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운동제3절 반일무장투쟁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3:14    조회: 56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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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10.jpgb_arow_06.gif 반일무장단체
"3.13"운동의 경험교훈은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것이다. 각계 반일단체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무장단체의 결성과 무기구입, 군자금모집 및 반일기지건설의 방침을 제정하고 즉각 대오를 무장시키는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게 되였다. 

b_bulet_01.gif간도국민회 
간도국민회는 "3.13"반일운동후 연변에서 그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세력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무장집단이다.
1920년5월 국민회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신민단의 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군부를 결성했다. 
"간도국민회"는 전 동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반일단체였는데 회원이 8000여명이 되었다. "간도국민회"는 반일단체들의 통합에 힘쓰면서 반일무장투쟁에서 련합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금후 봉오동, 천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b_bulet_01.gif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대종교동도분사의 주관 서일이 지난날의 반일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중관단"이 발전되여 세워진 반일무장단체이다. 서일이 총재부의 총재를 담당하고 군사령부의 사령관은 김좌진이였다. 
총재부산하에는 지방경신국과 경비대가 있었는데 35개 경신분국, 200여명 경비대원이 있었다. 군사령부산하에는 400여명 학생을 수용한 사관훈련소가 있었는데 김좌진이 소장을 맡았다. 
1920년9월,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1600명, 동년 화룡현 청산리로 진출한 병력은 600명이였다. 무기장비는 보총 1300자루, 기관총 7정, 권총 150자루였다. 

b_bulet_01.gif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은 이름난 의병장 홍범도가 1919년 "3.1"운동 후 원래의 옛 부하들을 토대로 세운 순수한 반일무장단체였다. 
대한독립군은 후에 국민회와 합하여 국민회산하에 귀속, 국민회의 근거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전문 전투에 뛰여들었다. 홍범도부대는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 "3.1"운동후에 무장투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부대로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는 특점이 있다. 
홍범도는 특히 반일무장단체들의 련합을 선도해나섰다. 국민회와의 련합을 실현한후 련속하여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를 열어 통일과 련합문제를 토의하였다. 잠시 통일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련합전선을 결성할데 대한 협의를 맺기도 했다. 

그외에도 리명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한민회,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는 의민당, 최명록을 총재로 하는 도독부, 리범윤을 명예단장으로, 김성극을 단장으로 하는 광복단, 김종식을 의사부장으로 하는 라자구의사부, 림창세를 총재로 하는 야단, 김중건을 단장으로 하는 대진단, 리백성 등이 조직한 의형제단, 리춘정이 성립한 구제단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궐기해나섰다. 

b_arow_06.gif 반일무장투쟁 
"3.13"반일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여러 반일단체들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활발히 벌여나갔다. 그 가운데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가장 유명하다. 

b_bulet_01.gif봉오동전투 
1920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도문시근처에 있는 봉오골에서는 의병장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범도의 지휘하에 있는 독립군부대가 일제의 관동군을 150여명이나 소멸하고 수십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투를 벌렸다. 이 전투를 조선민족의 항일투쟁력사에서 봉오동전투라고 하며 이 전투는 조선민족의 반일민족무장투쟁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놓았다. 

b_bulet_01.gif청산리대첩 
1992년10월21일 아침부터 10월26일 새벽까지 6일간 걸쳐 진행된 청산리전역은 의병대장 홍범도련합부대와 김좌진북로군정서부대의 련합작전으로 일제침략자를 타격한 반일무장투쟁의 최고봉이다. 청산리전역은 10여차의 전투를 반복하면서 조선과 중국 동북에 대한 일제의 침략정책에 거대한 타격을 주었다.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조선족뿐만아니라 중국인민들의 반일의식을 고무시켰다. 광범한 민중들은 앞다투어 일떠났으며 특히 각지의 청년학생들은 집회와 시위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면서 일본침략군으로 하여금 하루속히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김좌진장군은 1930년 중국에서 피살되였고 홍범도장군은 1943년 쏘련에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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