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4:47    조회: 121회    댓글: 0

김홍도는 조선시대(1745-?)의 화가이다. 자는 사능이고 호는 단원/단구/서호/고면거사/취화사/첩취옹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홍도는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 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 신한평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하였으며 찰방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여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산수, 도석인물, 풍속, 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희황제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조선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김홍도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은 주로 화보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을 나타내였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이후로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 수파묘 등에서 정선, 심사정, 이인상, 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이라든지 녹각모습의 수지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데로 관심이 바뀌였으며 이러한 사경산수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조선의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수 있다.
후기가 되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되였다.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김홍도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였다.
조선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원형구도위에 풍부한 해학적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를 비롯하여 신윤복, 김득신, 김석신, 이명기, 이재관, 이수민, 유운홍, 엄치욱, 이한철, 유숙 등 조선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그외에도 "단원풍속화첩"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무이귀도도", "선인기려도", "단원도"와 "섭우도", "기로세련계도", "단원화첩", "마상청앵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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