훈련반이 열렸고 지방사업에서의 당의 령도적역할이 더욱 강화되였다. 적들은 10만여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리동광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리동광은 위험을 무릅쓰고 1935년 7월부터 10월까지 약장사군으로 가장하고 림강, 금천, 류하 등지로 직접 내려가 지도사업을 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의 그번 포위토벌도 순조롭게 물리치게 되였다. 그리고 각지의 당조직과 군중조직은 더욱 발전장대해졌다. 1935년 10월까지 남만의 56개 지방에서 선후로 인민정부를 세웠다.

  1936년 봄, 동북인민혁명군과 각 항일무장부대는 중공중앙의 《8.1》선언의 정신에 근거하여 동북항일련합군으로 재편성되였다. 1936년 여름부터 1937년 6월까지 리동광은 제1군과 함꼐 관전, 환인. 신빈, 집안 등 현들에서 활동하면서 여러차례 전투를 지휘하여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침략자들은 1936년 6월부터 위만군을 주력으로 내세우고 이른바 만군독립토벌을 감행하였다. 동원된 병력은 1만 6천여명이였다. 리동광은 양정우와 합작하여 유격전을 벌려 매복유인전술로 적들의 이 포위토벌을 분쇄하였다.

  1937년 6월, 제1군 군부는 심해철도를 통과하는 일본군의 군용렬차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고 신빈현 영통부근의 황토강을 지나다가 몇배에 달하는 적의 수비대와 맞다들게 되였다. 리동광은 바로 이 전투에서 양정우장군을 도와 싸움을 지휘하다가 적의 흉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당년 그는 33세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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