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3. 고조선의 사회경제문화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02:59    조회: 331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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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chaoxian3.jpg고조선은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였으며 후에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나라를 세운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원전 2,333년은 아직 한반도와 료하일대에서 청동기 문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이라는 세력이 등장한 이후 그것이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국가로서 본모습을 갖추기까지 각 지역별로 나름의 문화가 전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조선의 활동무대인 료하유역과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서 펼쳐진 청동기 문화는 크게 료서지역, 료동지역, 길림지역, 서북한 지역으로 나누어 서로가 구별되게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 전기 고조선의 세력범위안에서 확인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 토기, 팽이형 토기 등이다. 이 때 사용된 무덤으로는 고인돌, 석관묘, 적석묘 등이 있다. 한편, 고조선 후기에 이르면 철기가 도입되면서 세형동검 등의 청동기와 함께 철제 무기와 농기구 등이 사용되였다. 그리고 무덤으로도 석곽묘, 토광묘, 옹관묘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고조선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로서 강상무덤을 들수 있다. 이 무덤은 돌을 쌓아 무덤의 구역을 정하고 그 안에 무려 23개의 무덤 구덩이가 있는데 그 구덩이마다 여러 유골들이 묻혀있다. 따라서 이 무덤을 주인이 죽은 후 가족과 노예들을 같이 묻어 순장한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고조선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는 의견이 있어 왔다. 그러나 유골을 조사해본 결과 그들이 죽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져 이 무덤은 순장무덤이라기 보다는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묻힌 무덤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것 같다. 이와 같은 성격의 집단 무덤으로는 누상무덤, 침촌리형 고인돌 등이 있다.

고조선 사회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 주된 농기구와 생활용품은 석기였다. 대신 청동으로는 도끼, 끌, 송곳 등의 작은 공구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비로소 철제 농기구가 나타나지만 이때에도 역시 주된 재료는 돌과 나무였을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도구를 가지고 고조선인들은 벼, 조, 기장, 수수, 콩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고 농사에서 중요한 일기를 알기 위해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평안남도 용덕리 고인돌에 그려진 그림을 별자리라고 보기도 한다. 생활에서는 온돌난방이 시작되였고 음식을 쪄 먹을 수 있는 시루도 사용되였다. 베틀을 리용해 옷감을 짰는데 이미 비단과 같은 고급품도 만들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농기구를 이용해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였으며 인구도 많이 증가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잉여생산물의 축적으로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로 사적소유가 확대되여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 또 청동제 무기를 리용해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더욱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그 재산을 축적하는 방법으로 노예를 부리게 되였다.

또한, 철기시대에 들어오면 농기구와 무기는 더욱 발전하여 이를 소유한 계층과 소유하지 못한 자간의 빈부격차가 훨씬 커지게 된다. 이러한 계급간의 차이를 살펴볼수 있는것이 기자가 가르치고 시행했다는 8조법금이다. 8조법금을 통해 당시 노예제가 엄격히 존재했고 사유재산제가 상당히 발달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사회가 귀족, 평민, 노예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임을 알수 있다. 장군이나 벼슬아치, 지방 호민(豪民)은 상층부의 귀족세력을 이루면서 특권을 누렸으며 일반 백성들은 략탈과 노역의 대상이 되였다. 노비들은 생산활동에 동원될뿐만아니라 순장(殉葬)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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