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6:16    조회: 315회    댓글: 0

신채호는 조선말기, 일제강점기의 력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단재(丹齋)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거참, 이상한 량반을 다 보겠네. 여보게, 저 사람 세수하는 모습 좀 보게나."
"누구 말인가?"
"저기 우물가에 있는 사람 말일세."
"어디...... 어어, 그것 참 희한하네. 세수를 꼿꼿이 서서 하다니......"
"옷이 흠뻑 젖을텐데, 왜 고개를 숙여 세수하지 않지?"
"글쎄말이야."
해가 하늘의 한가운데 떠오른 아침시간, 려관 손님들은 우물가에서 세수하는 한 사내를 보고 쑥덕거렸다. 그들의 누에 비친 그 사내는 아무래도 비정상이였다. 서서 세수를 하다니 도무지 납득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사내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사내가 대답했다.
"난 이제까지 누구한테 고개를 숙인 일이 없소.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고개를 숙이냔 말이오. 세수를 할 때라도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소."
이렇듯 평생동안 고개를 숙이고 세수한 적이 없는 이 사람은 바로 사학자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1889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고령 신씨인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아버지는 신채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 신채호는 어머니 박씨부인과 할아버지 신성우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났다.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정6품)벼슬을 지낸 분이였다.

신채호는 7~8세때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여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채호는 영특하고 총명하여 13세때는 이미 사서삼경을 줄줄 외웠다. 18살때부터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의 집을 드나들었던 신채호는 20세때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5년에는 성균관박사가 되였다.

1905년은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신채호는 나라가 망해가는데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구국운도의 길에 나서서 황성신문사에 들어갔다. "황성신문"은 남궁억, 나수연, 장지연, 박은식, 유근 등이 1898년 9월 5일에 창간한 신문이였다. 신채호는 기자가 되여 애국적론설을 썼다.

신채호는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에 취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로일전쟁을 취재하러 조선에 왔던 영국인 배설이, 양기탁을 총무로 하여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이였다.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이였기때문에 일본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신채호는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담긴 항일 자주적론설을 마음껏 써서 발표할수 있었다. 당시에 그가 집팔한것은 "이딸리아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민족영웅전과 력사론문들이였다.

신채호는 1910년 4월에는 망명을 결심하고 중국청도로 떠났다. 신채호는 청도에서 안창호, 이갑 등의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채호는 교포신문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그는 처음에 "해조신문"을 펴냈으며 그 후신인 "대동공보", 그리고 "권업신문"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했다. 

1914년에 "권업신문"이 강제로 폐간되자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유적지를 답시하기 시작했다. 옛 고구려와 발해의 령토인 만주와 백두산 등지를 돌며 고대사연구에 착수했다. 

1915년에 신채호는 북경으로 갔다. 북경도서관을 드나들며 력사자료를 모으는 한편 북경에서 발행되는 "중화일보", "북경일보"에 론설을 기고했다.

1919년에 상해에 림시정부가 수립되자 신채호는 의정원의원 겸 전원위원회 위원장이 되였다. 이때 림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였다. 신채호 등이 이승만의 대통령취임을 반대하고 나선것이다. 이승만이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을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신채호는 이를 반민족적인 행위로 본것이다. 결국 신채호는 림시정부에서 손을 떼고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다물단"이란 지하단체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5년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한 신채호는 1927년에 무정부주의 동방련맹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일본, 인도, 윁남, 대만, 중국, 조선 등 6개국의 대표 120명으로 조직되였다.

신채호가 일본경찰에 체포된것은 1929년이였다. 그는 무정부주의 활동을 했다는 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려순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도 신채호는 력사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9년에는 "조선사연구초"란 원고를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여 출판하게 하였으며 1931년 6월 10일부터 12월 3일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와 "조선상고사"를 련재했다.

그렇게 연구에 몰두하던 신채호가 뇌일혈로 쓰러진것은 복역한지 8년째 되는 1936년 2월이였다. 신채호는 의식을 잃고 차디찬 시멘트바닥에 누워있다가 2월 21일에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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