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5:26    조회: 232회    댓글: 0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문신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경사를 배우고 1776년(영조 52) 상경하여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보고 경세치용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벽을 통해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가 되여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켰다. 
이듬해 동부승지, 병조참의가 되였으나 청나라 신부 주문모의 잠입사건에 연루되여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였다가 부사직, 곡산부사, 형조참의 등을 력임하였으며 유득공, 박제가 등과 함께 규장각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1799년 공서파로부터 천주교 신봉문제로 탄핵을 받자 자명소를 올리고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였다가 이해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여 그곳에서 18년간 경학과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대부분의 저술은 이 유배지에서 완성되였다. 
1818년(순조 18)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저술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정약용은 실학을 종합정리한 19세기전반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그는 선행시기의 실학사상을 종합체계화하고 일련의 새로운 사회개혁사상을 제기하였으며 자연과학과 기술, 력사와 지리, 언어에 대해서도 높은 열정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정조의 어명으로 정약용이 과학적인 설계와 거중기를 리용해 지은 수원화성은 조선 최초의 벽돌로 지은 성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였다.

정약용이 성균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과거에 급제한지 일년밖에 안되였는데 주상전하께 중용강의를 지어 바쳐 칭찬을 들었다면서요?"
"그러게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올시다. 중용강의를 보시고는 세속의 흐름을 벗어나 독창적이며 논리가 명확하여 첫째로 삼겠다고 하셨답니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치르는 시험마다 장원을 하여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느날 정조는 성균관학생들이 써낸 시험문제의 답안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정약용을 칭찬하며 
"오늘도 그대의 답안이 제일이다. 내가 상으로 책을 내릴터이니 저기 책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골라 가져가도 좋다."
고 말했습니다. 정약용은 서가의 책들을 훑어보고는 정조에게 이렇게 아뢰였다.
"황공하오나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은 모두다 읽은것들이옵니다."
"오호! 참으로 기특하도다."
이때부터 정조는 학식이 풍부한 정약용을 아끼고 훗날 크게 쓸 생각을 갖게 되였다. 

당시 조선에는 천주교(당시의 서학)가 들어와있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도 실학자로서 서학을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 천진암에 모여서 열띤 토론을 하고 기도문도 외우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정조임금이 돌아가자 천주교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거나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했다. 당시 황사영도 천주교탄압을 피해 한양을 빠져나와 충청북도 배론이라는 산속으로 숨었다. 그곳 토굴에서 생활하다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편지를 전해주려다 그만 관리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전하! 황사영이라는 토굴에 숨어지내던자가 서학쟁이에게 비단에 쓴 편지를 보내려 하다가 잡혔습니다."
"황사영이라면 어린 나이에 선왕(정조)을 크게 감동시킨 인물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아는것이 너무도 많아 선왕께서 곁에 두고자 하였사오나 당시 너무 나이가 어려 훗날을 기약했던걸로 아옵니다."
"그런 훌륭한 인재가 어찌 천주학쟁이가 됐단말인가? 붙잡아 처형해라!"
"전하! 황사영만 벌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정약용을 비롯해 젊은 실학파들이 대거 천주학에 련관되여 있사옵니다. 모두 벌하여 주옵소서!"
"정약용은 선왕께서 무척 아끼던 인물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황사영의 삼촌이며 매형 이승훈도 량반의 신분으로 천주학을 전파하며 상놈들과 함께 어울려 벼슬을 박탈당한자이옵니다. 그런데도 그자는 천주의 나라에서는 량반이나 상놈이나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며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1801년 신유년에 결국 서학죄인들을 엄벌에 처하라는 벽파의 거센 요구때문에 "천주교는 요사스러운것이니 나라의 법으로 엄하게 금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신유년에 일어났다 해서 이를 "신유사옥"이라 부른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붙잡혀 목숨을 잃거나 옥살이를 했다. 매일같이 한강변 새남터와 절두산에서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당시 전국에서 처형당한 천주교신자의 수가 1만명이 넘었다. 신자들중 붙잡히지 않은 교우들은 몰래 산속에 들어가 질그릇을 구워내다 팔면서 교우촌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신유사옥의 여파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을 비롯하여 이승훈, 이가환, 홍낙민 등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과 정약전은 간신히 사형을 면해 길고 먼 유배를 떠났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형 정약전은 전남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정약용은 비록 유배신분이였지만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중턱에 초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탄생한것이 그 유명한 "목민심서"이다. 관리들이 행하여야 할 덕목을 담은 책이였다. 만덕산은 당시 차나무가 많아서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지었다. 정약용은 긴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다시 벼슬을 하라며 찾아왔지만 그는 유배지에서 쓴 "경세유표" 등 많은 책들에 주석을 달며 18년동안 여유당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75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정약용의 저술로는 육경, 사서에 대한 "주해서군"과 "일표이서"가 대표적이며 이밖에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대동수경", "마과회통", "의령" 등 모두 500여권에 달하는데 이는 "여유당전서"에 총망라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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