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22:04    조회: 280회    댓글: 0

이이는 조선중기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이원수이고 어머니는 유명한 예술가 신사임당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뒤 15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1555년에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 

1558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였으며 전후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뒤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1574년 우부승지가 되였으며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15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15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15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1582년 이조판서가 되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하에 안장되였다.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리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것이다. 

이황은 선조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배향되였고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豊德)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黃州)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개의 서원에 배향되였다.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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