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제3절 항일무장투쟁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8:46    조회: 1,25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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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15.jpgb_arow_06.gif 항일무장대오의 건립 
1931년 "9.18"사변후 일제는 자기들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1932년 봄부터 조선족집거지역에 대해 미친듯한 군사적"토벌"을 감행하고 수많은 참안을 빚어냈다.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항일유격대를 건립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여 일제의 야만적인 도살정책에 맞서 영용히 투쟁하였다. 

b_bulet_01.gif동만 
동만의 각 현당위들에서는 1931년 겨울부터 1932년 봄까지 당원과 단원들을 대중투쟁속에 심입시켜 1931년 12월의 "명월구회의"의 결의를 널리 선전하고 별동대, 돌격대, 적위대, 소선대를 토대로 반일무장대오를 조직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려나갔다. 
유격대창건에서 나선 급선무는 무기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지에서는 "적의 무장을 탈취하여 군중을 무장"하는 대중적인 무장탈취투쟁을 벌렸다. 이 투쟁에서 조선족이민들은 생사를 무릅쓰고 곤난과 위험을 맞받아 용감하고도 지혜롭게 적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였다. 1년좌우의 간고한 투쟁을 거쳐 1932년초부터 1933년 봄에 이르러 동만 4개현에서 선후하여 항일유격대가 창건되였다. 
1932년 10월 연길현당위원회에서는 의란구유격대와 로두구유격대를 합병하여 연길현유격대를 조직하고 대장에 박동근, 정위에 박길을 각기 임명하였는데 대원은 130여명이였다. 1932년 12월에 화룡현유격중대가 건립되였고 1933년 3월에 유격대대로 재편성되였는데 대대장에 장승환, 정위에 차룡덕, 대원은 80여명이였다. 1932년 12월에 화룡현유격중대가 건립되고 1933년 3월에 유격대대로 재편성되였는데 대대장은 장승환, 정위에 차룡덕, 대원은 80여명이였다. 1932년 3월 왕청현유격대가 조직된후 같은 해 11월에 유격대대로 확대편성되였는데 대장에 량성룡, 정위에 김일성, 대원은 90여명이였다. 훈춘에서는 1932년 6월 초순과 하순에 연구유격대(령남유격대)와 황구유격대(령북유격대)가 건립된후 1933년 1월에 두 유격대가 합병되여 훈춘현유격총대로 확대편성되였는데 대장에 공헌심(한족), 정위에 박태익, 대원은 100여명이였다. 이와간치 동만의 4개현에는 선후하여 유격대가 전부 창건되였는데 인원이 도합 36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90%이상을 차지하였다. 

b_bulet_01.gif남만 
중공반석현위원회에서는 1932년 5월에 "반석로농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32년 11월에 이 무장대오는 "중국로농홍군제32군 남만유격대"로 재편성되였다. 교도대 정위에 리홍광, 1, 2대 대장에 박한종과 한호, 대원은 23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80여명이였다.

b_bulet_01.gif북만 
북만에서는 김근이 처음으로 1932년 6월 "북만로농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34년 5월 20일에는 조선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녕안유격대가 건립되였다. 1932년 10월 요하중심현위의 박진우, 김문형 등은 특무대를 조직하여 유격대 창건준비를 하였고 1933년 5월에 최석천(최용건), 리학복 등은 요하현 삼의툰에서 군정훈련반을 꾸리고 70여명의 유격대골간을 양성하였다. 1933년 6월 요하유격대는 동북국민구국군 제1려 특무영으로 편성되였다. 1933년 10월 10일 주하유격대가 조직되였고 조상지(한족)가 대장으로, 리복림이 당지부서기로, 리계동이 경제부장으로 되였다. 1934년 3월 20일 박봉남, 리성림 등은 밀산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상술한바와 같이 동북항일투쟁초기 항일유격대가 창건된 지방은 모두 조선족집거지역이였고 당책임자, 유격대책임자 그리고 대원들도 대부분 조선족이였다. 상술한 항일유격대들은 항일련군 제 1, 2, 3, 4, 5, 6, 7군의 전신으로 되였다. 이들은 인원이 적고 장비가 형편없었지만 적들의 "토벌"이 련속 들이닥치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항일유격전쟁을 영용히 벌려나갔다. 

b_arow_06.gif 항일유격근거지들의 건립 
1931년 "9.18"사변후 반일유격대의 창건과 항일유격전쟁의 확대에 따라 항일군민들에게는 자신을 보존하고 적을 소멸하는 전략기지가 수요되였다. 중국공산당 각급 당조직들에서는 중앙의 북방회의정신과 만주성위원회 확대회의결의에 따라 군중을 발동하여 반일유격대를 발전시키고 항일유격전쟁을 확대함과 동시에 항일유격근거지창설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b_bulet_01.gif동만 
동만지역에서는 중공동만특위와 각 현당위원회의 령도아래 1932년 가을부터 연길현의 왕우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한 부르하통하북부의 산악지대에, 화룡현의 어랑촌, 우복동을 중심으로 한 봉밀구일대의 산간지대에, 왕청현이 소왕청, 가야하, 요영구를 중심으로 한 가야하량안에, 훈춘현의 대황구, 연통랍자를 중심으로 한 황구령 령북, 령남 산간지대에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근거지내에 구쏘베트정부, 혁명위원회 등 정권기구들을 건립하였다. 상술한 근거지들을 통칭하여 "동만항일유격근거지"라고 하였는바 이 근거지의 인구는 2만여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90%이상이 조선족이였다. 이 근거지를 둘러싸고 형성된 유격구는 당시 전 동북적으로 가장 큰 유격구였다. 

b_bulet_01.gif남만 
남만지역에서는 1932년말에 중공반석현위원회의 령도밑에 남만유격대에 의거하여 버리하투, 홍석랍자 등 지에 항일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림시정권성격을 가진 농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b_bulet_01.gif북만 
북만지역에서는 각급 당조직의 령도밑에 1933년 여름부터 1934년초까지 녕안현의 팔도하자, 주하현의 삼고류, 석두하자, 반방자, 밀산현의 합달하, 요하현의 보마정자, 대엽자구, 탕원현의 탕왕하구, 태평천 등 지방에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반일회, 항일구국회를 조직하였다. 

항일유격근거지의 군중들을 적위대, 반일자위대, 소선대, 청년의용군 등 반군사적성격을 가진 군중무장을 조직하였으며 항일유격대를 협조하여 근거지보위전, 적후유격전 등을 활발히 벌려 적들의 진공과 "토벌"을 분쇄하였다. 그리고 청년회, 농민회, 부녀회, 아동단 등 혁명단체들을 조직하여 근거지인민들을 항일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근거지군민들은 농업생산에 종사하였고 병기창, 인쇄소, 피복창, 병원 등을 꾸리였으며 소학교와 야간학교 등 여러가지 형식의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문화지식과 반일사상을 전수하였다. 

"9.18"사변후 최초에 건립된 항일유격근거지들은 그 절대대부분이 조선족들이 집거하여 있는 지방들이였고 근거지군민들의 절대다수가 조선족들이였으며 근거지창설자와 지도자들도 절대다수가 조선족들이였다. 항일유격근거지의 창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으며 항일투쟁초시기에 전략적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항일유격전쟁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지들 특히 동만근거지에서는 왕명"좌"경모험주의의 로선과 정책의 영향으로 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잘 결성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유격근거지를 튼튼히 건설하고 보위하며 항일유격전쟁을 가일층 발전시키는데 큰 지장을 받았다. 결과 원래의 근거지들은 선후로 파괴되고 항일군민들은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b_arow_06.gif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건립 
1933년 9월 18일 남만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재편되였다. 양정우가 사장(師長) 겸 정치위원을 맡고 리홍광이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였으며 양정우가 군장 겸 정치위원을 맡고 리홍광이 제1사 사장 겸 정치위원이 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바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의 전신이였다. 

1934년 연길현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창건되였는데 사장은 조선인인 주진, 정치위원은 중국인 왕덕태가 맡았다. 후에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제3퇀 정위 김일성). 이것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전신이였다. 

1936년 7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 제2군을 련합하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편성하고 통일적인 군사지휘기관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총사령부를 조직했다. 총사령 겸 정위를 양정우가 맡고 부총사령 왕덕태, 총정치부 주임을 위증민이 맡았다. 제1로군산하에 제1, 제2군을 두고 6개 사를 배치했다. 원래의 제1군의 1,2,3사는 그대로 편제를 두고 제2군의 3개 사를 4,5,6사로 개칭했다. 제1군 군장과 정위를 양정우가 겸직하고 정치부 주임을 송철암, 참모장을 안광훈이 맡았다. 제1사 사장에 정빈, 정치부 주임에 호국산, 참모장에 리민환, 제2사 사장 겸 정위에 조국안, 참모장에 리희민, 제3사 사장에 왕인재, 정위에 주건화, 참모장에 양준항이 임명되였다. 제2군 군장을 왕덕태, 정위를 위증민, 정치부 주임을 리학충, 참모장을 류한흥이 맡았다. 제4사 사장에 안봉학, 정위에 주수동,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 제3퇀 퇀장에 랑화가, 정위에 주수동이 임명되였다. 제4사 사장에 사충항, 정위에 왕윤성, 참모장에 진한장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제5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왕송백이 임명되였다. 제6퇀은 퇀장, 정위를 정하지 않고 사부에서 직접 령도하기로 했다. 제6사 사장에 김일성, 저우이에 조아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는데 제7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김재범, 제8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왕진아,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정위에 김산호, 제10퇀 퇀장에 서학충이 임명되였다. 2군 병력은 근 3000여명 되였는데 조선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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