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제2절 반일폭동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8:13    조회: 1,100회    댓글: 0

ls_title_cho_13.gif


chao14.jpg1930년은 특수한 해이다. 붉은5월투쟁의 뒤를 이어 1930년 후반년에만 하여도 크고 작은 폭동이 선후로 680여차나 일어났다고 한다. 촌마다에 폭동위원회가 건립되였고 농민들은 "폭동! 폭동! 또 폭동!"의 구호를 부르면서 열광적인 기분으로 투쟁에 뛰여들었다. 이러한 폭동은 모두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일어났는데 목적은 토지혁명의 실현과 유격대와 유격근거지의 창건에 있었다. 

b_arow_06.gif 붉은5월투쟁 
연변의 조선족인민들은 중공만주성위원회와 공청단 만주성위원회의 령도밑에 "5.1"절을 계기로 성세호대한 "붉은5월투쟁"을 벌렸다. 

5월 1일, 룡정의 400여명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한 뒤를 이어 연변의 20여개소의 중, 소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시위행진을 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였다. 이어 화룡현의 두도구, 자동, 대랍자, 약수동, 왕청현의 북하마탕, 연길현의 평강, 차조구, 팔도구 등지의 군중들도 집회를 가지고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5월말부터 대오는 시위행진으로부터 폭동에로 넘어가 토지혁명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인민들은 당의 령도밑에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계약서와 고리대문서들을 불살라버리고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투쟁가운데서 농민협회와 농민자위대를 건립하였다. 5월 27일, 연변당부의 파견을 받고 평강 약수동에 간 신춘은 농민폭동을 지도하여 친일주구와 지주들을 청산하면서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약수동쏘베트정부를 세우고 적위대, 특무대를 조직하였다. 적위대와 특무대는 "5.30"폭동행동에 파견되였다. 5월 30일 화룡, 룡정, 두도구 등 지역의 수많은 농민들이 성세호대한 "5.30"폭동을 일으켰다. 폭동대는 친일주구들의 집을 습격하거나 철교를 소각하고 전화선을 끊어버리는 등 폭동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민중폭동에 질겁한 일제는 경찰력량을 증가하는 한편 반동군벌들과 결탁하여 민중의 혁명투쟁을 미친듯이 탄압하였다. 

"붉은5월투쟁"은 일제침략자와 지방봉건세력에 타격을 준 한차례의 대중적인 투쟁이였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연변 각지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확대하였으며 동북 각지의 혁명투쟁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b_arow_06.gif 8.1길돈폭동 
1930년의 "5.30"폭동이후 "좌"경로선을 계속 집행하고 있던 중공만주성위원회에서는 연변에서의 "붉은5월투쟁"을 거듭 긍정하면서 "혁명고조가 박근"하였으니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전개하여 지방폭동을 조직하고 즉시로 적색유격대를 건립하여 유격전쟁을 전개"하라고 연변당조직에 지시하였다. 

중공연변당부에서는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길돈철도연선에서의 투쟁을 조직할 목적으로 순시원을 돈화에 파견하엿다. 순시원은 돈화현 마호 모아산에서 간부련석회의를 소집하고 폭동을 일으킬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돈액림시당부 책임자인 마천목을 총지휘로 하고 황세형, 강세일, 한광우 등을 위원으로 한 폭동지휘부를 건립하고 교하, 액목, 돈화 등 세개 지구에서 폭동대대를 조직하며 8월 1일에 그 폭동대대가 일제히 당지 지방군벌들의 병영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기로 결정하였다. 

8월 1일 새벽 2시, 각 폭동대대는 예정된 계획대로 행동을 시작하였다. 제1폭동대대인 액목대대는 김명균의 지휘밑에 200여명의 대오를 7개의 파괴대와 습격대로 나누어 행동했다. 파괴대는 교하, 돈화, 관지, 신참과 길림간의 전화선과 철교를 파괴하고 습격대는 관지의 륙군병영과 세무국을 습격하였다. 제2대대인 돈화대대는 강세일, 리학경의 지휘밑에 신개도, 마호와 남황니하에 주둔하고있는 륙군병영을 습격하였다. 제3대대인 교하대대는 한일광의 지휘밑에 위구참의 보갑소와 보위퇀을 습격하였다. 

이번 폭동에서 포동대는 보총 17자루와 1,060발의 탄알을 로획하였으며 신개하병영 일부를 불살라버렸고 관지에서는 지주, 부농들의 가옥을 불사르고 당지의 경찰들과 박투를 벌렸다. 폭동대는 로획한 피복과 돈 그리고 정부의 식량창고에서 털어낸 식량을 여러 민족 빈곤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관지에서는 림시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포하였다. 

길돈폭동에 호응하여 안도, 연길, 왕청, 화룡, 녕안 등 지의 혁명군중들도 일떠나 일제와 지방정부를 반대하는 투쟁들을 벌렸다. 

민중폭동에 당황해난 지방군벌들은 륙군 13려 제7퇀의 300여명 병력을 출동시켜 지방군경들의 배합하에 혁명대중에 대한 피비린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번 토벌에서 277명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21명이 징역에 언도되고 19명이 총살당하였다. 폭동총지휘자 마천목은 액목감옥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b_arow_06.gif 5.7봉기
"9.18"사변후 남만지역의 광범한 조선족대중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반석현을 중심으로 형제민족들과 함께 기세드높은 반일투쟁을 벌렸다. 중공반동구(磐東區)위원회 서기 리동광은 당지의 농민들을 조직하여 항조분량(抗租分糧)투쟁과 일제의 주구를 청산하는 투쟁을 벌렸으며 투쟁과정에서 농민협회, 부녀회, 아동단을 조직하여 대다수 농민들을 투쟁에로 이끌었다. 

1932년 봄, 중공반석중심현위원회의 "특무대(즉 개잡이대)"대장 리홍광은 특무대와 반일회성원들을 령솔하여 "쌀빼앗기투쟁"을 벌렸다. 2월 9일, 중공반동구위원회에서는 700여명 대중들을 조직하여 23명의 반일회간부들을 체포하여 간 곽가점의 괴뢰군병영을 온밤 포위하고 끝내 체포된 간부들을 구출하였다. 

1932년 4월, 중공만주성위원회에서는 남만일대의 항일투쟁에 대한 영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이며 조선족혁명가인 양림을 남만에 파견하였다. 양림은 성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리동광, 리홍광 등과 함께 1932년 5월 7일에 유명한 "하마하자반일봉기"를 조직하였다. 

5월 1일부터 중공반석중심현위원회는 1,000여명 반일대중을 동원하여 리홍광의 지휘밑에 반석현 제2구, 제3구에서 련속 4~5일동안 반일시위를 벌렸다. 시위행진에 참가한 대중들은 일본앞잡이 수십명을 체포하여 "민중법정"을 열고 죄악이 큰 주구놈들을 처단해버렸다. 5월 7일, 제2구 하마하자 500여명 농민들은 항일집회를 가지고 일제의 침략죄행을 폭로규탄하였으며 반일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봉기대오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반동지주와 매국적역적들을 처단하였으며 대지주이며 일제의 주구인 고수청의 식량창고를 열어제끼고 식량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봉기대오는 적들이 군대를 출동시켜 봉기를 탄압하는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철길과 교량들을 파괴해버렸다. 반석일본경찰분서에서는 봉기대오를 탄압하기 위하여 괴뢰군 한개 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리홍광과 맹길민(한족)의 설득에 감화된 괴뢰군 련장은 봉기대오를 탄압할 대신 오히려 "우리는 당신들을 붙잡지 않을테니 얼른 피하시오."라고까지 하였다. 

봉기대오는 "보민회"를 반대하는 기세드높은 투쟁을 벌리였다. 그들은 신향균 등 일제주구들을 처단하고 군중대회에서 21명의 "보민회"골간분자들을 처단하였으며 5월 20일에는 전저영 등 친일분자들을 처단하였다. 

"5.7"반일봉기는 재빨리 이통, 쌍양 등지에 파급되었고 대오는 4,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봉기대오는 50여명의 친일주구들을 체포하고 처단하였으며 1,000여섬이나 되는 식량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길해철도 로령구간을 파괴하여 적들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남만항일투쟁의 새로운 발단으로서의 "5.7"봉기는 일제와 친일세력에 호된 타격을 안겼으며 남만지역 항일력량이 가일층의 장성을 보게 하였다.

"5.7"봉기후 중공반석중심현위원회에서는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무장탈취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