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과 어머니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2:58    조회: 248회    댓글: 0

한호

조선중기(1543-1605)의 서예가이며 호는 석봉이다. 군수 대기(大基)의 5대손으로 정랑 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흡곡현령과 가평군수를 지냈다.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인 사자관체가 형성되였으며 중국에서는 이러한 서체를 간록체라 하였다.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중국의 글씨체를 뛰여넘어 호쾌하고 힘있는 독창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한석봉은 개성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는데 가난한 살림이라 붓과 종이를 살수 없어 반들반들한 항아리위에다 물을 찍어 글씨련습을 하였다. 떡장사를 하여 생활하는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자기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명필이 되였으며 한민족 서예사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 

한석봉이 절에 들어가 글씨공부를 할때의 일이다. 글씨공부를 한지 3년만에 드디어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석봉이가 왔어요, 석봉이가요. 어머니!"
"애야 너, 석봉이가 아니냐? 그래 글공부는 많이 했느냐? 어디 한번 보자.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라."
잠시후 불을 켜자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하데 한석봉이 쓴 글은 형편없었다.
"이것 봐라. 얘야, 이게 뭐냐? 네가 정말 글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한것이냐? 이래서야 나중에 큰 인물이 어찌 되겠느냐? 도로 가거라. 가서 글공부를 제대로 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오너라."
어머니는 결국 한석봉과 하루도 같이 지내지 않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곧바로 글공부를 더하고 오라며 매차게 쫒았다. 한석봉은 매우 불쾌하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석봉은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절로 들어가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한석봉의 글씨를 칭찬하자 한석봉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였다. 하루는 종로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종각밑에 저자에서 종각위 마루를 향해 기름을 사겠다고 하자 기름장수가 종각의 누각위에서 난간밖으로 기름통을 들고 아래에다 기름병을 놓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높은 누각위에서 기름을 따르는데 누각아래의 작은 병에 기름이 그대로 들어가고 한방울도 밖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이것을 본 석봉은 자신의 글씨를 아직 자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한석봉은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였다. 특히 외국사신을 받는 자리에서는 항상 그가 나아가 글을 씀으로써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한석봉이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명나라재상이 오운금단(검정 구름무늬 새겨진 비단)으로 장식한 족자를 만들어 걸고는 천하의 명필이 있으면 나와 거기에 글씨를 써달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보면서 감히 아무도 나가지 못하는데 석봉이 나서서 붓에다 먹을 찍어 족자의 흰 바탕에 뿌려 더럽히는것이였다. 모두들 놀라고 주인 또한 화를 내는데 한석봉이 천천히 들어가서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니 먹이 뿌려져 더럽혔던 부분이 모두 글자획속에 들어가고 깨끗한 글씨가 이루어져 절묘한 명필로 빛났다. 모두를 감탄하고 주인 또한 잔치하여 대접하니 이후로 한석봉의 이름이 중국에 떨쳐졌다.

한석봉의 남겨진 글로는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있으며 친필은 남아있지 않으나 "기자묘비", "서경덕신도비", "허엽신도비" 등의 비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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