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운동제1절 반일사사의 발전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2:00    조회: 52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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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8.jpgb_arow_06.gif 반일단체 
일제의 압박과 착취하에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b_arow_08.gif1910년 훈춘현성에서 리종호 등을 주요간부로 한 해도회(海島會)가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1년 왕청현 덕원리에서 대종교수령 서일이 중관단(重光團)을 묶고 단군숭배를 반일민족상으로 고취, 반일인재양성에 힘쓰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서일은 후에 자신이 건립한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재를 맡았다.(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b_arow_08.gif1912년 왕청현 백초구에서 조상갑을 단장으로 하는 급당(急當)이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2년 훈춘현성에서는 김학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삼우회(商務會)가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2년 왕청현 라자구에서 김천보를 회장으로 하는 농상회가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3년 훈춘현성에서 황병길을 회장으로 하는 기독교교우회가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3년 훈춘현에서는 박상규를 총리로 하는 둔전영(屯田營)이 설립되였다. 
b_arow_08.gif1914년 연길현 의란구에서 황성현을 회장으로 하는 친목회가 설립되였다. 

그 외에도 연길현 동성용에서 설립한 사우계(士友契), 룡정에서 설립한 청년친목회, 국자가에서 설립한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등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1913년5월에 민국정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설립된 "간민회(懇民會)"가 영향력이 큰 반일단체이다. 저명한 반일활동가인 김약연이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b_arow_06.gif 서전서숙 
1906년에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자기 재산을 내놓아 룡정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학교경비의 대부분은 리상설선생이 개인재산을 털어 해결하였다 한다. 초대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운영을 맡았는데 제일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반일을 취지로 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리상설은 직접 "산술신서" 상, 하권을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에게 교수하였고 황달영은 력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상술과를 려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다 열렬한 반일민족운동가들이였기에 모든 수업에서 반일애국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b_arow_06.gif 명동과 명동학교 
b_bulet_01.gif명동의 5대가족 
1899년2월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4대가족 142명이 하루사이에 명동지방에 이사왔다. 그들은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b_arow_08.gif남종구는 종성5현의 한분인 남명학의 손자인데 이주시엔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는 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제자인 김약인을 따라 명동지구로 이사해온 것이다. 
b_arow_08.gif김약연은 일족 31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 처음에는 경제형평이 너무도 빈궁하여 땅도 없었으나 동생 유연이와 함께 7도구의 산골에 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고로 동한지구의 집과 림야를 사 1901년 규암재를 꾸렸다. 
b_arow_08.gif김하규는 일가족 63명과 함께 명동에 이주, 명동마을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b_arow_08.gif문병규는 일가족 40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하여왔다. 로력이 많고 재력이 있어서 4대가족중 제일 부유했는바 룡암촌과 중앙촌에 이르는 넓은 벌을 가지고있었고 대사동에도 밭과 가산이 있었다. 
b_arow_08.gif윤하현은 1900년에 명동을 이사하여왔으니 4대가족 집단이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부친 윤재옥의 인솔하에 1886년 종성에서 광개향 자동에 이주하여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았다. 후에 일가족 18명을 거느리고 명동으로 이사와 룡암촌에 정착, 토지와 가산이 꽤 되였다. 

명동에 집단 이주한 5대가족은 북부조선에서 빈궁하여 살길을 찾아온 기타 류랑민과는 달리 세대로 내려오면서 관북에서 변경방술에 종사하던 무반출신의 후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종성5현의 후예들이거나 문하사람으로서 학식이 있고 다소나마 재력도 있는 유학자들이였다. 그들이 집단 이주한 목적은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 개간하여 잘 살아보자는것이였고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수 없으니 중국의 연변땅에 가 조선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 새 살림을 하자는것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다. 

b_bulet_01.gif명동학교 
1908년 명동에서는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려고 규암재, 소암재, 중영촌 함한서재를 합쳐 명동서숙을 세웠는데 룡정의 서전서숙의 근대지향인 반일민족교육방침을 계승했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할수 잇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주위의 마을을 망라하여 명동이라 통칭했는데 "밝은 조선민족의 새 민족공동체라는 뜻"이다. 

1909년 북간도교육단 단장 정재면이 명동에 왔다. 그의 영향하에 김약연 등은 근대화한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라 개칭하였으며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최봉기를 서기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으며 유가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하고있었다. 조선어문에 있어서 민족 글과 말을 알게 하는 것은 민족문화이 향상과 보급의 기초이며 문화 향상과 보급은 민족생존과 실력양성의 첩경이라고 인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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