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운동제4절 반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폭행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5:49    조회: 28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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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11.jpg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전형적인 례가 1920년 10월 하순에 진행한 경신년대학살사건이다.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카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일본군은 10월26일 간도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연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 --- (김춘선 “경신참변연구”)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한 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 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협의로 12살나는 조선족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일때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족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강간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강간하였다. 간약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강간한 다음 학살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 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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