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제2절 사이섬(간도)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07:19    조회: 692회    댓글: 0

ls_title_cho_02.gif


b_arow_06.gif 월강죄와 봉금령
chao2-1.jpg사이섬에 대해 알기전에 먼저 알아야 할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월강죄"와 "봉금령"이다. 

"월강죄"는 조선에서 사람들이 강을 건너 청나라경내에 들어가면 죄로 다스리는것을 말한다. 월강죄를 범하면 곧 사형에 언도되였다. 월강죄가 얼마나 무서운것이였는가를 당시 불리워진 노래 "월강곡"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래요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래요 

사랑하는 두사람이 두만강이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월강죄때문에 서로 만날수 없는 애절한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은하수를 건너지 못해 만나지 못하는 견우직녀와 같은 처지가 아닐수 없었다. 

조선에 "월강죄"가 있다면 청나라에는 "봉금령"이 있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동북에서 번성한 민족이다. 만족의 수령은 아이신줴로부족의 누르하치인데 그의 6대 선조인 맹가테무르가 회령지역의 수령이였다. 말하자면 회령이 아이신줴로부족의 세력중심이였고 근원이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만족은 조상의 발상지를 장백산이라고 인정하였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후 만족의 대부분이 관내로 들어갔고 이들이 살던 동북지역은 인가가 드문 무인지경이 되였다. 그러자 땅은 적고 인구가 많고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입은 관내의 한족들이 슬그머니 동북으로 이주를 하여 이곳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만족은 유목민족이기에 말타고 활쏘는것이 이들의 민족풍속이였다. 그런데 한족들이 들어오면서 점차 이런 풍속들이 사라지게 되였다. 게다가 조상의 발상지라는 장백산일대가 회손의 위험을 갖게 되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 강희황제는 1677년에 만족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장백산일대의 특산물을 독점하며 만족들의 생계와 풍속을 보존하기 위하여 장백산과 압록강, 두만강이북 천여리를 봉금지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과 외족들이 이 곳에 들어가 거주하거나 땅을 개간하며 벌목, 채집하는것을 엄금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 바치는 인삼, 진주, 록용 등 특산물을 채집하는 사람들외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봉금령"이다. 

청나라의 봉금령은 주로 산해관일대를 봉쇄함으로써 관내의 한족들이 동북에 이주하는것을 막자는 목적이였으나 한편 압록강과 두만강을 봉쇄하여 조선에서 농민들이 건너오는것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b_arow_06.gif 사이섬(간도) 
사이섬, 말그대로 중간에 끼인 섬이라는 뜻이다. 이 뜻이 한자어로 된것이 간도(间岛)이다. 
이 간도라는 말이 지금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생소한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과의 수교전인 10여년전까지만 해도 간도라는 이름은 그렇게 쉽게 불리워지는 이름이 아니였다. 한국과의 교류가 진행되면서 점차 이 귀설은 말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것이다. 그럼 간도는 한국에서 생긴 말일까. 그런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간도란 말 대신에 청나라 광서황제가 지은 연변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을뿐이다. 기실 간도는 조선족의 이주과정에서 농민들에 의해 생겨난 말이다. 

사이섬의 이름은 "월강죄"와 "봉금령"때문에 온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미국, 호주로 이민가거나 중국에서 한국, 일본 또는 유럽으로 이민가는것은 어느정도 어려움은 있어도 위험은 없다. 하지만 조선족의 선조들이 중국으로 이주올 때는 어려움외에도 생명의 위험이 동반되였다. 두만강을 따라 중조국경선을 다녀본 사람은 다 알수 있지만 조선북부지방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이고 땅이 몹시 척박하다. 밭들은 대부분 산비탈을 타고 있는데 일단 장마가 지면 밭들은 그대로 비에 씻겨 버린다. 그리하여 이곳은 언제나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농민들은 늘 기아에 허덕이였다. 그런데 두만강 하나를 사이에 둔 중국쪽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땅이 비옥하였다. 특히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실시하면서 근 200년간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기에 땅은 몹시 비옥하였다. 기름끼 흐르는 좋은 땅을 강건너 바라보면서도 배를 곯아야 하는 조선북부지방의 농민들은 그대로 굶어죽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만히 강을 건너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앉아있으면 굶어죽고 강을 건너면 잡혀죽는,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이지만 강을 건너다가 다행히 잡히지만 않으면 굶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이식위천(民以食为天)이라는 말이 있듯이 백성에게는 먹는것이 우선이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관청의 눈을 피해 아침에 강을 건너 땅을 뚜지고 감자나 보리를 심고는 저녁에 해가 지면 어둠을 타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를 력사책에서는 "아침에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가는(朝耕暮归)"시기라고 한다. 후에는 청명전후에 쟁기를 가지고 강을 건너 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추수한 후 곡식을 메고 가만히 강을 건너 돌아갔다. 그리하여 이때를 "봄에 왔다가 가을에 돌아가는(春来秋去)"시기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때는 관청의 눈을 속이고 가만히 월강하는 잠입시기였다. 

그러나 두만강을 건너는것은 곧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천만 위험한 일이였다. 월강민에 대해 청나라의 변방군은 사정없이 총포를 놓았고 조선에서도 월강죄(越江罪)로써 다스렸다. 
어떻게 하면 강을 건너 감자농사라도 지어서 배곯는 처자들을 배불릴수 있으면서 동시에 관청의 눈을 속여서 월강죄를 면할수 있을가 하는것이 농민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생겨난것이 사이섬이였다. 

chao2-2.jpg지금의 룡정시 개산툰 선구에 가면 두만강에 자그마한 모래섬이 있다.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현재 모래섬에다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옛날에는 섬이 아니였다. 당시 두만강바닥에 장기간 진흙과 모래가 쌓이면서 모래톱이 생기게 되였는데 어느날인가 조선 종성의 농민들이 강을 건너와 이 모래톱을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래톱북쪽으로 물도랑을 빼는 바람에 이곳은 그만 자그마한 섬으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차라리 이곳을 사이섬(间岛)이라고 불렀다. 

재미있는것은 이 사이섬이 청나라에서도 관리를 못하고 조선에서도 관리를 못하는 완충지대였기에 농민들은 이점을 리용한것이다.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고 돌아가다가 조선관헌들에게 발각되거나 붙잡히면 사이섬에 갔었다고 대답하여 곧 풀려나곤 하였다. 그리하여 월강죄를 면하곤 하였다. 

저명한 소설가 안수길의 장편소설 "북간도"에서도 이런 사실을 쓰고있다. 주인공인 리한복이 두만강을 건너 감자농사를 지었는데 그 아들이 감자세알을 갖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다가 발각되여 리한복령감이 관청에 붙잡혀 갔을때 바로 사이섬에 갔었다고 대답한다. 이와같이 사이섬은 월강민들의 생명안전을 보전할수 있는 방패가 되였기에 조선북부 농민들사이에서는 한입두입 전해지면서 광범하게 전파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