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제1절 일제의 침략과 통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5:10:29    조회: 90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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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5.jpg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것은 1905년의 을사조약이 그 시작이였고 연변을 침략하기 시작한것은 1907년이다. 그 표징은 일제가 연변에 세운 통감부간도파출소이다. 

먼저 조선에 세워진 일제의 통감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저들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고 그런 취지에서 1905년 11월 9일에 당시 일본 추밀원 의장이였던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황의 특사로 파견되여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안전을 구실로 삼아 보호조약을 체결할것은 당시의 대한제국에 강요했고 유명무실의 대한제국은 결국 일제의 강압에 의해 내각회의를 거쳐 11월 17일에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이 통과되였다. 이 협약에 의해 조선은 일제에 의해 통감부라는 기관을 만들었고 서울의 남산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조선에 대한 통감정치의 시작으로 되는 이 협약의 내용을 보면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며,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를 만나볼 권리를 가진다. 또한 각 개항장과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방에 리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리사관은 통감의 지휘밑에 종래의 일본 령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며 동시에 본 협약의 조항을 실행하는데 일체 사무를 처리한다"는것이다. 이로써 당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는 통감이 되였다. 

통감부는 일본황제에게 직속된 기관이였고 통감부의 외교에 관해서는 일본의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의 재가를 받고 기타 사무에 관해서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황제에게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여 있었다. 통감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조선반도에서 외국령사관과 외국인에 대한 사무를 통괄하였고 한국에서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여러 업무를 감독하였다. 동시에 대한제국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대한제국 수비군사령관에게 병력사용을 명령할수 있었다.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의 개청식이 있었고 초대 통감으로 악명높고 안중근에 의해 할빈역두에서 피살당한 이또히로부미가 취임했다. 그는 동시에 대한제국의 수비군을 통솔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했다. 한마디로 말해 을사조약에 의해 성립된 통감부는 사실상 조선의 주권을 휘두르는 기관이였고 대한제국정부는 허수아비였다. 

1906년에 개청식을 가진 통감부가 그 이듬해에 급급히 연변에 진출해 파출소를 세우는 신속한 행동을 취한다. 여기에는 일제의 대륙정책이 작용하는바 단지 조선반도만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진출하려는 그들의 숨은 뜻이 담겨있었다. 

1895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청진 등지의 항로를 개척하고 나아가서 청진-회령-길림을 잇는 "길회철도"안을 제기하였고 정면으로 중국을 침략하기보다는 "뒤문"으로부터 동북을 침략하고 나아가서 중국대륙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연변침입은 일본의 오사까나 고베로부터 료동반도로 침입하는것보다 훨씬 가까운 로정이며 군사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의의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고 이미 제정된 저들의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침입이 급선무로 나섰다. 

연변침입에 있어서 구실이 필요한 일제는 소위 간도미소속문제를 들고나왔다. 민간에서 이미 불리워진 "간도"란 낱말이 외교문서에 나타난것은 1903년이였다. 1902년에 대한제국정부에서 리범윤을 "북변간도시찰특사"로 임명하였고 리범윤은 이 지역에 대한 고찰을 거쳐 간도는 두만강복판에 있는 땅이고 또한 처음부터 한민들이 경작하고있기에 한국의 령토라고 대한제국정부에 보고하였고 한국정부는 연변과 동변도지역에 살고있는 조선인들을 관할하려고 하였다. 이에 청정부는 강경하게 이를 부인하였고 따라서 중한량국의 간도분쟁이 시작되였다. 

1904년 7월에 중한량국의 지방관원들이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을 체결할 때 중국관원들이 간도의 토지를 회수하려고 하자 한국관원들이 종성의 다수 농민들이 간도땅을 부쳐 입에 풀칠을 하기에 계속 경작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청정부는 조선농민들이 계속 땅을 경작하되 청나라에 조세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연변침입의 구실을 얻기 위해 "간도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떠들면서 간도는 단지 두만강복판의 땅이 아니라 해란강이남, 두만강이북의 너비 2,3백리, 길이 5,6백리의 지역이 간도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을 대신하여 간도소속문제를 해결한다"고 자처해 나섰다. 일제는 저들의 나서는것보다는 한국인이 나서는것이 합리하다고 인정하고 한국의 친일파들을 사촉하여 "간도를 찾아줄것"과 간도의 "한인을 보호해줄것"을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제기하게 하였고 조선의 보호국으로서의 일본이 "명분"에 맞게 공개적으로 연변에 침입할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였다. 

여기서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앞장에 섰는바 일진회 간도지부장인 윤갑병은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에게 간도를 찾아주며 한인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을 시급히 간도에 진주시켜줄것을 간청했고 "간도를 찾기 위해서는 10여만의 일진회 회원을 출동"하겠다고 떠들어댔다. 동시에 이또히로부미는 친일파인 박제순을 사촉하여 한국정부의 명의로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간도의 한인을 보호해줄것"을 제기하도록 했다. 이에 일본외무성은 간도의 소속이 불명함으로 한국의 요청에 의해 보호국인 일본은 시급히 관원들을 간도에 파견하고 한국관리들도 함께 보내 한인들을 보호할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의해 1907년 2월에 일제는 "간도독무청 동경사무소"를 개설하고 일로전쟁시기의 장교였고 려순과 안동지구의 "군장관"을 지낸적이 있는, 이또히로부미로부터 인재이고 중국통이라고 칭찬받은 사이또 스에지로(斋藤季次郎) 륙군 중좌를 사무소의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이또는 연변을 정찰하기 위해 졸개들과 함께 4월에 장사군으로 가장하고 청진에서 륙로로 회령에 도착한 다음 4월 18일에 한인통역 1명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 동성용, 국자가(연길), 동불사, 로투구, 천보산, 투도구, 동고성자, 룡정 등지를 정찰하고 4월 29일에 종성에 돌아가 정식으로 간도침략계획을 작성하였다. 

이들이 서울에 돌아가 이또히로부미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러하다. 

b_arow_08.gif한인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의 명칭은 "통감부간도파출소"로 정하고 자리는 간도의 중심인 남강서부 마안산남측의 평지에 정한다. 
b_arow_08.gif통감부파출소가 교통이 불편한 벽지에 있기에 그 권한을 반드시 확대시켜 정황에 따라 림기응변으로 돌발사태에 적응할수 있게 할것, 즉 a) 한국정부의 위임을 받고 “간도의 가정구역내”의 한국인의 일체를 관할할수 있으며, b) 그 지구내의 일본신민에 대해서도 리사청과 동등한 권리와 직능을 가지며, c) 긴급시거나 부득이한 경우 가장 가까운 곳의 제국수비대의 출병을 청구할수 있는 등 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한다. 
b_arow_08.gif청나라의 현행 지방정부의 관할지에 대해서는 잠시 쟁론하지 말고 될수록 회유방침을 취하며 림기응변의 방법으로 우리의 진보를 가속화하는 방침을 취한다. 
b_arow_08.gif간도가 한국령토라는 전제하에서 일체 사무를 처리한다. 
b_arow_08.gif간도의 개발문제에 있어서는 a) 청진항을 개항하여 쯔루가(敦贺) 또는 마이쯔루(舞鹤)와 직항로를 개척한다. b) 일본과의 통상련락을 간편화하며 일본상품을 수입하고 량곡과 광산물을 수출한다. c) 간도에 경편철도를 부설하여 회령과의 교통을 편리케 한다. d) 청진-회령간의 경편철도를 점차 광궤철도로 개변한다. e) 통감부파출소와 회령간의 전화선을 가설한다. f) 통감부파출소를 시가지로 옮긴다. 

이상의 보고를 이또히로부미는 비준하였고 일제의 연변침략은 이 보고서를 기본지침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이또히로부미는 8월 6일까지 회령에 집결하라고 통감부파출소 소원과 헌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사이또 등은 8월 18일 오후 12시에 이또히로부미의 명령을 받고 이튿날 간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경주재 일본대리공사는 중국 외교부에 간도가 구경 어느 나라 령토인가를 해결하지 못한만큼 조선통감은 관리를 파견하여 한민을 보호하니 "귀국관헌은 오해하지 말라"고 조회하면서 외교마찰을 미리 막아버렸다. 

사이또는 군경 63명을 3개 반으로 나누어서 간도에 침입하였다. 원래는 천보산광산을 경영하고있는 일본의 "중화공사"를 통해 마안산남측, 해란강가의 동성용부근의 한족가옥을 세맡아 파출소청사로 하려고 하였으나 예정된 가옥이 적당하지 않아 룡정촌으로 자리를 옮겨 천보산광산의 광주인 정광제의 저택을 세맡아 수건을 거쳐 파출소청사로 삼았다. 이들은 1907년 8월 23일에 공공연히 "조선통감부 간도림시파출소"란 간판을 내걸고 사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고시문"을 내다붙였다. 

"고시문"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주지하다싶이 대한제국정부는 관리원을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는 한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2년간의 일로전쟁과 비적들의 소란으로 하여 한민들은 생명재산의 위협을 받았는데 이에 대하여 대한제국의 황제는 심히 걱정하였다. 대한제국 황제페하는 전국이 안정되자 그 숙원을 이또통감에게 알렸고 통감은 황제페하의 뜻을 받들고 본직들을 파견하였다. 본직들은 대한제국 황제페하의 성의와 통감각하의 명령을 받고 한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며 그들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하여 왔으니 민중들은 본직들을 신임하기 바란다. 

동시에 이들은 또 5가지 훈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b_arow_08.gif간도는 한국의 령토이다. 
b_arow_08.gif한인들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b_arow_08.gif청국관헌들이 징수하는 일체 조세를 파출소에서는 일률로 승인하지 않는다. 
b_arow_08.gif청국관헌들의 일체 법령에 대해서도 파출소는 승인하지 않는다. 
b_arow_08.gif청국관헌이 임명한 도향약, 향약 등을 한인과 마찬가지로 대할것이다. 

연변에 침입한 일제는 중국의 행정시설들을 무시하고 연변에다 제멋대로 구(区)와 사(社)를 설치하고 "도사장제"를 실시하면서 중국의 행정기구에 맞서나섰고 간도를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와 무산간도로 행정구역을 획분하고 각 구역에 "도사장"을 임명하고 그 관할하에 41개 사, 290개 촌을 두고 사장, 촌장임 임명하였고 신흥평, 국자가, 투도구, 호천포, 우적동, 조양천, 복사평 등지에 일본헌병대분견소를 설치하고 헌병과 한국경찰을 배치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김해룡 등 “일진회” 회원을 리용하여 조선족간민을 기만, 우롱하고 민족모순을 도발하여 조세를 청정부에 납부하지 못하게 하고 청정부의 지령에 항거하도록 선동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도처에서 중국내정을 간섭하고 외교사단을 일으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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