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19:41    조회: 210회    댓글: 0

신라시대(857-?)의 학자, 문장가. 자는 고운, 해운. 본관은 경주임.


경주 최씨가문에서 "신라말기 3최(崔)"의 한사람으로 6두품출신 지식인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류학하여 874년 빈공과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 표수현위가 되였다. 
879년 중국에서 황소(黃巢)의 란이 일어나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여 4년간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라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였으나 진골귀족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원하여 대산군(大山郡), 천령군(天嶺郡), 부성군(富城郡) 등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였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했다. 

894년 최치원은 어지러운 세상을 더는 두고 볼수 없어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그것은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을 구체적인 개혁안이였다. 진성여왕은 그 개혁안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관등인 "아찬"에 앉혔다. 최치원은 개혁을 이루려고 애를 썼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조정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있었던것이다.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수 없음을 비관한 최치원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뒤 각지를 류랑하다가 만년에는 가족과 함께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해인사로 들어가기전에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저 중아, 산이 좋다 하지 말라.
좋다면서 왜 다시 산에서 나오나.
뒷날에 내 발자취 두고 보라지.
한번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최치원은 유교, 불교이외에 도교, 노장사상, 풍수지리설 등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설명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치원은 후에 고려 현종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되여 문묘에 배향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영평 고운영당, 대구 계림사 등에 제향되였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 불교관계의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그밖에 "숭복사비",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등 비문의 글씨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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