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집단군 정치위원 정순주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10-29 15:33:56    조회: 88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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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jpg  1990년 늦은 봄의 어느날 하이야 한대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료원시 위진진으로 통하는 공로에서 달리고 있었다.
뒤좌석에는 장군복을 입은 군인이 앉아있었다. 1메터 80센치가 넘을 키, 위엄기가 어린 네모진 얼굴, 어깨에서 번뜩이는 금별,,, 말 그대로 산악을 방불케하는 장군다운 모습이였다. 이분이 바로 모 집단군 정위인 정순주장군이다.
그는 이날 바로 전쟁년대에 사귀였던 주인집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40여년이 지난후라 집주인의 성이 증가라는것과 왼팔이 없었고 새납을 잘 불었던것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그는 끝내 이 선색으로 그들을 찾았던 것이다.
길 량켠에 줄줄이 늘어선 가로수들은 연두색 잎을 빼물고 있었다. 어느새 그 어린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거목으로 자랐단 말인가? 그는 새삼스레 이 나무들을 키워준 어머니 대지와 해빛, 이슬을 상기하였다. 지나간 40여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다.
과연 이름없던 나어린 전사를 장군으로 키운것이 역시 어머니조국과 당의 해빛이 아니였던가!



1

  1947년 10월 통화가 해방되였다. 통화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정순주네 마을도 해방의 기쁨에 들끓었다. 그들의 구장은 조선족이였는데 정순주에게 많은 혁명의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부득불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중국을 찾아와야 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 혁명의 도리를 여간 빨리 깨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마을과 구정부사이를 뛰여다니며 새 정권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어느하루 구에 일보러 갔던 그는 부대에서 신병을 모집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입대할 나이가 안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흘구정부에 박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세상뜬데다가 집에는 어머니와 그들 두 형제뿐이여서 집생활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집에 어머님과 어린 동생뿐이니 후방에 남아 집을 돌보오. 후방에도 혁명사업이 많고 많소.》
그의 집형편을 잘 알고 있는 구장은 그를 달래였다. 했으나 그는 오로지 참군하여 혁명할 일심으로 한사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동의하시지 않을가봐 두렵기도 했지만 설사 동의하신다 해도 어머니께서 상심하실가봐 걱정되였던 것이다.
부대가 떠나던 날 외삼촌한테서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들고 부대가 지나갈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을 본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눈물이 글썽하여 그의 어깨만 다독여 주었다…
어머니의 부탁을 새기며 혁명전사의 첫걸음을 뗀 정순주는 혁명에 자신의 일체를 헌신할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어를 한마디도 몰랐으므로 곤난이 남달리 많았다.

  비록 학교를 다녔지만 배운것은 일본말이였고 집에 돌아와서는 조선말을 하였으므로 한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부대선 말짱 한어를 하였기에 그는 잘 알아들을수도 의사를 표달할수도 없어 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언어상의 장애는 그에게 큰 시련으로 되였다. 어떤 사람들은 종일 입을 벌리지 않는 그를 두고 참군동기를 의심까지 하였다.

  어느하루 부대는 한 마을에 주숙하게 되였다. 그들은 백성들의 집에 가 식사를 하게 되였다. 그날 옥수수떡을 한 집과 조밥을 한 집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옥수수떡을 먹으러 가겠다는 것이였다. 줄곧 밥을 먹고 자란 그는 옥수수떡을 먹기 싫어 조밥 먹으러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 전쟁환경이 몹시 어려웠으므로 부대에서는 가끔 도주병이 생기군 하였다. 사람들은 아마 말하기 싫어하는 조선족꼬마가 도주할가봐 겁났던 모양이였다.

  조밥을 한 집에 이르자 반장은 주인을 불러냈다. 아마 단단히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이였다. 정순주는 반장이 주인에게 《밥을 다먹은 후에 혼자 내보내지 마십시오. 제가 와 데려가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순간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리해를 받지 못하는 서러움은 그더러 하루빨리 한어를 장악할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 그는 꾸준한 노력으로 한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배우기를 즐기는 그는 얼마 가지 않아 한어를 알아들을수 있었으며 한어로 의사를 표달할수 있게 되였다. 그는 또 한자도 많이 장악하게 되였다. 그의 기민성과 총명을 보아낸 퇀부령도들은 그를 퇀부의 통신원으로 올려왔다.

  1949년 부대가 남하할 때 퇀에서는 그를 정위의 경위원으로 배치하였다. 어느 하루 하북성 옥전현에서 잠간 머물었을 때였다. 부대가 금방 집합하였을 때 불현듯 적기 네대가 나타나 폭탄을 내리 떨구었다. 부대는 인차 소산하였다. 그런데 폭탄소리에 놀란 말이 많은 문건을 진채 네굽을 안고 뛰기 시작하였다. 만약 문건들을 잃어버리면 큰 야단이였다. 사양원이 곁에 없는 것을 본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후닥닥 뛰쳐 일어나 말고삐를 잡았다. 놀란 말은 미친듯이 뛰면서 그를 몇십메터 끌고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작열하는 폭탄속에서 고삐를 놓지 않고 끝내 문건을 보존하였다. 그는 이로하여 공을 세웠다…
차가 들추는바람에 장군은 회상에서 깨여났다. 차는 어느덧 위진진의 한 농가문앞에 이르렀다. 문이 열리며 한 할머니가 나왔다. 급히 다가가 뜯어보니 분명 증씨집 아주머니가 옳았다.

《아주머니,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전에 아주머니네 집에 들어있던 정꼬마입니다.》
아주머니는 한참이나 뜯어보다가 장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줄지어 내렸다.
《잊지 않고 찾아왔구만. 이렇게 고마운 일이라구야, 장군이 됐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요? 자네 형님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소.》

  알고보니 아주머니의 남편은 이미 5년전에 작고하였고 여섯 아이들중 다섯은 이미 분가하였으며 아주머니는 불구자인 막내아들과 함께 어렵게 살고있었다. 정순주는 코등이 시큰해났다. 간고한 전쟁의 년대에 증형님네 일가와 같은 천천만만의 인민들이 자기들의 피와 생명으로 우리의 군대를 양육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이 아직도 펴이지 못했다니… 정순주는 호주머니에 있던 돈 백원을 다 털어내여 아주머니께 드렸다.
《이후 곤난이 있으면 찾아오십시오. 꼭 도와드리겠습니다.》



2

열여섯 어린 나이에 참군한 정순주는 말 그대로 포화속에서 잔뼈를 굳히였다. 그는 장춘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하였으며 부대와 함께 줄곧 해남도까지 짓쳐나갔다. 그의 발자국은 조국해방의 전투마당에 찍혔다. 불과 2,3년밖에 안되는 사이에, 그것도 가렬처절한 전투의 여가에 짬짬이 배운것이지만 그는 한어말은 물론 한문으로 필기를 할수 있게 되였으며 지금에는 군에서 이름있는 서예가로까지 되였다. 하여 주위의 사람들은 주련을 써도 그를 찾고 지어 호텔의 이름을 써도 그의 손을 빈다.

  1950년 2월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되였다. 갓 참군하였을 때에는 너무 어려 강을 건늘때에도 로동지들한테 업히워 건넜고 급행군시에는 동지들이 대신 총을 메여주는 등 방조를 받던 그는 체질상, 정신상에서 모두 성숙하였다. 입당시 비록 당규약의 규정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의 특출한 성과로 하여 물의없이 통과되였다.

  그의 가슴은 숭고한 리상에 불타고 있었다. 확고한 신념은 나젊은 공산당원을 격려하였다. 그는 청천하는 전투사기로 뢰주반도를 해방하기 위한 전투훈련에 뛰여들었다…

  1950년 조선전쟁이 폭발하였다. 정순주는 항미원조에 뛰여들었다. 부대에서는 정순주가 조선족이고 문화수준이 높은걸 고려하여 련락원 임무를 맡게 하였다.
련락원의 임무는 과중하였다. 그는 통역임무를 완수하는 외에는 부대의 규률을 검사하였으며 짬나는대로 조선인민들을 도와주었다.
조선전쟁이 백열화되던 때였다. 적들은 부단히 무장특무를 후방에 투하하였다. 적들의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부대에서는 길목에 보초를 세우고 행인들을 검사하였다.

  어느날 정순주는 보초선을 지나다가 전사들이 오가는 행인을 검사하면서 녀인들에 대하여도 몸수색을 하는것을 보았다. 조선민족은 이런 행위를 몹시 꺼리는 민족이다. 이런 문제를 적시적으로 바로잡지 않으면 조선인민과 지원군사이에 큰 모순을 초래할수 있었다. 정순주는 인차 상급에 이 문제를 반영하여 시정하게 하였으며 지원군부대와 조선인민의 관계를 밀접히 하였다.

  조선전쟁이 끝난후 귀국한 그는 줄곧 81054부대에 있다가 1963년에 북경경위사에 전근되여 중남해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비록 항미원조를 마치고 돌아온후 포효하는 말의 호용소리와 자지러진 총소리, 포소리는 멀어졌지만 군인으로서의 투쟁정신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그는 전투에서 용맹한 군인이였고 평화시기에는 당의 사업과 군대의 건설을 위해 실사구시적으로 헌신적으로 일하는 뛰여난 정치사업일군이였다.

  실사구시적인 사업태도는 그의 독특한 특점이였다. 어느 한번은 누군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안해도 부대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한 지도원의 선진적인 사적을 회보하는 것이였다. 여기까지 들은 정순주의 마음은 석연치 못하였다. 선진일군이라 하여 칠정이 없을수 있단말인가? 선진일군이라 하여 칠정이 있으면 안된단말인가? 그는 여기에 꼭 어떤 사연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튿날 정순주는 이불짐을 메고 이 지도원의 소속련대에 내려갔다. 그는 전사들과 담화하고 간부들한테서 료해하였으며 본인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사결과 이 지도원이 이태동안 집으로 가지 않은것은 결코 사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촌에 있는 안해와 감정이 맞지 않기때문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인차 그릇된 보고내용을 수정하게 하였으며 실사구시적으로 사업하는 본보기를 아래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내심한 교양으로 하여 그 지도원과 안해는 끝내 화목해졌다.



3

  1965년, 전례없던 동란이 시작되였다. 해방군화보사에서 사업하던 동생이 《나라를 배반하고 외국과 내통하려 했다》는 죄명을 들쓰고 감옥에 들어가자 형인 그도 련루되였다. 게다가 강생이 중남해에 소수민족간부를 두지 못한다는 지시를 내렸기에 정순주는 더는 중남해에 있을수 없게 되였다.

  정순주를 알만큼 아는 부대의 수장들은 더없이 아까와하면서 만약 그가 북경에서 사업하고 싶다면 북경의 다른 부대에 전근시켜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순주는 오로지 원 부대에 돌려보내달라는 말을 했을뿐이였다. 중남해를 떠나던 날 그는 무겁고도 착잡한 심정을 지니고 자기가 걸어온 길을 회고해 보았다. 핍박에 의해 사랑하던 중남해를 떠나야 했지만 그는 자기의 입당선서에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중남해에서 내보내는것은 그 시대의 력사가 그에 대한 공정치 못한 대우였지만 그는 결코 이것으로 하여 소침해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잠시적으로 억울함을 당하지만 그 어느날인가에는 당에서 꼭 자기의 일편단심을 믿어주리라는것을 확신하였다.

  1969년 그는 원 부대로 돌아왔다. 혼란하던 그 년대에 중남해에서 《축출당한》 그에게는 많은 불신임의 눈길이 뒤따랐다. 그가 돌아온지 반년이 넘도록 그에게는 사업이 배치되지 않았다. 그는 내심하게 기관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업을 거들어주면서 묵묵히 기다리고 기다렸다.

  반년이 지난 어느날 조직에서는 그에 대한 심사를 마치고 다시 요직에 중용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는 군정치부 조직처 처장으로 임명되였다. 이때로부터 근 10년동안 그는 이 요직에서 사업하였지만 한번도 사업의 편리를 리용하여 사리를 도모하거나 당의 명성에 손상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정순주가 퇴근하려는데 전화벨이 급작스레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알고보니 《무쇠주먹》퇀의 리룡욱이라 부르는 조선족전사가 입당문제로 지도원과 대판싸움이 붙었는데 정황이 몹시 위급하니 상급에서 빨리 내려와 처리해달라는 것이였다.

  이런 일은 워낙 보위부문에서 처리해야 할것이였을뿐만아니라 더욱이 조선족전사의 일이기에 딴 사람이면 회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것저것 자기한테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따질사이없이 기관의 한 간부와 함께 련대로 내려갔다.
리룡욱은 참군한지 4년되는 전사였다. 참군한 이래 표현이 줄곧 괜찮았으나 규률이 산만한 병집이 있었다. 그가 이전에 련의 통신원으로 있을 때 지도원이 그한테 입당시킬 뜻을 내비친적이 있었으나 제대할 때가 되였는데도 입당시켜주지 않으니 분명 그가 자기를 속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순주는 그와 담화하면서 입당동기에 대해 물었다. 리룡욱은 형님이 둘 다 부대에서 제대할때 입당하고 돌아갔는데 자기만이 입당못하고 가면 낯이 깎인다는 것이였다. 정순주는 그에게 내심한 사상교양을 진행하여 입당문제에 대한 바르지 못한 그의 인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정순주의 적시적으로 되는 사업으로 하여 미연에 악성사고를 방지하였으며 한 전사의 사상위기를 만구하였다. 리룡육은 제대하여 마을에 돌아간후 편지를 써 정순주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4

  당의 11개 3중전회후 새로운 시대가 열려졌다. 우리 당의 력사에서 제일 억울한 사건이였던 원 국가주석 류소기동지한테 들씌웠던 루명도 벗겨졌다. 당내외의 많은 동지들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지만 극 《좌》사조의 영향을 엄중하게 받은 사람들은 일시 리해하지 못하였다.

  1979년 가을, 모화춘이라 부르는 한 나젊은 전사가 이에 불복하여 단식을 전개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각급 령도기관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투쟁방법을 《승급》시켜 단식을 선포한것이였다. 그는 절명신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당은 변하였다. 우리들은 희망이 없게 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살 의의가 없다.》

  모화춘의 문제는 마치도 중형작탄마냥 군부를 뒤흔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뻔한 문제이지만 그때는 금방 좌적인 질곡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여서 이렇게 민감함 문제를 놓고 상급기관에서도 속수무책이였다. 모화춘의 소속련대 당지부에서는 이것이 엄중한 정치문제이기에 반드시 상급에 맡겨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퇀령도와 기관에서는 이것은 일종 반혁명성질을 띤 정치사건이므로 법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했으며 군기관의 일부 동지들은 지금은 한창 4인무리의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때인데 모화춘도 잔여세력이기에 즉시 법에 의해 처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순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문회의를 열고 모화춘의 문제를 실사구시적으로 처리할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한 나젊은 전사의 정치생명에 대해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또 당의 정책에 책임져야 합니다. 한두마디의 극단적인 말을 가지고 경솔히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깊이 들어가 조사하여 정확한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정순주는 공작조를 거느리고 모화춘의 소속련대에 내려갔다. 모화춘은 군인가정 출신이였다. 어려서부터 군영에서 자란 그는 줄곧 농후한 정치분위기속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줄곧 류소기가 반역자이며 공인역적이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하루밤새에 180도로 전변되니 일시접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좌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랐던 그는 모주석이 계실때 결정한 일을 개변하려는 사람들을 반혁명이라고 단정하게 되였으며 우리 당의 결정을 의심하게 되였던 것이다.

  세밀한 조사를 거쳐 정순주와 조사조의 동지들은 이렇게 인정하였다. 첫째로 모화춘의 가정과 학교로부터 부대에 참군하여서까지의 경력을 보아 《4인무리》의 잔여와는 꼬물만한 련계도 없으며 그가 《문화대혁명》중에서 세가지 부류로 될 조건도 없다. 그것은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였을 때 그가 겨우 소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둘째로 모화춘이 반영한 문제는 사상인식문제이지 당중앙을 반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친히 모화춘과 함께 당의 실사구시의 사상로선을 학습하였으며 《문화대혁명》때문에 입게 된 재난을 분석하였으며 《두개 반드시》의 위해성을 분석하였다. 학습과 교양을 거쳐 모화춘은 큰 전변을 가져왔고 모화춘의 문제는 인민내부모순으로 정확히 처리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처리는 인차 총정치부와 신화사에 알려졌다. 이 처리과정은 선후하여 총정치부의 《선전간보》와 신화사의 《내부참고》에 실렸다.



5

  정순주장군한테는 진귀한 사진책이 있다. 그는 이 사진책에 전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인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두었다. 이 사진들속에서 우리는 전연초소를 찾아간 정장군의 모습도 볼수 있고 전사들과 함께 춤추는 정장군의 모습도 볼수 있다. 40년만에 잊지 않고 옛주인을 찾아가 보는 후더운 마음씨와 같이 그는 시종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했고 수하의 간부들과 전사들을 사랑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정장군은 모 부대에 사업검사를 갔다가 점심을 잡순후에 습관적으로 혼자 부대양돈장을 돌아보았다. 양돈장을 책임진 장도덕은 돼지죽을 주다말고 급급히 장군에게 군례를 올렸다. 장군은 그의 검고도 여윈 얼굴을 바라보며 못내 가슴아파하였다.

  장동무는 워낙 지원병이였는데 양돈장을 책임진 몇년이래 부대의 화식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종래로 휴가일을 쉬여보지 못했다. 그는 심양군구에서 이름난 양돈장원으로 되였으며 파격적으로 간부로 제발되였다. 얼마나 훌륭한 동지인가? 그는 부대를 위해 너무도 고생하였다.  정장군은 인차 장도덕과 사양원들과 인사하고 돌아온후 군부의 관계부문에 지시를 내려 그를 부대의 료양소에 보냈다.
경치가 아름다운 대련의 해변가에서 처자와 함께 모래톱을 거닐 때 장도덕의 마음에서는 뜨거운 난류가 굽이쳤다. 그는 이런 수장의 수하에서 일하는것도 하나의 행복이라고 느꼈다.

  정순주는 어떤 정황에 맞띄우든지 절대 기층에서 신근하게 헌신적으로 일하는 간부들을 잊지 않았다. 어느 한번은 기층련대에 조사를 내려갔다가 련장이 삼년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여 부인이 성을 냈다는 반영을 들었다. 알고보니 련대의 지도원이 집이 북경에 있고 고위급간부의 아들인데 해마다 춘절이면 그가 휴가를 신청하고 퇀에서도 군말없이 꼭꼭 청가를 주었다는 것이였다. 이럴 때마다 농촌태생인 순박한 련장은 언제나 풍격을 발양하여 지도원더러 집에 돌아가게 하고 자기는 련대에 남아 전사들과 함께 설을 쇠였다는 것이였다.

  이런 정황을 안 정장군은 몹시 격분하였다. 이게 어디 된말인가? 왜서 풍격이 높고 헌신적인 사람이 늘 손해를 봐야 한단말인가? 정장군은 북경의 고위급간부의 불만을 자아낼것이라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이 지도원을 준절히 비평하고 금후 춘절휴가시에 꼭 이 련장에서 우선적으로 휴가를 줄것을 명령하였다. 정장군은 기관의 동지들에게 소속부대간부들의 춘절휴가정황에 대하여 조사를 하게 하였다. 결과 류사한 문제가 많이 제기되였다. 그는 부대에 지시를 내려 춘절휴가문제에서 뒤문거래를 하거나 개인리익만 앞세우고 다른 동지들의 리익을 해치는 일을 두절하도록 하였다.

  장군의 품은 따사롭고 넓었다. 장도덕이나 이 련장말고도 장군수하의 장병들은 이것을 너무나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이는 춘절에도 기층에 내려가 전사들과 함께 설을 쇴고 온 밤을 쉬지 않고 주련을 써주었다. 그이는 또 보초를 서는 전사들이 춘절문예야회를 보지 못하는것을 념려하여 60을 바라보는 년세에 대신 보초를 서주군 하였다.

  그이는 공적높은 장군이시다. 그이는 우리 인민들속의 평범한 일원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조선족중에 이렇듯 대단한 장군이 또 한분 계시는것으로 하여 조선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출중한 인물이 간단없이 배출되는 위대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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