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제3절 이주민에 대한 청정부의 통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09:06    조회: 88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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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3.jpgb_arow_06.gif 치발역복의 동화정책
조선정부의 월강죄와 청나라의 봉금령을 무릅쓰면서 중국으로 이주했던 이부민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고난과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나라의 동화정책인 치발역복이였다. 

치발(剃发)이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이고 역복(易服)이란 옷차림을 바꾼다는 뜻이다. 청나라의 주체민족이였던 만족들의 생활풍습에서 남자들은 머리앞부분을 깎아버리고 뒤머리만을 머리태를 땋아서 드리우고 옷은 명나라의 복색과는 다른 다브산즈와 비슷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현재는 중국에 살고있는 만족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볼수 없고 다만 근래에 제작되고 상영되는 청나라시기의 생활을 제재로 한 영화나 텔레비드라마에서만 볼수 있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산해관밖인 현재의 동북에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였고 1636년에 황태극이 국호를 청이라 개칭하였다. 1644년에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명나라의 판도를 차지하게 되면서 적은 수의 만족들이 많은 수의 한족들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형국을 이루게 되였다. 그리하여 허다한 문제들이 산생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첨예한 문제가 민족모순이였다. 중원문화의 주류인 유교사상을 일부 받아들이고 한족관리들도 일부 등용하는 한편, 생활풍습면에서는 에누리없는 민족동화정책을 강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털을 남기지 말고 머리털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기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치발역복정책이였다. 그리하여 한족을 비롯한 중원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치발역복하였다. 

19세기말에 중국으로 이주한 이주민에게도 이런 치발역복의 동화정책이 강요되였다. 청나라가 이민실변정책을 펴면서 봉금제도를 페지하고 두만강북안에 조선족이주민들이 거주하도록 허용하였지만 동시에 머리와 복장을 만족처럼 할것을 강요하였다. 말하자면 "치발역복, 귀화입적"이였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주민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토지는 물론이고 이들의 재산까지 몰수하였으며 강제적으로 쫓아냈다. 

1890년에 청나라는 연변일대의 토지를 조사하고 땅임자를 확정할 때 치발역복하고 청나라의 백성이 된 자만이 토지증서를 받을수 있다고 선포하였으며 길림장군 장순은 토지증서를 발급할 때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자는 돌아가게 하고 남으려는 자는 반드시 치발역복을 해야 하며 남은 자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매년 조세를 납부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청정부는 만족으로 동화되지 않은 조선족이주민들에게 그대로 토지소유권을 주는것은 나라의 령토주권을 버리는것과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치발역복하고 귀화입적해서 만족으로 동화된 이주민만이 청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관리들은 조선족이주민들의 치발역복에 대하여 엄하게 검사하고 독촉하였다.

b_arow_06.gif 치발역복에 대한 이주민들의 반항
반만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조선민족은 오랜 력사의 흐름속에서 자체의 고유한 생활풍속과 민족문화를 창출하였는바 부동한 사회발전의 단계에서 샤만교, 불교, 유교 등을 숭상하였다. 특히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전반 사회적으로 유교문화가 절대적인 지배문화로 상승하였는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하층에 이르기까지 "3강5륜"의 사상이 충일하였다. 복색에서 몸에는 횐옷, 머리에는 검은 관(白衣黑冠)의 모습이 민족의 상징으로 되였고 상투와 머리태는 남성의 성가여부를 보여주는 징표로 되였다. 인간관계에서 군신, 부자, 부부로 집약되는 사회의 상하관계와 례의는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부정모혈로 이루어진 내몸의 터럭 하나를 허타이 하는것도 부모에 대한 불효로 인정되였다. 대대로 물려받은 백의흑관을 버리고 만족의 복장을 착용한다는것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생활풍속을 버리는것으로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인정되였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는것은 부모에 대한 불효로 간주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이주민들은 다년간 피와 땀과 목숨으로 개간한 땅을 버리고 눈물을 휘뿌리며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또한 남의 고용살이를 할망정 상투를 짜르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주민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도 생계를 유지할수 없어 치욕을 씹어삼키면서 치발역복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심으로 치발역복한것이 아니고 외출하거나 관청에서 관리들이 조사를 나올 때만 만족옷을 입었으며 평시에는 여전히 조선옷차림을 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의 머리칼과 옷차림을 보전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서당을 꾸리고 글을 가르쳤으며 절대 외지로 공부시키러 보내지 않았다. 

치발역복을 함에 있어서도 방법들이 여러가지였는데 한집에서 한사람만 치발역복을 하여 관청을 속이기도 했고 한 마을에서 한사람이 치발역복을 하여 관청을 얼려넘기기도 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누구도 치발역복하지 않겠다고 하여 제비뽑기를 하는데 뽑힌 사람은 울고불고 하였고 어떤 마을에서는 어수룩한 사람을 선택하여 치발역복하게 했는데 그마저 조상의 풍습은 지킨다고 떼를 쓰다가 마을사람들의 권고를 이기지 못해 여럿을 위해 자기 하나를 희생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기도 하였다. 

청나라에서 그토록 이주민에 대해 강박적인 치발역복의 동화정책을 강행했지만 실제상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1907년 3월의 조사에 의하면 연변에 거주하고있는 6만여호의 조선족가운데서 30%의 조선족들은 백의흑관의 고유한 모습을 보전하고있었고 50%에 달하는 자작농 혹은 소작농으로 있은 조선족농민들은 흰옷에 머리태를 드리운 "변발백의(辫发白衣)", 혹은 상투를 올리고 만족옷을 입은 "계발호복(髻发胡服)"의 반치발역복의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20%에 달하는 조선족들은 로씨야의 시베리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곳에서 이미 근대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로씨야사람들의 모양을 모방하여 머리태를 드리우지 않고 머리를 짧게 깎거나 혹은 머리를 길게 길렀고 옷차림도 "반양반한(半洋半韩)"이거나 한복을 입었다. 

중원에서 의화단운동이 일어난후 로씨야가 연변을 침략하자 연변지방의 관리들은 길림지방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치발역복정책은 더 이상 강행되지 못했고 많은 조선족들은 다시 민족복장을 착용했다. 1916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의 경우, 입적한 조선족은 10%도 안되였지만 연변경작지의 56%이상을 조선족들이 경작하고있었다. 이는 치발역복하고 귀화입적해야만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다는 청나라의 민족동화정책이 실패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족에게 가해진 외세의 강제적인 동화정책은 청나라의 치발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한 일제는 1932년의 9.18사변으로 동북을 침략했고 조선반도에서 강행하던 악명높은 창씨개명을 조선족에게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머리식이나 옷차림의 변화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고쳐야 했고 이름마저 바꿔야 했으며 언어까지 왜말을 사용하게끔 강박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이런 동화정책도 결국은 1945년의 광복과 함께 도도한 력사의 흐름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동화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전통을 갖고있는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통합되는것을 말하는것인데 대개는 이주자들이나 고립된 소수집단이 더 큰 문화에 접촉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과거에 가졌던 문화적특성을 대부분 잃게 되고 생활풍습면에서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과 비슷해지게 되는 과정이다.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머리태를 자르는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많은 선비들이 머리태를 자르지 않겠다고 생떼를 썼고 심지어 강제적으로 단발을 당한 사람들은 미치기까지 하였다. 입관초기 만족들이 강행했던 치발역복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이들도 수백년을 내려오는 과정에 만족의 생활습관을 자기의 습관으로 착각될 정도로 이들의 일상생할에 고착되였던것이다. 뿐만아니라 한때는 중원을 호령했던 만족들도 현재는 언어, 문자, 복장,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족화되였고 한족문화에 동화되였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관내의 박가촌과 같은 마을의 주민들은 조선족이라고 하나 이미 본 민족의 풍속습관을 거의 잃어버리고있다. 이미 동화되였다고 해야 마땅할것이다. 문화의 통합과 동화의 힘은 그토록 강한 힘을 갖고있기도 한것이다. 

하지만 연변을 비롯한 동북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들은 이런 사례에는 속하지 않고있다. 그처럼 혹독했고 무서웠던 청나라의 치발역복의 동화정책과 일제의 악명높은 창씨개명의 동화정책의 강요를 당하면서도 조선족은 끝내 본 민족의 언어, 문자, 생활습관,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를 지켜냈다. 

하지만 오늘날 경쟁속의 삶이란 엄준한 생존환경속에서 능력제고만을 앞세우면서 후대들이 어떤 문화속에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는 문제를 외면하는 현상들이 속출하고있는 점은 엄숙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한 민족의 구성원들의 민족의식과 한 민족의 문화는 영원불변한것이 아니다. 어떠한 문화든 일정한 형식과 방식을 떠나서 존재할수 없다. 특히 언어와 문자를 잃고 생활습관을 잃어버린 문화는 이미 생존능력을 상실한 문화가 된다. 어떠한 민족의식이든 민족문화든 존재형식을 잃으면 생명력이 상실되고 존재가치가 사라지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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