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고구려의 건국

작성자: 은혜님    작성일시: 작성일2017-12-18 12:15:01    조회: 377회    댓글: 0

高句麗(고구리) 건국은 BC239年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 900년 당서 원문"

삼국사기 보장왕 27년과 당서 高句麗(고구리 : 려음"리")항목에서 '高麗泌記(고리비기)에 의하면,
"900년이 채 못되어 80세의 대장에게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하였고

"고씨(高氏)가 한의 시대로부터 나라를 지녀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 80세다" 고 하였으니 보장왕 27년(668년)이 900년이 되려면 건국한 시기는 BC232년으로 계산이 되는 바 최소한의 건국연대는 BC232년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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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리) 건국은 BC239年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에는 '한효원제건 이년(漢孝元帝建 二年)'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한효원제건 이년갑신세(漢孝元帝建 二年甲申歲)'라 하여 BC38년으로 기록하였으나, 삼국사기와 당서(唐書)에서 고구리역사가 九백년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므로 면밀히 연구를 보아야 한다

     첫째,
삼국사기 보장왕 27년과 당서 高句麗(고구리 : 려음"리")항목에서 '高麗泌記(고리비기)에 의하면
"900년이 채못되어 80세의 대장에게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하였고
"고씨(高氏)가 한의 시대로부터 나라를 지녀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 80세다" 고 하였으니,
보장왕 27년(668년)이 900년이 되려면 건국한 시기는 BC232년으로 계산이 되는바
     최소한의 건국연대는 BC232년은 되어야 한다

     둘째,

한서 권26에 의하면
'한무제시대(BC142-87)에 조선예맥(朝鮮濊貊), 句驪(구리:高句麗)가 있었다(무제시치조선예맥구려만이 : 武帝時置朝鮮濊貊句驪蠻夷)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건소 2년(漢建昭二年 : BC3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량서에서는
     북부여를 高麗(고리)와 음이 같은 색이(索離)로 쓰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주몽 이전에 이미 고구려역사는 시작되었고 고구리라는 명칭 사용이 주몽이 처음이 아닐까?
즉 BC37년은 국호변경연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세째,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왕(朱蒙王)의 12世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비에는 17世손으로 기록되어 있어 5세의 차이가 있다.
북부여기에서 천제(天帝)들을 보면

- 解慕漱(해모수),
- 2세 慕漱離(모수리),
- 3세 高奚斯(고해사),
- 4세 高于婁(고우루)와 高豆莫汗(고두막한)
- 5세에 高無胥(고무서 : 소해모수 小解慕漱)가 있다고 했으니 5세의 차이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비는 북부여 해모수(北夫餘 解慕漱)를 원시조로, 추모왕(鄒牟王)을 고구려 국호시작의 시조로 기록한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17세손에 의하여 북부여 역사는 고구려역사에 포함되어 있음을 뜻하며 한족들은 고離의 "고"를 索 또는 탁으로 변경시켜서 혼돈하게 하였던 것이다.

넷째,
광개토대왕비문삼국유사삼국사기에서 북부여에서 고구리가 건국되었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앞에서 보듯 북부여를 "고리"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북부여는 고구려 주몽의 아버지 국가이다.

신라(新羅)는 처음부터 신라로 했다는 기록은 없고 鷄林(계림), 斯盧(사로), 新盧(신로)로 부르다가 307년에 다시 신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였으니 (이상 江淮新羅 즉, 사로新羅) 新羅만을 따진다면 307년 이후만이 신라역사겠으나, 鷄林史 新盧史 斯盧史 역사를 신라역사에 포함하여 기록하고 있으니 북부여(고리)역사를 고구려역사에 포함하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

그런데 北夫餘(북夫餘 : 고리)의 解慕漱(해모수)가 天帝라 하면서 건국한때가 BC239년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 고구려 건국연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은 이 시대를 위만의 시대로만 정립하고 있으나 위만은 마한의 箕準(기준 : 삼국지30)의 자리를 찬탈하여 조선이라 칭하였으니 高句麗의 역사를 정립함에 있어 이 시대 民族史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고구리(高句麗)의 명칭 연구
     우리는 주몽이 건국하고 보장왕대 패망한 고구리(高句麗)의 이름을 하나로만 인식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 졌다는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高句麗)의 발음도 우리는 '고구려'로 발음하고 있으나 사서(삼국지)에서는 '고구리'로 발음 하라고 되어있으며 옥편에서도 '고구리'로 발음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권(史記)권 6에서도 려음리(麗音離)라 하여 분명히 '리'로 발음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고리즉고구려 : 三國志, 離卽高句麗)

사서에서 고구리(高句麗) 이외 다른 표현이 있음을 알아야 고구리 역사를 바로 밝힐 수 있는 것이다.(동음이자화 등)


사서별로 이름을 검토해 보면

- 고구리(高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魏書)권100, 북사(北史)권94,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

- 구리(句麗) : 삼국지(三國志)권30, 남사(南史)권79, 김부식 삼국사기잡지(雜志)6

- 하구리(下句麗) : 삼국지(三國志)30

- 고구리(高句麗) : 후한서(後漢書)권85, 송서(宋書)권97, 양서(梁書)권54

- 구리(句驪) : 후한서(後漢書)85, 양서(梁書)권54, 한서(漢書)권26

- 하구리(句驪) : 한서(漢書)권99, 양서(梁書)권54

- 고리(高麗) : 위서, 북사, 구당서, 당서(魏書, 北史, 舊唐書, 唐書)

- 고리(高驪) : 송서(宋書)

- 고리(高離) : 삼국지(三國志)

- 고리(高離) : 양서(梁書)

- 구여(句餘) : 사기(史記)

- 색리(索離) : 북사(北史)

- 맥이(貊耳) : 후한서(後漢書)

- 구루(溝婁) : 삼국지(三國志)

- 요동국(遼東國) :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

- 평주목(平州牧) : 양서(梁書)권54
위와 같이 여러가지 문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문자는 달라도 하나의 국가였음을 염두에 두어야 사서를 바르게 볼 수 있다.

- 구여음자각이부득위 사기(句餘音字各異不得爲 史記)31-4,

- 구루자구려(溝 者句驪) : 구루자구려 삼국지(溝 者句麗 三國志)30-26,

- 구려일명맥이 후한서(句驪一名貊耳 後漢書)85,

- 고리즉고구려 삼국지( 離卽高句驪 三國志)30-24.

- 북옥저일명구루 삼국지(北沃沮一名溝  三國志)

해모수(解慕漱)시대의 국호는 무엇인가 ?
- 고리(高離,  離 ; 高句麗)이다 -

삼국지에는 색리(索離) 또는 탁리( 離)로, 삼국유사에는 북부여(北夫餘), 광개토대왕비에는 북부여(北夫餘). 위서(魏書)에서는 부여(夫餘)라고 하였다.

양서(梁書)에서는 고리( 離), 북사(北史)에서는 부여(夫餘), 신구당서(新舊唐書)에 부여(夫餘)라 하였다.

북부여, 부여, 고리(北夫餘, 夫餘,  離) 등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서와 김부식 삼국사기에서 '해모수의 부여(夫餘)'는 고구려역사(高句麗歷史)라 하였다.

(보장왕 27년(668년) '고려비기일부급구백년(高麗秘記日不及九百年)')

장안(長安) 중심의 두번째 사서인 한서(漢書)권26에 '무제시치조선예맥구려만이(武帝時置朝鮮濊貊句驪蠻夷)'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분명히 구리(句驪)는 해모수의 부여(夫餘)를 이른 말이라 할 수 있다.

고구리역사를 바르게 연구하려면 고구려와 북부여의 여러가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기록이 고구려역사로 대입하여 보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소리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리'는 高句麗, 高句驪

'구리'는 句麗,句驪

'고리'는 高麗, 高驪,  離, 離

'구루'는 溝 , 溝婁

'맥이'는 貊耳

'구여'는 句餘

'부여'는 扶餘,夫餘

'북부여'는 北夫餘, 北扶餘, 索離,  離

'요동국'은 遼東國, 平州

'遼동대방2국왕' 등

     어떤기록으로 되었던 고구리역사가 BC239-AD668년내에 있다면 하나의 고구리로 정립해야 마땅한 것이다.

북부여(北夫餘)를 고리( 離)로 불렀다고 하니 북부여와 고구리(高句麗:高麗)는 모두 고구리 역사인 것이다.

고구리(高句麗)는 동이(東夷)의 일부로 기록하고 있다

     장안(西安)중심의 주(周), 진(秦), 한(漢)을 정통으로 하고 있는 한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리(高句麗)는 동이(東夷)의 일부로 기록하고 있다.

진(晉:265-316)때 편찬된 삼국지(三國志)에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한, 위(왜)인(夫餘, 高句麗, 東沃沮, 濊, 韓,倭人)을 동이(東夷)로써 기록되어 있다.

송(宋:420-479)때 편찬된 후한서(後漢書)에도 부여, 읍루, 고구리, 구리, 동옥저, 예, 한, 위(夫餘,  婁, 高句麗, 句驪, 東沃沮, 濊, 韓, 倭)가 동이(東夷)로써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리가 포함되어 있다.

양(梁:양;502-557)때 편찬된 남제서(南齊書)에도 高句麗(고구리),百濟(맥제), 加羅(가라), 倭(위)가 동이(東夷)로써 기록되어 있다.

당(唐:618-907)때 편찬된 양서(梁書)에서 高句驪(고구리). 百濟(맥제), 新羅(신라), 倭(위)가 동이(東夷)로써 기록되어 있다.

후진(後晉:936-946)때 편찬된 구당서(舊唐書)에 高麗(고리), 百濟(맥제), 新羅(신라), 倭國(위국), 일본(日本)이 동이(東夷)로써 기록되어있다.

송(宋:960-1126)때 편찬된 당서(唐書)에 高麗(고리), 百濟(맥제), 新羅(신라), 日本(일본)이 東夷(동이) 로써 기록되었다.


출처: http://www.zoglo.net/blog/read/kokuryeo/3177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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