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1-20 10:52:20    조회: 31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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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구 촬영기자 리도(李途)가 1943년 여름 찍은 진찰기변구 생활 촬영작품 (자료사진)



"1945년, 조 선 의 용 군
사령 무정은 진찰기변
구정부 위문단을 무
어 팔로군이 지도하
는 진찰기변구에 가
서 위문공연을 하자

고 제의했다."



무정 장군의 평전을 집필하면서 1945년 봄 태항산 생산운동을 밀고나가면서 남긴 육성자료를 한국 《위클리경향》에서 찾아냈다. 《위클리경향》은 경향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로서 1992년 《뉴스메이커》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였다가 2008년 《위클리경향》으로 개칭되였다. 무정 장군의 육성자료는 여기 위클리경향에 등장하고 있는데 원문은 아니고 전문도 아니지만 무정 장군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되므로 여기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동무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릴 것은 금년에 있어서 우리가 응당 하여야 할 생산공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작년(저자 주: 1944년을 가리킴)에 생산공장에 참가하여 본 여러 동무들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우리는 재작년 봄에 이 태항산 청천(淸泉) 저 비탈에 화전을 이루고 600묘(무)나 되는 땅에 붉은 무와 감자, 호박을 심고 가을에 도라지를 캐고 도토리를 주었던 연고로 우리는 량식과 채소 등 곤난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였다.

…좋은 양복에 훌륭한 구두를 받쳐 신고 맛나는 음식에 호화한 생활을 지내던 동무들은 이제 와서는 이와 같이 몸에 이가 꼬이고 헌옷을 입고 버선없는 맨발 초신에 춥고 발 시리며 배가 고픈 이 생활로 적을 대항하는외에 화전농업까지 하느라고 두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아프게 되니 한숨이 자연히 계속하여 나오면서 마치 그 고생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고 그 생활을 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나 표현으로 되는 동무도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였다.

…이 태항산 바위돌 벼랑가에 덤불 속으로 슬렁슬렁 그냥 다니면서 도라지를 주을 때에 저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태항산 비탈에 옥도라지 한두뿌리만 캐여도 의용군 식량이 되누나”, 여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강원도 금강산에 백도라지!” 이와 같이 산허리와 산등에서 울려나오는 도라지 타령으로 우리는 저 산의 도라지를 다 캐내고 저 산에 도토리를 몇 알 남지 못하고 다 주어 메였으며 그야말로 가죽나무 밑에서 기다리는 도토리 한알 밤 나는 것이 우리 고국에서 기다리는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기쁨이 못하지 않았고 보기만 하면 얼른 손을 뻗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도토리 한알을 우리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즉 우리의 적을 소멸하는 힘이 한알 분량이 증가됨으로 알았고 도라지 한뿌리를 캐서 바구니에 넣으면 일본제국주의자를 반항할 힘이 한 뿌리 분량이 증가한 줄 알게 되는고로 작년 봄에 양식 곤난이 우리를 포위하고 산면(山面)에서 들어온 왜적이 우리를 토벌하는 환경에 우리는 이 도라지와 도토리의 덕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입는 문제, 먹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됨으로써 작년보다 고생이 좀 덜하게 되였으니(…)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모퉁이에서든지 적에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굶어죽을 각오를 하여야 우리에게는 적을 소멸할 용기가 생길 것이고 방법이 생길 것이며 최후로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혁명자의 최고로 되는 혁명적 우애성을 발휘하여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돕는 정신으로 몸이 약한 동무를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맡은 사업을 더 속히 원만히 힘있게 완성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를 두드려 부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일본제국주의자를 반대하는 데 복종시키자!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자!

이는 2008년 11월 6일, 《위클리경향》에 오른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상)에 나오는 무정의 육성자료로 알려진다. 무정의 이 육성자료의 진위를 잘 알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광복 한돐을 기념으로 펴낸 《애국투사 연설집》에 나오는 무정 장군의 육성이라고 한다. 시간은 1945년 봄으로 추정되고 이야기한 장소는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총부 앞 련병장으로 밝혀져있다. 아마도 첫패의 태항산동지들이 연안으로 떠나간 후 남았거나 새로 입대한 조선동지들을 대상하여 련병장에서 이야기한 것 같다. 필자는 아직 이 육성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였지만 이 육성자료가 사실이라면 무정 장군 연구에서의 귀중한 자료라고 지적하고 싶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은 여기 육성자료에서 꾸밈없고 손대지 않은 소박한 말투로 1943년 봄부터 태항산 남장촌 가까이 오지산에서 대생산운동을 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붉은 무와 감자, 호박 등을 심던 이야기부터 터놓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대도시에서 생활하며 좋은 양복에 구두까지 받쳐신던 이들이 헌옷에 맨발 초신으로 춥고 발 시리며 배고픈 생활과 화전농사를 하면서도 조선민요 도라지를 부르며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으로 차고 넘치는 조선동지들의 모습을 생동하게 보여준다.

그같이 어려운 태항산의 생활 속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적의 총알에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굶어죽을 각오를 하여야 우리에게는 적을 소멸할 용기가 생길 것이고 방법이 생길 것이며 최후로 적을 이길 수 있다는 무정 장군이 그지없이 우러러보인다. 조선의용군 출신 정철준(郑哲俊,高哲)은 이를 진정한 혁명자가 되는 ‘3대 각오’라고 하면서 1944년 3월 25일 태항산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입맹선서를 하던 날 무정 장군이 총화발언을 하면서 이야기하던중 강조하여 지적하더라고 한다.

이러고 보면 무정 장군이 말하는 혁명자의 ‘3대 각오’는 장군의 육성자료에서 처음이 아니며 수차 언급하고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무엇을 위해서던가? 일본제국주의자를 두드려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정치가식이 아닌 무정 장군다운 소박한 말투와 력사적 진실과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무정 장군의 육성자료는 신빙성이 있고 믿을 만하다고 보아진다. 이것이 바로 무정 장군이며 이것이 바로 희망의 래일 안고 싸우는 태항산항일근거지 생생한 생활화폭이다.

조선의용군 진찰기변구 위문단이 거친 하북성 보정시 부평현 경내에 위치한 진
찰구군구 사령부 옛터 사진 (자료사진)


진찰기변구 위문단

1945년 봄도 가고 초여름이 다가왔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진찰기변구정부 위문단을 무어 팔로군이 지도하는 진찰기변구에 가 위문공연을 하자고 제의하자 조선의용군 극단동지들과 관련 동지들을 환락으로 넘치게 하였다. 위문단의 명칭은 ‘재화북조선인민 각계 대표 항일변구인민 및 항일변구정부위문단’으로 잡고 단장은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장 김창만이 직접 책임졌다. 위문단은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였다.


조선의용군 녀전사 리화림의 회고에 따르면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 무정은 1942년 8월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결정에 의하여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되여오자 자기가 직접 조직한 팔로군 포병퇀 선전대의 전례에 비추어 인차 조선의용군 극단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조선독립동맹의 주요 간부의 하나인 김창만이고 주요배우들은 김위, 최채 등이였다. 그들은 조선의용군 부대와 팔로군부대, 근거지 군중들 공연에 자주 나섰는데 리화림은 “그들이 무대에 나설 때마다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조선의용대의 광서 계림 등지의 활동에서 이미 김창만과 김위를 소개하여보았지만 이들은 부부간이였다.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들이 1939년 3월 계림의 신화대극장에서 가극 <아리랑>을 처음 공연하면서 김창만과 김위는 크게 이름이 났다. 그 후 그들은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소속되여 활동무대를 호북전방으로 옮기면서 제2지대에서는 항일선동공작을 보다 폭넓게 벌리고저 전선연극단을 조직하게 되였다. 연극단 책임자는 이들 조선의용대 제2지대 지대장 리익성이고 주요배우들은 김위 녀사와 김학철, 진동명 등이였다. 각본 창작과 연출은 김창만이 맡고 전문 무대장치는 최동광이 맡아나섰다.

김창만은 문학에 뜻을 둔 젊은이여서 가극 <아리랑>도 창작하고 <황군의 꿈>이란 극본도 집필하였다. <황군의 꿈>은 인차 긴장한 련습을 거쳐 무대에 올렸다. 이어 연극단은 호북 대홍단일대에 있는 국민당부대를 다니면서 선후하여 10여차례의 순회공연을 펼치였고 번마다 대성황리 속에서 막을 내리군 하였다. 1940년 12월에는 서안에서 전시선전대로 활동하면서 <황군의 꿈>을 재차 무대에 올렸는데 그 선전효과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김창만이나 김위는 이 같은 조선의용대 전선연극단 출신들이고 무정 장군에 의하여 다시 조직된 조선의용군 극단 주요일군들이여서 진찰기변구 위문공연은 별로 문제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조선의용군 출신 정철준(고철)의 회고록에 따르면 위문단은 조직되였으나 변구정부와 인민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는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집체토론을 거쳐 <벙어리 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연극의 주제사상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진상을 폭로하고 중조인민이 한데 뭉쳐 싸워나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혁명은 승리한다’로 잡았다. 연극은 5개장으로 한시간 반쯤이고 한 장면씩 여러 사람들이 지혜를 합치여 창작하기로 하고 연극의 무용과 노래는 모두 벙어리동작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대에서 독창과 합창으로 부를 아리랑노래 등 조선민요들은 가사소개를 중국어로 하고는 조선어 그대로 부르기로 하였다.

연극의 주제사상, 5막연극, 집체창작, 벙어리동작, 제목 등 모두가 정해졌지만 5막 연극이다보니 막간처리가 또 문제로 나섰다. 간단한 노래나 춤도 시원치않아 막간시간에 짧은 벙어리극 <엉터리리발관>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위문공연 준비가 끝나자 수십명으로 무어진 조선의용군위문단은 진찰기변구정부 소재지를 바라고 북상을 시작하였다. 수일내에 수백리 길을 걸으며 진찰기변구정부 소재지 평산(平山,석가장에서 서북쪽으로 4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온몸에 피로가 덮치였지만 그들은 진찰기변구 팔로군장병들을 만나며 공연준비를 서둘렀다.

진찰기근거지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적후항일근거지의 하나로서 1937년 10월, 팔로군 115사 부사장인 섭영진(聂荣臻)이 115사의 부분적 부대를 지도하면서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부평현(保定市阜平县)에 개척하였었다. 그해 11월에 진찰기군구가 설립되고 1938년 1월에 진찰기변구 행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점차 산서, 하북, 차하르(察哈尔, 1912년에 세워진 성급행정구로서 성소재지는 장가구-张家口-, 1952년에 차하르성이 취소되였다) 열하, 료녕 등 성의 일부를 망라한 광대한 지구로 늘어났다.

진찰기변구 정부와 군구사령부는 태항산록의 부평현 경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후 변구 정부와 군구사령부는 선후하여 두번이나 상당한 기간을 부평에서 남으로 60여킬로메터 떨어진 평산현(平山县)에 자리잡기도 하였다. 평산은 하북성소재지 석가장에서 서북으로 40킬로메터 떨어진 고장이고 항일전쟁시기 ‘항일모범현’으로서 당년에 위대한 국제주의전사로 불리우는 베쮼의사가 전투하며 생활하던 고장이였다. 조선의용군 위문단이 진찰기변구를 방문할 때 진찰기변구정부와 군구사령부는 평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 위문단이 진찰기변구정부 소재지에 이른 이튿날 저녁, 진찰기변구 정부와 군구에서는 조선의용군위문단을 환영하는 대회를 가지였다. 환영대회에는 섭영진 사령원을 비롯한 당정군 책임동지들이 참가하고 섭영진 사령원이 열정에 넘치는 강화를 하였다. 위문단 단장 김창만이 답사를 하면서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소개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무정이 파견한 조선의용군위문단의 위문공연이 시작되였다. 노래와 춤이 결부된 벙어리연극 <태양기 아래의 사람들>은 상상밖으로 공연효과가 좋아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조선백성이 왜놈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이 나오니 분노한 관중들 속에서 누군가 왜놈역을 맡은 배우에게 돌멩이를 뿌리여 부득불 막을 내리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공연은 폭풍 같은 박수소리와 구호소리 속에서 막을 내리였다. 이어 김위 녀사가 조선녀성다운 청아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자 공연장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다시 터져오르며 흥성흥성 끓어번지였다.

 

진찰기변구에 머무르는 5~6일 사이 위문단은 여러차례 위문공연을 하고 변구 정부와 군구에서 매일같이 환영만회를 베풀었다. 변구정부와 유치원, 감옥, 베쮼병원 등 단위들 참관도 조직하여주었다. 베쮼병원은 원래 진찰기군구병원이였는데 위대한 국제주의전사 베쮼의사를 기념하고저 베쮼병원으로 고쳐 부른 것이였다. 베쮼의사는 1939년 11월에 불행히 서거하였지만 병원뜨락의 앞마당 화원 속에는 베쮼반신상이 모셔져있어 내내 분향향불이 꺼질줄 모른다고 한다.

위문단 일행이 진찰기변구정부 소재지를 떠나기 전날 저녁 변구정부와 군구에서는 다시 푸짐한 초대연을 베풀어주었다. 초대연에서 다시 아리랑노래가 불리여졌다. 초대연의 분위기는 대뜸 활기를 띠였다. 위문단은 인당 보총 한자루와 많은 수류탄, 겨울군복 등을 선물로 받았다. 변구 정부와 군구에서는 또 ‘중조인민은 영원히 단결하자!’(中朝人民永远团结在一起)라는 금빛글자를 새긴 무대막을 안기고도 모자라다며 공연악기를 살 금액까지 희사하여 위문단은 기쁨으로 넘치였다.

출처: http://www.iybrb.com/news_vew.aspx?id=6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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