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1-19 10:44:41    조회: 140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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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라가평의 조선의용군 녀전사들. (자료사진)
란영이는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조선녀성으로 알려진다. 연극에서도 장끼를 보이였다. 태항조선혁명청년학교에서 매번 신입생을 환영하거나 여러 기념일에 문예공연을 가질 때면 란영은 의례 배우로 활약하였다. 류동호의 회고문을 보면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연극 <조국의 딸> 녀주역과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 <태항산우에서>의 녀병사역도 란영이 맡아나섰다고 한다. 그 시절 태항학교에서는 자주 오락회나 야회를 가지였다. 그럴 때면 란영은 어김없이 나서서 30년대 눈물의 노래-<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그중 1절은 아래와 같다.


사공의 배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전라남도 항구도시 목포는 일제에 의해 수탈된 호남의 기름진 쌀이 일본으로 실려가는 눈물의 항구였고 생계를 도모하고저 가족들과 헤여져야 하는 생리별의 부두였다. 이같은 일제수난기 우리 겨레의 력사와 시대상을 그대로 담은 목포의 눈물이기에 매번 란영이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강렬한 공명을 일으키군 하였다. 때론 무정도 참가하여 란영의 노래를 들으며 눈굽을 찍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1944년 음력설 직전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개칭된 군정학교에서 일년사업총화를 가질 때 무정은 란영-김영숙이를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 과장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란영-김영숙은 그럴만한 혁명경력과 자격을 가진 조선녀성이였다. 마침 그해 1944년 3월, 일본군에서 탈출한 정철준(고철) 등 몇몇 열혈 조선청년들이 태항산근거지 하남점에 이르게 되였다. 그런 정철준은 김영숙이를 이렇게 그려내고있다.

(하남점의) 큰 거리를 벗어나 운동장같은 광장, 기실은 그 동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흰샤쯔에 진한 남색 양복바지를 입고 등뒤로 十자형으로 내리 건 멜방에 쌍태머리를 짤막하고 가쯘하게 짜르고 량쪽 팔소매를 걷어올린 나이 한 30이 될상싶은 얼굴이 하야말쑥한 녀성청년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보이는 회고자료들에서 유일하게 김영숙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자료라 하겠다. 여기에서 김영숙의 외모와 입은 옷들, 대략의 나이가 나타나 주의를 끄당긴다. 1944년에 나이 30살 쯤이면 1914~1915년 생 정도로 헤아려볼수가 있다. 그러면 1905년 생인 무정보다 약 10살 정도 어린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김영숙은 30살 정도가 아니라 20대 중반의 조선녀성이였다.

정철준 일행이 하남점에 이르자 선참 맞아주는 이가 김영숙이다.

“동무들이구만요. 수고했습니다.”

김영숙은 조선녀성답게 인사를 하며 그들의 손을 굳게굳게 잡아주었다. 그때 정철준 일행은 이 조선녀성이 조선독립동맹 조직과장임을 몰랐지만 팔로군내 조선동지들 대오에 “녀성동무도 있구나”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김영숙이 그들 일행을 골목길 지나 큰 거리 앞에 자리한 조선독립동맹 태항분맹 사무실로 안내하니 1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우르르 모이며 악수를 하며 열성적으로 맞아 주었다.

2~3일후 조선독립동맹 태항분맹구락부에서 정철준일행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리였다. 정철준의 회고에 따르면 회장 정면에는 태극기가 정중히 걸려있고 ‘새동지입맹환영대회’라는 프랑카드, 량쪽으로는 ‘첩첩한 봉쇄선을 돌파하고 우리를 찾아오신 세 동무를 열렬히 환영한다’와 ‘일제의 강제학도병을 반대하여 일제병영에서 탈출한 세 동무를 환영한다’라는 구호가 내리걸리였다.

환영대회는 조직과장 김영숙의 사회하에 열리면서 구락부 주임의 지휘로 부르는 혁명가와 의용군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였다. 노래에 이어 김영숙이 정철준 등의 경력을 소개하고 입맹지원서를 랑독하였다. 김영숙을 따라 태극기 앞에서 두주먹을 부르쥐고 입맹선서를 하는 그들은 마음이 세차게 설레이였다. 정철준 등의 조선독립동맹 입맹, 조선의용군 참가가 통과되였으니 때는 1944년 3월 25일의 일이다.

환영대회는 무정의 총화보고로 이어졌다. 정철준은 무정사령원의 모습도 그리여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중키에 몸도 알맞춤하게 퉁퉁하고 상고머리를 가뜬하게 깎아올린 분이 군중의 박수소리속에서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책상우의 남포불을 가까이 놓고 돋보기를 꺼내들더니 수첩을 꺼내놓고 총화보고를 시작하였다. 어느 사이에 정리하였는지 우리 셋이 폭로해놓은 원시자료를 일제의 본질에 결부시켜 리론상으로부터 하나하나 총화해나아갔다. 음성은 낮으나 우렁우렁한 그의 목소리는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우리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더우기, 중공당사의 례를 들어 설명하는 3대각오-진정한 혁명자가 되려면 얼어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적의 총알에 맞아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그리도 인상적일수 없었다.

이튿날인 1944년 3월 26일, 조선독립동맹 태항분맹구락부에서 새동지 환영만회가 열리였다. 석유램프가 무대를 환히 밝히는가운데 만회가 시작되였다. 처음 절목은 <엉터리음악대>인데 조선독립동맹의 조직부와 선전부의 조직과장 김영숙을 비롯한 선전과장 양계, 재료과장 박무, 적군과장 고봉기 등이 주요배우들이다. 그들은 독립동맹의 골간간부들이자 선전고동자이고 배우이기도 하였다.

악기류 또한 희한도 하다. 기본악기가 하모니카와 퉁소라면 동네서 빌어온 중국식 대고와 제금, 죽판(竹板)에 두드리거나 흔들면 소리나는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온다. 그에 걸맞게 혁명가로부터 시작하여 합창, 독주, 독창, 연극 구전하다. 양계의 <동지>라는 시랑송도 등장한다.

환영만회의 마지막 종목은 김창만 작인 단막극 <북경의 밤>으로 펼쳐진다. 독립동맹의 지하사업일군이 일본헌병대 고문실에서 적들과 최후의 투쟁을 벌리는 내용을 주선으로 엮어졌다.

그후 어느날 독립동맹 선전부장 김창만이 정철준을 찾더니 오는 단오절에 화북조선인민대표와 일본군내의 조선학도병대표들이 모여 일본반파쑈대회를 소집하니 극본을 하나 써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이렇게 극본 하나 써보지 못한 정철준은 강제학도병으로 가정이 파탄되고 미혼처와 생리별하게 되는 내용을 주제로 극본쓰기에 나선다. 이같이 정철준은 김창만의 지지와 받들림으로 꼬박 사흘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며 2막으로 된 극본을 써내게 되였다. 그 다음은 꿈나라, 얼마를 잤는지 권혁(权赫)이란 친구가 깨우는 통에 일어나보니 조직과장 김영숙이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닭알을 수북이 담은 바가지와 서너근 되는 백설탕을 가지고 왔었다.

“닭알과 백설탕은 무정 동지가 보내신거야요. 닭알은 산 것이고 사탕가루는 조직에서 무정 동지에게 공급한 것인데 동무들이 수고한다고 보내주신것이죠.”

정철준은 황송하기가 그지없었다. 사탕가루는 조직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인 무정 동지에게 공급한 것이라고하니 더구나 그러하다. 아무리 사양하여도 안되였다. 정철준은 조선의용군내 동지와 동지간의 마음, 사령원과 전사들사이에 서로 이어진 동지우애의 정신을 한껏 느끼였다. 온몸에는 끝없는 행복과 무궁무진한 용기과 힘이 샘솟았다.

어느덧 1944년 봄도 가고 여름도 가고 서늘한 9월이 다닥쳤다. 태항 군정학교의 학원수는 날로 늘어나 하남점에 있는 분맹의 집만으로는 다락방을 치우고 상하 이층생활을 해도 태반 부족이다. 군정학교는 새동지들을 맞을 경리부만 남기고 서남쪽 언덕 약 3리되는 남장마을 전에 쓰던 절당으로 이사하였다. 군정학교는 새간판을 내걸었다. 교장은 의연히 무정이고 교도주임은 김창만, 조직사업은 김영숙이였다. 정치교원은 양계, 박무가 맡고 군사교원은 서휘, 리익성, 한경(韩晶) 등이 맡았다. 기동에서 약 80명의 새동지들이 와서 합치니 대오는 착실히 200명을 웃돌았다.

이들 200여명 속에는 금방 태항산으로 온 안화응(安华应)이라는 젊은이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안병진(安秉珍)은 조선과 중국, 쏘련 등지를 동분서주하면서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재건을 위해 싸우는 이름난 조선혁명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러다가 1927년에 조선 신의주에서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10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42년에는 점원으로 일하는 목재상점을 따라 천진으로 오면서 조선독립동맹 지하혁명가로 활동하게 되였다. 따라서 아버지를 거의 모른채 고향땅 둘째 아버지네 집에서 자라면서 겨우 중학공부를 마친 안화응이 1944년 봄에 아버지를 찾아 천진으로 오게 되고 1945년 봄에 혁명대오를 찾아 태항산에 이르게 되였다.

안화응이 태항군정학교로 온후 조직과장 김영숙이 그를 찾아 개별담화를 하였다. 개별담화에서 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을 대표하여 안화응의 아버지를 높이 평가(안화응. 향도자.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1987년 8월 출판, 제447페지)하여 주었다.

“안병진선생은 일찍부터 조선독립과 조선공산당건설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헌신적으로 싸웠지요. 지금도 험악한 적구에서 우리와 련계를 갖고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위하여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하고 계시지요.” 김영숙은 조용히 담화를 이어갔다.

“원래 동무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동무를 무정 동지가 지도하는 우리 태항산근거지로 보내려고 했지만 그 자신의 신분은폐에 불리할가봐 지금까지 미루어 왔지요. 이번에 현파(玄波)동지가 나선데서 동무는 무사히 태항산으로 오게 되였어요.”

김영숙은 안화응이 태항산으로 오게된 자초지종을 자상히 설명하여주면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혁명가로 되기를 바랐다. 동맹의 조직과장인 김영숙은 새로운 동지들이 올때마다 관련 분맹과 조직선을 통해 그들의 신분과 경력을 헤아리면서 조직의 순결성을 담보하여 나섰다. 이는 김영숙의 드팀없는 선차적인 과업이였다.

1945년 7월 1일에는 무정과 함께 조선독립동맹과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이 연안 라가평에서 소집한 중국공산당창건 24돐기념대회에 참가(연안 “해방일보”. 1945년 7월 11일자)한 모습을 보이였다.

그뒤 태항산근거지의 8월 15일 저녁이다. 신입전사이고 학원인 정철준이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고 벽보편집내용을 머리로 굴리면서 운동장을 서성이는데 김영숙이 헐레벌떡 교문안으로 달아가고있었다. 정철준을 보고는 어서 오라고 손짓하였다. 방금 식사를 끝낸 동지들이 우르르 모이자 김영숙이 종이장을 흔들면서 흥분을 터뜨렸다.

“지금 신화사에서 전문이 왔는데 일제가 동맹국에 무조건 투항했대요.”

“와-” 탄성과 함께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서로들 부둥켜안고 껑충껑충 뛰며 돌아갔다.

“그게 정말이예요?”

“그럼 정말이 아니고. 동무만 혼자 태항산에 남겠어요?”

정철준의 어린애같은 물음에 김영숙은 깔깔 웃어댔다. 김영숙은 조선녀성다운 풍모에 활발한 성격을 가지여 동지들가운데서의 인기도가 언제나 만점이였다. 그녀가 나타나는 곳에는 웃음소리가 터지고 분위기가 자못 활기를 띠여갔다.

무정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왕안순과 그의 안해. (2009년 8월 현지촬영)

 

제 16부 광복 전후

조선만주공작위원회

무정은 조선(한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평생을 바쳐가는 사람으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중국혁명에 투신하면서도 항상 조선의 해방을 념두에 두고있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의 래일이 멀지 않았다, 가까워오는 조선혁명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조선독립동맹 여러 분맹의 활동과 더불어 조선국내와 중국 동북쪽에도 폭넓게 살손을 대였다. 그 실제행동이 1944년 9월에 3명의 동지를 책임자로 하는 ‘조선과 만주공작위원회’(鲜洲工作委员会)를조직한것이다. 따라서 조선국내에 2명의 지하공작자를 파견하였다. 그들의 과업은 국내에 분맹조직을 내오면서 적들의 조선에서의 징병을 반대하는한편 독립의 힘을 키워가는것이였다.

무정이 기초한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에 따르면 일제놈들의 통치와 략탈, 감시가 따르는 조선(한국)의 현실에서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발전하기로 하고 조직형식면에서 일률적인 독립동맹 분맹과 소조형식을 취하지 않고 여러 합법적인 조직과 어용조직을 리용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서 지하공작의 중점을 조선(한국) 북쪽과 서쪽에 두고 활동의 중심을 서울을 중심으로 하였다. 먼저 서울-회령쪽 선과 경원선(京元线), 함경선(咸镜线), 길회선(吉会线) 등 철도와 부근 도시들에 활동거점을 잡았다. 다음 서남방향의 농촌으로 발전하였다. 서쪽면의 지하공작에서는 경의철도(京义铁路)와 부근의 도시들에 활동거점을 박았다.

무정은 국내에 지하공작자를 보내여 일찍 독립운동에 나선적이 있는 동지들을 찾는데도 큰힘을 들이였다. 먼저, 중국대혁명이 실패한후 자기와 같이 일찍 중공상해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여 조선국내 감옥에 투옥되고 석방된 로동지들을 찾게 하였다. 다음은, 무정이 중국으로 진출하기전 조선에서 같이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변절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 다음은, 무정의 옛 동창들이였다.

무정의 사업경과보고에는 1944년 6월에 상해조선인지부에서 서기로 활동했던 동지를 찾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무정의 사업경과보고에 따르면 이 동지는 1930년에 상해에서 적들에게 체포된 후 일제령사관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여 7년형을 받았고, 석방된 후 서울부근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비밀활동을 벌리고있었다. 여러 면의 자료고증을 통하여 무정이 말하는 이 동지가 려운형이라는것이 밝혀졌다. 려운형 관련자료에 따르면 사실 상해에서의 려운형의 체포는 1930년이 아니라 1929년 7월이며 혐의는 독립운동지원으로서 상해 주재 일본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였었다. 복역도 7년이 아니라 4년이였다.

려운형(吕运亨,1886.5-947.7)은 경기도 양평군 출신으로서 1900년배재학당(培材学堂)에서 기독교를 접하며 활동하다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게 되였다. 그는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결연히 중국으로 와서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남경금릉대학(南京-陵大学)에서 3년간(28-30세) 영문학과 철학을 배웠다. 1916년에는 상해로 가서 협화서국서점에 취업하면서 선교사, 인성학교 교사, 려행대행업 등을 했다.

1918년 상해에서 장덕수(张德秀)를 만나면서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가지기 시작했으며 신한청년당(新韩靑年党)을 발기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림시정부가 조직되자 림시의정원(临时议政院)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출처: http://www.iybrb.com/news_vew.aspx?id=6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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