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16 11:18:06    조회: 178회    댓글: 0

전봉준. 조선시대(1855-1895)의 동학인, 지도자. 녹두장군으로도 불린다. 

전봉준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달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것이다.

전봉준은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따라서 방술(方術)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태인 산외리동곡(山外里東谷)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였으며 이 무렵 농사일외에 동네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훈장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1890년 동학에 입도하여 고부접주가 되였다. 동학은 1860년 경주사람 최제우가 창시한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천주교, 즉 서학에 맞서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요, 평등하고 차별 없나니,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것"이라고 했다. 동학은 차별받은 사람,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동학에는 삼불입이라는것이 있다. 곧 량반, 부자, 선비는 들어오지 말라는것이다. 동학은 상놈, 노비, 백정 그리고 녀성을 위한 종교로 급성장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이하 귀족들은 권세다툼에 눈이 어두워 있고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토를 버리고 떠돌며 빌어먹는자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청나라, 일본, 로씨아 등 외세가 물밀듯 밀려들어와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일로를 걷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폭정때문이였다. 1894년 갑오년 음력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1천여명의 농민들이 괭이 혹은 죽창을 들고 모여들었다. 매서운 새벽바람도 잊은듯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전봉준의 지휘아래 농민군은 단숨에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그러나 조병갑은 미리 알아채고 부호 은씨집에 숨었다가 전주로 달아나버렸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갇혀있던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으로 거뒀던 쌀을 빼앗아 도로 나누어주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가담해왔다.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오하영, 손여옥 등이 각각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했다.
백산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던 농민군은 3월 27일 "보국안민"의 깃발을 올리고 격문을 발표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주성이였다.

b_arow_08.gif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b_arow_08.gif둘째,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b_arow_08.gif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하라. 
b_arow_08.gif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멸하라.

이는 전봉준이 제창한 농민군의 4대강령이다. 1만 3천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하였으며 마침내 4월 27일 전주로 입성했다.

당시 고종과 민씨(명성황후)일파는 몹시 당황했다. 민영준은 비밀리에 청나라 군벌 원세개를 만나 청나라군사를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을 완전히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은 이때 이미 출병준비를 시작한뒤였다.
5월2일 군함 2척을 이끌고 청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병력을 급파하여 7일 주한일본공사 오도리가 420명의 병사와 대포4문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날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1천 5백명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일본군 6천여명이 인천, 서울일대를 장악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자국의 세력을 부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는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강화를 제안했다. 마침내 5월9일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농민군은 호남일대에 집강소를 세우고 농민자치를 실천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청일량군은 철수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일본이 승리를 거둬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9월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10만대군을 이루고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 올린 혁명군은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21일 목천 세성산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무수한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농민군은 500여명에 달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냇물이 되여 골짜기에 흘러넘쳤다.
11월 7일간에 걸쳐 벌어진 공주공방전은 몹시도 치렬했다. 마지막 날 우금치전투에서 대포와 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맞아 농민군은 분투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논산방면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재기를 계획했다. 12월 2일 밤 서울로 잠입하여 내외정세를 살필 생각을 한 그는 순창 피로리에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김경천은 정봉준을 주막으로 안내한뒤 관가에 밀고하고 말았다. 포위당한 전봉준은 쌓아놓은 나무단을 밟고 한발이나 되는 담장을 뛰여넘었다. 순간 잠복하고 있던 관군이 총개머리판으로 그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전봉준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서울로 호송되여 일본공사관 감방에 갇혔다. 전봉준을 두려워한 관군이 일본에게 떠넘겼기때문이다. 전봉준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그를 회유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전봉준은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전봉준은 다섯차례 법정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 41살이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