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총후군부 부장 조남기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37:17    조회: 91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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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jpg  파란곡절이 많았던 지난 수십년간 누구에게나 두루 곱게 보여 출세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원칙을 지켜서 갖은 고생을 겪은 사람들도 있다. 조남기(赵南起)장군의 정치생애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다.

  1967년 문화대혁명의 한창일 때 일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제1기서기이며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는 문화대혁명에서 《주자파》, 《3반분자》, 《반역자》로 몰렸다. 그때 조남기동지는 당지의 군사관제에 참가한 군대간부이자 정부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내정되여 있었기에 그가 관직에 오르는건 아무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군사관제위원회에서 《이 자료를 상급에 올려보내는것을 반대합니다. 나는 주덕해동지와 여러해동안 같이 사업하였기에 그의 력사에 대해서는 당신들보다 발언권이 더 있습니다. 자료의 내용은 터무니없는 날조이며 무함이며 근거가 없습니다. 연변지구의 군중조직으로서의 군관회는 실사구시적으로 상급에 자료를 올려 보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직을 기만하고 중앙을 기만하는것으로 됩니다. >》라고 대담히 자신의 주견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모원신과 맞서는 것은 <닭알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벼슬을 그만둘지언정 백성을 기만하고 자기를 기만하는 일은 절대 할수 없다》고 강경히 말하였다.

  모원신을 비롯한 사람들은 군분구내에서 《조남기를 타도하자!》는 활동을 책동하였으며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위협과 박해를 가했다. 지어 그의 7살에 나는 딸애도 가만 놔두지 않고 상처를 입혔다. 그는 6년동안이나 격리심사를 받았고 집을 수십차 털리였다. 그는 그때 일을 회고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문화대혁명에서의 경력을 통하여 나는 무엇이 진정한 실사구시인가를 알게 되였고 사업가운데서 옳은것을 견지하고 바른말을 하면 어떤 후과를 가져온다는것을 새롭게 인식하였습니다. 이전에도 이런 인식이 있었지만 문화대혁명때처럼 심각한적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나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령도간부의 유일정확한 선택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의 상급에 대해서 그랬고 자기가 맡은 사업에서 그랬으며 자기의 부하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랬다.

  그와 함께 일했던 한 하급군관이 제대한후 사업을 배치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남기장군은 그를 자기의 사무실에 불러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물어보면서 도와주고 일깨워주었다. 그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은 사람은 그 한사람뿐이 아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지위 높은 수장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선배나 속심을 털어놓을수 있는 친구와 같다고들 말한다.

  1987년 11월, 조남기동지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해방군총후근부 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때는 바로 국가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군비의 절대치가 증가되기는 하였지만 물가등귀 등 요소를 덜어버리면 부장성이였다.

  그가 총후근부를 맡아보는 동안은 군비증가비률이 물가등귀지수보다 훨씬 낮아 부대건설의 실제수요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군비사용은 구경 어떤 방침을 택해야 하며 제한된 군비로 최대의 효력을 발휘시키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것이 전군 후근사업에 직면한 중대한 문제로 되였다.

  총후근부 당위원회에서는 여러번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조남기동지는 《돈은 적지만 사업은 꼭 훌륭히 완수해야 합니다.》고 하면서 《퇀이상 기관에 대해서는 될수록 돈을 적게 쓰고 영이하 부대에 대해서는 눈앞의 곤난을 많이 해결해주는》방침을 제기하였다. 총후근부 당위원회에서는 일련의 효과적인 방침과 조치를 확정하였는데 그중 기초에 대한 보장을 뚜렷이 내세우고 부대를 위해 복무하는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였다.

  조남기동지는 총후근부 부장직무를 맡은후 해마다 3분의 1의 시간을 리용하여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사업을 하였을뿐만아니라 기층에 내려갈 때마다 늘 실제정황을 료해했고 말타고 꽃구경하듯하는 형식주의를 견결히 반대하였다.
어느 한번 조남기동지가 남강지구의 한 군대병원에 가 사업정황을 검사할 때였다. 그는 병원마당을 지나다가 무심결에 한 녀군인이 낡은 토피집에서 나오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상한 감이 들어 도대체 웬 일인가고 가보았더니 웬걸 그곳이 병원 녀간호원들의 숙사였다. 창문도 없는 캄캄한 비좁은 방에서 8명의 녀간호원들이 생활하는 것이였다.

  조남기동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온 병원 책임자동지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이나 군중의 립장에서 문제를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우리 눈앞의 이런 사실을 두고 말한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모두 자식이 있는데 만일 우리의 애들이 이런 집에서 생활한다면 우리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국방건설에 이바지하고 변강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데 어찌 그들더러 이런 곳에서 청춘을 흘려보내게 할수 있단 말입니까? 》

  사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부대주택이 허름한 문제는 부대건설에 영향주는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로 되였다. 많은 부대들이 1950년대에 지은 흙집에 있었고 어떤 부대는 심지어 일제통치시기에 지은 낡아빠진 주택에 있었는데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말이 아니였다. 일부 부대의 전사들은 저녁에 잘 때도 외투를 입구 솜신을 신어야 했다. 북경군구의 전사들은 이런 흙집을 《먼곳에서 보면 무덥같으나 가까이 가보면 문이 있고 사람이 있다.》라고 형용하였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주조건이 험악했다. 부대거주조건을 개조하는 것은 이미 부대를 안정시키고 기층을 공고화하는 급선무로 되였으므로 한시도 늦출수 없게 되였다.
비록 여러가지 곤난들이 많았지만 기층부대의 거주조건을 철저히 개선하려는 조남기동지의 결심만은 변함없었다.

  그는 충분히 의논하여 전망계획을 세우고 기관별로 전군 영이하부대의 주택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하였다. 총후근부 당위원회의 위원들은 한결같이 그의 생각에 찬성하였다.
하여 1988년부터 총후근부에서는 해마다 몇억원을 투입하여 영이하 부대의 주택을 개선하거나 재건하였다.

  조남기동지는 총후근부 부장으로 있은 동안 도합 수십억원을 투입하여 전군 영이하 부대의 주택과 부대설비를 종합적으로 개선하였다. 전국적으로 태반의 정규영이 새 주택에 들었다. 어떤 부대의 장병들은 새 주택에 들 때 기쁨에 넘쳐 폭죽을 터뜨렸으며 뜨거운 눈물까지 흘렸다.

  조남기동지는 부대의 거주조건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부대의 생활보장에 대하여, 특히 간고한 국경지대에 있는 부대의 생활보장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력사와 지리 조건으로 변방초소, 레이다초소, 관찰소, 미사일부대 등 단위는 고원산구나 변강, 바다섬에 자리잡고 있어 물마시기 어렵고 병보이기 어렵고 남새사기 어렵고 목욕하기 어렵고 몸을 덥히기 어려운 등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였다. 특히 서장과 신강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내지로부터 통졸임, 언고기와 기타 생활필수품을 실어와야 했기에 손실이 크고 원가가 높을뿐만아니라 부대의 수요를 원만히 담보할수 없었다. 부대의 장병들은 일년내내 신선한 남새를 먹지 못하고 《물기가 없는 마른 남새》만 먹었기에 체질이 대단히 약해졌다.

  조남기동지는 총후근부 령도직무를 담임한후 여러번 국경지대에 주둔하고있는 부대에 가서 고찰을 하였으며 또 몇번이나 신강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와 청장공로에 가 현지조산연구를 하였다. 그곳에서의 견문은 그로 하여금 실제정황을 장악하게 하였다.
조남기동지의 주최하에 열린 총후근부 당위원회에서는 경비와 물자공급에 있어서 국격지대와 간고한 지구의 부대를 많이 돌보는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여 해마다 몇억원의 돈을 전문 신강이나 서장지구에 주둔하고있는 부대와 전국적으로 《작고 분산되고 편벽하고 멀고 간고한》 2000여개의 기층단위에 돌려 간부, 전사들의 생활보조표준을 높이고 그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줌으로써 실제곤난들을 해결해주었다.

  조남기동지는 총후근부 부장으로 사업하는 동안 신강과 서장에 주둔하고있는 부대에서 《물기가 없는 마른 남새》를 먹는 력사를 꼭 결속지으려고 결심하였다. 해마다 전군후군부장회의가 열릴 때이면 조남기동지는 꼭 신강과 서장 두 군구의 후근부장을 전문적으로 청하여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는 이 두 부대의 부식품공급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자면 일시적조치만 취할것이 아니라 반드시 장구한 계획을 세워 부대로 하여금 자급자족하게 하거나 현지에서 해결하게 하여야 하며 이렇게 해야만 부대의 생활개선에도 리롭고 전쟁준비에도 리로우며 또 국가의 부담도 덜수 있다고 하였다.
조남기동지는 친히 이 일을 틀어쥐고 관철하였으며 여러번 관계부문과 부대에서 부식품생산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나타난 문제들을 연구, 해결하였다. 그는 《이런 돈은 쓸만합니다. 경제적측면만 고려하지 말고 부대의 전망적인 건설로부터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실시한후 부대장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뿐만아니라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조남기동지가 총후근부를 떠날 때는 국경지대의 부대에 존재하던 물마시기 어렵고 목욕하기 어렵고 병보이기 어렵고 몸을 덥히기 어려운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였으며 신강과 서장의 높고 추운 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 남새, 고기, 닭알을 공급하는 문제가 뚜렷이 개선되였다.

  조남기동지는 지방에서나 군대에서나 생활중의 사소한 일을 아주 중요시하였고 시시각각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였으며 공무에 충실했고 청렴결백하였다.
《만일 이 점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면 곧 큰 오유를 범하고 결국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때문에 구렁창에 빠진것입니다. 군중의 눈은 밝습니다. 진의장군은 한 시사에서 <손을 내밀지 말아, 손을 내밀면 꼭 잡히우게 되느니라. >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 도리를 말한것입니다. 우리의 권력은 당과 인민이 준것이지 개인재산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일한 의무는 당의 사업을 위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것이므로 자기의 사욕을 채울 권리가 없습니다. 그 누가 이 원칙을 어긴다면 곧 군중의 애대를 잃게 되고 결국에는 력사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 도리를 깨달은 조남기동지는 늘 이것으로 자신을 단속했기에 군중의 애대와 옹호를 받았다.

  1995년 7월에 조남기상장은 50년간의 군대생애를 끝마쳤다. 군사학원에서 진행된 전원대회에서 전체 간부들은 그칠줄 모르는 박수갈채로 장군에게 경의를 표시하였다. 장군은 웃음을 머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에서는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이 그칠줄 모르는 박수소리에는 장군에 대한 전체 장병들의 두터운 정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그의 사업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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