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운동제2절 3.13반일운동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2:38    조회: 1,01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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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9.jpg1919년 중국, 조선 등 동방의 여러 국가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제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5월 4일 북경대학 학생들을 위수로 한 "5.4"운동이 일어났고 조선에서는 3월 1일 서울에서 종교계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3.1"운동이 일어나 민족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영향, 특히는 조선의 "3.1"운동의 영향으로 하여 연변에서도 조선의 "3.1"반일독립운동을 성원하는 대규모의 반일대중운동을 온양하게 되였다. 

3월 13일, 조선족사회의 중심지였던 룡정에서 기세드높은 대규모의 반일시위가 거행되였다. 이를 력사에서는 "3.13"반일시위운동이라고 일컸는다. 

반일민중은 천주교회당 종소리를 신호로 대회를 소집하였으며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령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진행하였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반일민중은 무려 3만여명에 달했으며 그가운데는 화룡현(현재 화룡시)의 명동학교,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조직된 320명의 "충렬대" 대원들과 국자가 도립중학의 조선족학생들로 조직된 천여명의 자위단원들도 포함되여 있었다. 

부패무능한 당시 중국정부와 봉계군벌 장작림은 조선족의 반일운동에 대하여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는것은 결국 일본측에 출병구실을 제공하는것이라고 인정하고 연길도윤 장세건에게 조선족의 반일운동을 제지시킬것을 명령하였다. 연길도윤은 상급의 명령과 일본령사관의 압력에 의해 길림 륙군 2려 10퇀 퇀장 맹부덕을 룡정촌 군경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즉시 군경을 파견하여 일본령사관을 보호하고 조선족들의 반일운동을 제지시킬것을 지시하였다. 

맹부덕은 상전의 명령을 받고 군경들을 거느리고 시위대오가 경과할 상부지계선에서 총칼을 들고 대기하면서 시위대렬이 상부지내로 들어가는것을 제지하여 나섰다. 시위대오가 다가오자 군경들은 선두에서 들어오는 공덕흡에게 달려들어 그가 든 기발을 빼앗으려 하였고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군경들에게 뿌리면서 대항해나섰다. 조수처럼 밀려드는 시위대오를 도저히 막을수 없었던 군경들은 드디여 적수공원인 시위행렬에 대해 총질하기 시작하였다. 당장에서 10명이 희생되고(후에 또 7명이 사망)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오는 일대 혼란을 이루면서 흩어졌다.

"3.13"반일투쟁에서 수난당한 렬사들은 다음과 같다. 
채창현, 공덕흡, 박문호, 김흥식, 정시익, 현봉률, 김승록, 김태균, 장학관, 김종묵, 허준언, 김병영, 박상진, 최익선, 현상로, 리유주, 차정룡, 원인선, 리균선. 

룡정에서의 "3.13"반일시위는 일제와 반동군경의 피비린 학살에 의해 진압되였지만 그 영향으로 하여 조선족대중들의 반일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연길현에서는 3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의 사이에 여러곳에서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군중들이 집회를 가지고 시위행진을 거행했으며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에서도 집회가 시위행진이 끊임없이 진행되였다. 뿐만아니라 남만의 조선족대중들도 련이어 조직되여 일떠나 반일운동을 벌렸는바 3월 12일부터 4월 22일까지 사이에 류하, 통화, 장백, 집안, 환인, 관전 등지에서도 반일집회를 가지고 시위행진을 거행하였다. 

"3.13"반일시위운동은 그 규모나 지속된 시일 그리고 반일투쟁에 참가한 수효와 범위 등면에서 전례가 없는 반일대시위이다. 이번 투쟁은 일제침략자들의 기염을 꺾어놓았고 조선인민들의 반일민족애국투쟁을 힘있게 성원하였으며 조선족인민들의 반제운동의 발전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동시에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민족이 해방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무장으로써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하였다. "3.13"반일시위운동을 계기로 하여 연변의 반일운동은 무장투쟁에로 전환하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연변에서의 반일무장투쟁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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