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3:38    조회: 199회    댓글: 0

허준(許浚)

조선시대(1546-1615)의 의인(醫人)이다. 자는 청원이고 호는 구암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김포출신. 
할아버지 곤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윤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조선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의 원저인 "찬도맥결"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 이공석, 남응명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 일영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국왕은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이 되였으며 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였다.
그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 500권을 내여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년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였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여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여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였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 해석하고 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때에 편찬한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언해태산집요"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 1권과 "벽역신방"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하고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량도에서 온역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것이며 후자인 "벽역신방"은 그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의 열병인 당독역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 태의, 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 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 한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를 가자받았다. 그런데 종래 조선의 계급으로는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개정할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수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여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론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선조가 죽은뒤 종래의 례에 따라 주치의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대죄(待罪)를 하게 되였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였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게 되자 호성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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